1977년 동아투위는 생활고 끝에 병을 얻은 2명의 위원을 저세상으로 떠나보내야 했다. 그해 2월 30대 중반에 요절한 조민기 위원의 장례식장을 찾은 윤보선 전 대통령이 조의록을 적고 있다. 왼쪽 뒤로 부인 공덕귀씨, ‘양심수의 어머니’ 김한림 선생(서강대 김윤씨 어머니)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 <자유언론> 중에서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5)
1977년은 동아투위가 기로에 선 시기였다. 무엇보다 슬픈 일은 조민기·이의직 위원의 죽음이었다. 두 위원은 생활고 탓에 신병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속절없이 죽어갔다.
조 위원은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지 5개월 뒤 부인(홍정선)과 함께 외동딸 아라의 이름을 따 ‘아라네 옷가게’를 열었다. 새벽 4시 동대문시장에서 도매로 옷을 떼어와 밤늦게까지 가게를 여는 무리를 하다가 1년 만에 신장병을 얻은 그는 77년 1월19일 서른다섯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식은 서울대병원에서 한빛교회 이해동 목사의 집전으로 치렀다. 많은 사회 원로들이 애도해주었다.
‘화불단행’이라고, 77년 10월 이 위원(전 출판국 출판부장 직대)이 부인(이월선)과 3남매(주헌·동헌·윤경)를 남겨둔 채 마흔일곱에 눈을 감았다. 그는 1년 전 위암 진단을 받았으나 “가족이나 동아투위 동지들에게 누를 끼칠 수 없다”며 일체의 투약을 거부했다.
위원들은 저마다 생활고에 허덕여 두 동지에게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는 현실을 더 안타까워했다. 이종욱(<신동아> 출신) 위원이 쓴 조시로 애도를 대신했을 뿐이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이 땅의 어둠을 밝히다가/ 두 번째로 꺼진 불꽃입니다/ 이제 하늘에는 별이 또 하나 늘었습니다/ 어둠이 깊을수록 빛나는 별이/ 죽음마저 절망이 아니라 희망이라 말하는 별이(…)/ 우리가 힘차게 일제히 울리는 종소리와 함께/ 마침내 이겨 이 땅의 참된 주인이 되는 날까지(…).”
두 위원의 죽음은 동아투위에 ‘자유의 혼’을 다시 일깨워주는 계기가 되었다. 언론자유를 위해 목숨 바친 두 동지의 뜻을 우리는 저버릴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은 점점 더 거꾸로 돌아갔다. 경찰은 3·1절과 4·19 혁명일, 8·15 광복절 등 계기 때마다 재야인사들을 가택연금했다. 투위 위원들에게도 사찰과 감시가 이어졌다. 재야 행사에 참여할 것을 우려한 관할 경찰서·서울시경·중앙정보부는 77년 1월 중순께부터 위원들의 거주지와 현황을 일제히 사찰했고, 다수의 위원들을 공휴일마다 연금했다. 국가 기념일에 민주인사들을 오히려 더 탄압하다니, 박정희 유신독재가 정서적 ‘멘붕’ 상태에 빠져버렸음에 틀림없었다. 그해 3·1절 기념식을 하지 못한 재야인사들은 3월22일 ‘민주구국헌장’을 발표했고, 우리 위원 54명도 동참 서명을 했다. 그러자 중정은 서명자 모두를 연행해버렸다.
동아투위 해직자들이 동아일보사에 복직하는 것은 점점 요원해지고 있었다. 위원장이나 총무가 감옥에 가는 것도 시간문제로 보였다. 아무리 남녀평등론자들이라 해도 중학생을 둔 학부모인 권영자 위원장을 감옥에 보낼 수는 없다는 공감대가 위원들 사이에 형성되었다. 그해 5월17일 정례모임에서 두 가지 결정을 내렸다. 정례모임은 동아일보사 앞 상설집회를 중단한 76년 9월 이후 매월 17일 점심때 모였는데, 38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계속되고 있다.
하나는 권영자 초대 위원장에 이어 고 안종필(전 <동아일보> 편집부 차장) 위원이 2대 위원장을 맡고, 하나는 앞으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동참하고 연대한다는 결정이었다. 이때 박종만 위원도 총무의 짐을 고 홍종민 위원에게 넘겼다.
우리의 예측대로, 안 위원장과 홍 총무는 그 뒤 옥살이를 해야 했고, 그때의 고초로 인해 두 위원 모두 훗날 병사를 하고 말았다. 때문에 투위 위원들 모두에게 ‘깊은 한’으로 남아 있다.
동아투위는 언론자유 운동의 초점을 민주화투쟁에 맞추면서 주장도 달라졌다. 10·24 3돌 기념으로 발표한 ‘자유언론실천 77선언’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이 땅에는 무수한 ‘소리’들이 ‘소수’라는 낙인이 찍힌 채 배척되고 있다. 성명서 한 장을 냈다고 해서, 시 한 줄을 썼다고 해서, 인권기도를 했다고 해서, 양심의 명령에 의해 시위 한 번 했다고 해서 뻔질나게 수사기관을 들락거려야 하고, 또는 감옥으로 끌려가야 한다. 학생도, 종교인도, 지식인도, 학자도, 정치인도, 근로자도 소리 없이 사라지고 있다. 오직 특정의 목소리만 거리와 안방을 메우고 있을 뿐이다. (…)”
동아투위와 조선투위는 그해 12월30일 공동송년회 겸 이부영 위원과 나의 ‘출감 송년회’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민주민족언론선언’도 공동발표했다. “민중에게 자유를, 민족에게 통일을-이것은 누구도 어쩔 수 없는 우리 시대의 요청이며, 아무도 거역할 수 없는 역사적 방향이다.” “우리 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는 이런 인식에 입각하여 자유언론은 바로 민주언론, 민족언론임을 선언한다.” “민주언론은 민중의 아픔을 같이하는 민중을 위한, 민중에 의한, 민중의 것이어야 한다. 따라서 우리는 한 줌도 안 되는 지배자의 언론이기를 거부한다. 체제나 정권은 유한하다. 그러나 민중과 민족은 영원하다.”
이때부터 동아투위의 신념은 가난하고 억눌리고 소외되어 있는 국민 다수의 편에 서는 언론자유, 민주와 민족을 위한 언론자유의 정신으로 진화했다. 그 정신이 37년이 지난 오늘날 얼마나 실현되었는지 언론인 모두 되돌아볼 일이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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