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6년 들어 동아투위 위원들은 저마다 가족 부양의 책임을 다하고자 생계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사진은 필자가 77년 말부터 촉탁으로 일했던 타블로이드판 <주간 시민>의 그해 10월24일치 표지.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4)
동아투위 위원 일부는 1976년 4월 ‘종각번역실’을 차렸다. 고 이인철 위원의 동생이 종각 맞은편(현재 영풍문고 자리)에 치과를 운영하고 있었다. 그 사무실의 일부를 할애해줘 이 위원은 스스로 실장을 맡고 여러 위원을 전업 번역가로 ‘등단’시켰다. 번역실에는 장윤환·이계익·고 우승룡·박지동·황의방·박순철·이종대·김종철·송재원·정영일·윤성옥·국흥주·정연주·조영호 위원 등이 출근했다.
종각번역실은 80년 전두환 정권 등장과 함께 폐쇄되는 바람에 아주 짧은 기간 활동했지만, 한국 출판계에 상당한 기여를 했다. 이들이 번역한 책 면면을 보면 알 수 있다. 신학자 디트리히 본회퍼의 <죽음 앞에서>를 비롯해 <말콤 엑스>, <소유냐 존재냐>, <뿌리>, <20세기 10명의 구도자들>, <라라의 회상>, <마찌니 평전>, <종교와 자본주의의 발흥> 등 당시 출판계를 뒤흔든 번역서들을 내놓았다.
해직 뒤 기왕에 관여했던 문학과 지성사 대표를 맡은 김병익 위원을 논외로 하면, 부인(서재숙)과 함께 정우사를 차린 김재관 위원(전 <동아일보> 과학부장)이 가장 먼저 출판업으로 진입했다. 권근술 위원과 조선투위 최병진 위원은 청람출판사를 시작했다. 이후 조학래 위원이 과학과 인간사를, 장윤환·임채정·이종욱(신동아부 소속) 위원이 예조각을, 고 김진홍 위원이 전예원을, 김언호 위원이 한길사를 만들었고, 80년대에 들어서도 정동익 위원이 아침출판사를, 김태진 위원이 부인(김경회)과 함께 다섯수레를 만들어 한국 출판계의 제3세대를 형성했다.
내가 보기에 정치·경제·인문·사회사상적으로 민주화 의식을 고양할 목적으로 책을 펴낸 ‘민주화 출판 제1세대’는 고 장준하 선생의
<사상계>와 고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라 할 수 있고, 제2세대는 창작과 비평사, 문학과 지성사 등을 꼽을 수 있다. 일월서각, 동광출판사와 더불어 조선투위 정태기 위원이 시작해 신홍범 위원이 승계한 두레 등도 제3세대로 합류했고, 제4세대는 80년대 학생운동권에서 폭발시킨 사회과학 출판사들이다. 제3세대 출판사들이 전두환 정권의 등장 이래 단절기를 겪지 않았다면 지금도 출판계의 한 축을 차지하고 있을 텐데, 대부분이 없어지거나 위축되어 안타깝다.
76년 7월 내가 감옥에서 나오자 <월간 바둑>에서 영업을 담당하고 있던 심재택 선배가 편집장으로 추천을 해줬다. 당시 전문 기사들은 매우 곤궁했던 터라 직원들의 봉급도 아주 짠 편이었다. 그래도 직장에 나가는 게 어딘가, 나는 76년 10월부터 출근했다. 그때 편집부 차장이 유건재 5단(현재 8단·<스카이 바둑TV> 사장)이고, <만다라>의 소설가 김성동도 함께 근무했다. 그런데 석달째인 그해 연말, 당시 한국기원 정동식 사무총장이 나를 부르더니 아주 난처한 표정을 보였다. ‘국가보안법 위반자’가 인쇄매체에서 일을 하면 안 된다는 얘기를 들었단다. 바둑잡지에다 시국선언이라도 실을까 두려웠을까, 나는 군말 없이 사표를 냈다.
그런데 77년 말 뜻밖에도 <주간 시민>의 편집 촉탁이 되었다. 박종만 위원이 인권운동협의회 간사로 옮겨간 자리였는데, 촉탁으로 일주일에 두 번 나가 편집만 담당했다.
이 잡지는 박정희 대통령의 조카사위 장덕진이 서울시장 시절 창간한 시정 홍보지였다. 그가 시장을 그만두자 서울시는 지원금을 끊어버리고 매주 5000부 정도의 신문만 사주었다. 그러다 보르네오통상의 위상욱에게, 다시 중앙대로 넘어갔다. 그런데 중앙대에서 파견한 이달순 사장은 동아투위 이계익 위원을 편집부장으로 초빙하고, 이종덕·이기중·김언호·이종욱(신동아부 소속)·이영록·고 김성균 위원들로 편집 간부진을 구성했다. 개편 요청에 부담을 느낀 이계익 위원이 76년 5월 사임하자, 이종욱(동아일보 편집국 소속) 위원이 편집부장을 맡아 잡지의 환골탈태를 이끌었다. 그는 박종만·이태호·유영숙 위원도 모으고 학생운동권 출신 오성숙(김세균 교수 부인)·이혜경(유인태 의원 부인)·김선숙·이상우·오세구 등도 채용했다.
<주간 시민>은 ‘시민 시단’이라는 고정란을 만들어 매주 고은·신경림·정희성·박몽구 등 참여주의 작가들의 시를 싣고, ‘이달의 문제작’에는 기왕에 발표된 저항주의 작가들의 단편소설도 실었다. 예비군 훈련을 주제로 한 송기원의 단편 ‘집단’을 실었다가 국군 보안사의 수사를 받기도 했다. 그러자 서울시는 아예 잡지 구매를 끊어버렸다. 하지만 시사 정보에 굶주린 서울시민들 사이에 잡지의 인기가 높아져 발행부수가 3만5000~4만부에 이른 덕분에 독자 운영이 가능했다.
그러자 문공부가 나섰다. 문공부 보도국장 황선필이 “그러다 다친다”라는 경고 메시지를 수시로 날렸다. 다만 그는 한때나마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한솥밥을 먹어서인지 형사사건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결국 공안당국이 나섰다. 이미 동아투위 해직자들에게 ‘압력’이나 ‘협박’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터득한 당국은 중앙대 쪽을 윽박질러, 끝내 78년 초 <주간 시민>의 무기한 정간을 자진 선언하고 말았다.
하지만 우리는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뉴스가 무엇인지, 국민들이 독재자의 횡포를 막아줄 힘과 의지를 가질 때 비로소 언론자유가 꽃필 수 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짧았던 ‘주간 시민 시대’를 통해 우리는 새 언론을 위한 소중한 실험을 한 셈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당시 제작진 명단에 이달순 발행인과 이종욱 편집부장을 비롯한 동아투위 위원들의 이름이 들어 있다. <한겨레> 자료사진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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