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6월 ‘청우회 사건’으로 서울구치소에서 1년 실형을 산 필자(성유보)는 옥중에서 이른바 ‘재일동포 유학생 간첩단 사건’으로 들어온 동포 청년들의 억울한 사연을 알고 분노했다. 사진은 간첩사건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던 유학생 이철(오른쪽)씨가 가석방으로 풀려나 13년을 기다린 약혼녀 민향숙(왼쪽)씨와 88년 10월 지각 결혼식을 하게 된 소식을 담은 민가협의 회보.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1)
‘청우회 사건’ 1심 재판이 막바지로 치닫던 1975년 11월 말, 웬 ‘빨간 딱지’ 한 명이 서울구치소 9사(舍) 상(上)으로 들어왔다. ‘빨간 딱지’란 나처럼 국가보안법이나 반공법 위반 혐의로 들어온 정치범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의 죄수 번호에도 빨간 표시를, 감방문에도 가로 8㎝, 세로 5㎝ 크기의 네모난 빨간 딱지를 붙여 놓는다. “이 사람은 빨갱이니까 가까이하지 말라”는 경고의 표시다.
나는 9사 하 끝방인 17방에 혼자 수감되어 있었는데 그도 9사 상 독방에 배치되었다. 그 이튿날 구치소 마당에 나가 20~30분 바람을 쐬게 해주는 운동시간에 그를 만났다. 피차 빨간 딱지끼리라 자연스레 얘기가 시작되었다. 그는 재일동포 유학생 장영식으로, 74년 3월 서울대 대학원에 유학 왔다가 한 달 전쯤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자신도 잘 모르는 유학생 21명과 함께 ‘재일동포 유학생 학원침투 간첩단 사건’에 엮여 들어왔다며 황당한 사연을 들려줬다.
장영식의 아버지는 도쿄에서 악보 전문 출판사를 운영하는 사장이자 재일대한민국민단(민단) 간부였다. 한국 정부 쪽인 민단 간부의 자녀가 공산주의자로 둔갑한 이유는 오로지 <자본론>을 ‘읽은 죄’였다. 중정에 끌려와 고문을 당한 끝에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읽고 공산주의자가 되고”라는 자술서를 썼던 것이다. 게이오대학 법학과 시절 경제학 필수과목으로 ‘자본론’을 공부했기에 ‘읽어봤다’고 답했을 뿐인데 왜 그것이 한국에서는 엄청난 죄가 되는지, 그는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일본에 살지 왜 한국에 왔느냐”는 내 물음에 그는 “아버지 뜻”이라고 했다. “우리 집이야 먹고사는 데는 큰 어려움이 없지만, 네가 일본에서 좋은 직장을 가지기는 어렵다. ‘조센진’이라며 차별당하기보다 이제 국교도 텄으니 너는 조국에 가서 어깨 펴고 한번 살아봐라”고 하셨단다.
76년 3월 1심에서 끝내 ‘2년 6개월’ 실형을 받은 그는 어깨가 축 처져 돌아왔다. 곧 풀려날 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간첩 사건에서 무죄로 풀려나간 적이 거의 없다”는 내 말에, 그는 중정에서 아버지에게 오제도라는 변호사를 추천하면서, 그의 말만 잘 들으면 좋은 결과가 나올 것이라 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재판에서 오 변호사가 시키는 대로 “무조건 잘못했으니 한 번만 용서해달라”고 빌었고, 오 변호사가 “이렇게 뉘우치니 선처 바랍니다”라고 변론을 했기에, 그리될 줄 믿었다고 했다.
“나쁜 사람들 같으니라구! 아무것도 모르는 동포 젊은이에게 천하의 반공검사 출신 변호사를 알선해서 죄를 인정하게 만든 뒤 징역형을 때리다니!” 나는 치솟는 분노를 참으며 “오 변호사가 뭐라 말하든, 자네는 최후진술에서 애초 유학 온 동기를 사실 그대로만 말하라”고 조언했다. 다행히도 장영식은 그해 5월 2심 재판에서 풀려났다. 구치소를 나가면서 그가 던진 한마디가 아직 내 귀에 생생히 남아 있다. “두 번 다시 한국 땅을 밟지 않겠습니다.”
이야기가 좀 건너뛰지만, 79년 초 나는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서울구치소에 또다시 들어갔는데, 장영식과 같은 간첩 사건으로 들어온 재일동포 유학생 이철이 그때도 복역하고 있었다. 70년대 초 고려대 대학원에 유학 왔던 그는 1·2·3심에서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아 감방에서도 수갑을 차고 있었다. 그런데 그해 2월쯤 20년형으로 감형됐다. 그때 기뻐하던 그의 모습이라니! 그는 4·5·6동의 모든 정치범에게 사식(돈을 주고 사 먹는 밥)을 돌렸고, 우리 모두의 축복을 받았다.
“사형수는 형 집행을 당하기 전에는 영원히 미결수로 남아 있다”고들 말한다. 언제 죽음이 닥칠지 모르는 사람과 형이 끝나면 감옥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사람의 차이가 이처럼 크다니. 그때 나는 사형제도가 없어져야 한다고 믿게 되었다.
이철은 88년 10월 개천철 특사로 풀려나 13년을 기다려준 부인 민향숙과 지각결혼식을 올렸다. 숙대 재학 시절 이철을 만나 76년 봄 결혼식에 앞서 혼인신고까지 했던 민향숙은 ‘남편을 간첩으로 신고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3년 6개월간 징역을 살고 풀려난 뒤 그는 어머니와 함께 민가협에 가입해 끈질기게 옥바라지와 구명운동을 한 끝에 이철의 가석방을 이뤄내 감동을 안겼다.
앞서 71년 ‘재일동포 간첩단 사건’으로 구속돼 보안사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분신자살을 시도했던 서승·서준식 형제의 기막힌 사연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요즘 들어 새삼 나를 감동시킨 것은, 19년이나 억울한 옥살이를 한 그가 한국이라는 국가의 야만을 모두 용서하고 한민족의 평화·공존과 아시아 평화 연대를 위해, 지금도 한국·대만·중국·일본 오키나와 등을 분주히 오가며 운동을 하고 있는 모습이다.
구한말 이래 유랑을 떠나야 했던 무수한 동포들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최근 재북화교 출신 유우성씨 간첩 조작에서 보듯, 그들을 따뜻이 안아주기는커녕 ‘빨간 색안경’으로 맞는 유신독재의 망령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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