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5년 6월 이른바 ‘청우회 사건’으로 국가보안법 혐의를 뒤집어쓴 필자(성유보)는 1년 형을 받아 서대문 서울구치소에서 첫 옥살이를 했다. 사진은 76년 7월 초 출소해 환영객들과 기뻐하는 모습으로, 맨 왼쪽부터 고향 친구 김혁권(안경 쓴 이), 동아투위 이종덕·윤성옥 위원, 필자, 동아투위 권영자 위원장·김창수 위원, 고 백기범 조선투위 위원.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60)
중앙정보부는 나를 ‘모택동식 공산주의자’로 몰기 위해 우리집을 수색해 <모택동 사상> <사회사상사> <민주사회주의론> 등 책을 압류해 갔다. 나는 ‘모택동 사상’과 ‘사회사상사’는 읽었지만, ‘민주사회주의론’은 미처 읽지도 못한 상태였다. 김상협 고려대 총장과 서울대 총장을 지낸 최문환 교수가 쓴 책들을 보고 내가 모택동주의자가 되었다면, 나는 정치사상사를 읽을 때마다 영국식·프랑스식·미국식 사상주의자로 날마다 변신할 판이었다.
최근 ‘청우회 사건’ 수사기록을 자세히 살펴보다가, 당시 동아투위 위원 수십명이 참고인으로 불려가 조사를 당한 사실을 새삼 알게 되었다. ‘모진 놈 옆에 있다가 징 맞는다’고, 시달렸을 동료 위원에게 송구스럽기 짝이 없다.
어쨌든 ‘모택동주의자’란 낙인이 찍힌 채 나는 서울구치소(옛 서대문형무소)로 넘어갔다. 검찰은 8월 초 우리를 불렀다. 8월4일 나는 변갑규 검사에게 사흘째 불려가서,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아닙니다”라고 중앙정보부에서 시키는 대로 베껴 썼던 조서 내용을 전면 부인했다. 8월6일 아침에도 같은 말을 되풀이했더니 검사는 “알았다”고 했는데, 오후 2시께 남산에서 나를 수사했던 2명이 구치소로 찾아왔다. 그들은 “왜 우리 조사 내용을 부인하느냐?”고 물었다. “사실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러면 왜 그렇게 진술했느냐?” “당신들이 강제하지 않았습니까?” “그래, 그러면 우리 회사에 한 번 더 다녀가지그래.” (…) 사건이 검찰로 넘어갔다고 해서 중정의 손아귀를 벗어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답했다. “그곳은 두 번 다시 가고 싶지 않소. 알았으니 돌아가시오.” 그 이튿날 변 검사는 다시 불러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아직도 생각에 변함이 없느냐”고 물었다. 나는 “어제 구치소로 수사관 두 명이 찾아왔다. 중정 조사는 사실이다”라고 말했다.
검찰 조사는 그렇게 일사천리로 끝났다. 영등포구치소에 분리·수감돼 있던 이부영과 정정봉에게도 같은 수법으로 조사가 진행된 사실을 재판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
그해 가을 1심 재판(재판장 심훈종 부장판사)은 우리 모두 공포 분위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에서 참으로 싱겁게 끝났다. 중정 수사관 6명은 하루도 빠지지 않고 법정에 출석해 우리를 심리적으로 압박했다. 1심에서 이부영은 징역 8년, 정정봉과 나는 징역 2년6월 형을 받았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동아투위 동지들과 재야 인사들, 고향 친구들이 꾸준히 재판을 지켜보는 것을 보고 나는 차츰 생기를 회복할 수 있었다. 고 이우정·고 김한림 선생 등 기독교계 인사들, 고 이대우·소설가 고 이태원·박광현 등 경북고 동창들과 임병춘 선배 등 고향 사람들이 면회 올 때면 반갑기 그지없었다.
고 이범열 변호사가 내 변호를 맡아줬는데, 경북고 동창이자 훗날 검찰총장을 지낸 이명재 검사가 “내 친구 성유보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아닙니다”라며 부탁해준 덕분이었다는 사실을 최근에야 집사람을 통해 알게 됐다. 친구 권민웅도 “알아봤더니 큰 사건이 아니다”라며 안심시켜 줬다고 했다. 권민웅은 나와 초·중·고·대학 동창으로서 서울대 문리대 외교학과를 나와 중정 6국 사무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원래 중정에서는 다른 부서의 일에 관심을 가져서는 안 된다. 하지만 그는 어릴 적 ‘불알친구’인 내가 “공산주의자일 리가 없다”고 믿고 담당 과장에게 터놓고 물어봤고, 너무 걱정 말라는 대답을 얻었다고 했다.
김병연 재판장 주재로 76년 3월부터 시작된 2심 재판은 분위기가 사뭇 달랐다. 협박과 고문의 공포에서 벗어난 우리는 사건의 윤곽을 새로 파악하기 시작했다. 검찰 공소장대로라면 우리는 여러 차례 만나면서도 ‘청우회’란 조직을 만들 생각을 하지 않다가, 하필이면 이창홍이 ‘민청학련 사건’으로 수배중일 때, 더구나 사건 관련자들이 이미 사형이나 무기징역 등을 받은 극히 엄혹한 순간에, 그것도 “모택동식 공산주의 혁명을 도모하기 위해” ‘청우회’를 조직한 셈이었다. 미친짓을 했다는 얘기다.
하지만 재판 내내 내 마음을 가장 짓누른 것은 “빨갱이”라는 누명 탓에 동아투위가 위축되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이었다. 하지만 동아투위는 누가 뭐라든 이부영과 나를 굳게 믿고 있었다. “저희들은 이 땅에 자유와 정의가 구현되기를 바라고 약한 자의 슬픔이 없기를 기원하면서 가난과 고난을 감수하듯이, 그들 두 사람도 조국의 참다운 번영과 평화를 바라는 민주시민임을 믿습니다.” 76년 4월 권영자 위원장 등 동지 72명이 서명한 탄원서를 2심 재판부에 냈다는 소식을 변호사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기뻤다.
그런데 이창홍은 2심 재판의 증인으로 출석해 모든 질문에 대해 “기억이 없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는 심지어 나를 몰라봤다. 그런 기억상실증 환자가 어떻게 중정에서 청우회에 대해서만큼은 소상히 진술을 했다는 말인가. “남편이 잠자리가 날아다니는 것을 보고 ‘나를 잡으러 헬리콥터가 날아오네’라며 기겁했다”는, 2심 재판 당시 그 부인(이효숙)의 증언은 이창홍이 고문에 의해 정신분열증에 걸린 것 같다는 내 심증을 굳게 했다. ‘모택동식 사회주의’라는 우리의 죄목도 그가 아니라 제3자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 분명했다. 결국 이부영은 2년6월, 정정봉은 1년6월 실형을 받았고, 나는 1년 형을 산 뒤 76년 7월 서울구치소를 나왔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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