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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닷새간 고문받고 난 ‘모택동주의자’가 됐다 / 이룰태림

등록 2014-03-25 18:52수정 2018-05-10 13:28

1975년 6월 이른바 ‘청우회 사건’으로 필자(성유보)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 위원은 가톨릭학생회 대학생 모임인 ‘명동성당 7인위원회 사건’에도 연루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동시 재판을 받았다. 사진은 그해 11월 7인위원회 사건 관련 대학생 23명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공판 거부를 선언한 뒤 나오는 모습. 기독자민주동지회 제공
1975년 6월 이른바 ‘청우회 사건’으로 필자(성유보)와 함께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된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 위원은 가톨릭학생회 대학생 모임인 ‘명동성당 7인위원회 사건’에도 연루돼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동시 재판을 받았다. 사진은 그해 11월 7인위원회 사건 관련 대학생 23명이 서울지방법원 대법정에서 열린 첫 재판에서 공판 거부를 선언한 뒤 나오는 모습. 기독자민주동지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9)
‘동아투위’ 대변인 이부영은 75년 6월9일 신문회관으로 가던 길에 정체불명의 사나이들에게 체포된 뒤 18일 구속됐다.

박정희 정권은 그가 제임스 시노트(진필세·메리놀외방선교회) 신부를 통해 그해 3월 말 권영자 동아투위 위원장과 한국 정치상황 조사차 방한한 도널드 프레이저 미 하원 국제기구소위원회 위원장을 만나도록 주선하면서부터 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뒤 이부영은 재미동포신문 <코리아 저널>에 실린 유기천 전 서울대 총장의 칼럼(‘독재는 적화의 황금교’)과 미국 <성조>지(5월18일치)가 보도한 ‘걸프, 한국 정부에 400만달러 공여했다’는 기사 등을 용산고 후배 이신범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명동성당 학생운동의 핵심인 서울대생 심지연이 이를 번역한 유인물 수만장을 서울시내에 뿌리려다 발각되면서 이른바 ‘명동성당 7인 위원회 사건’으로 비화해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끌려들어간 것이었다.

나는 6월25일 ‘남산’에 가서야 구속된 이부영이 중정에 구금된 사실을 알게 됐다. 중정 요원들이 “이부영과 정정봉이 이미 모든 것을 다 불었으니, 너·이창홍·이부영·정정봉이 만나 모의한 ‘청우회’에 대해 있는 대로 말하라”고 윽박질렀던 것이다.

그들은 구금 나흘째 되는 날 ‘청우회의 강령과 규약’이란 문건을 들고 와 “너희들, 이 나라에 모택동식 공산주의를 만들려고 청우회를 만든 것이지?”라고 다그쳤다. “이부영과 정정봉이 썼다”는 ‘자술서’도 보여주었다. 하지만 나는 모든 것을 부인했다. 그들의 자술서 내용이 전혀 사실이 아니었을뿐더러,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아니었으므로. 그렇게 닷새 동안 버텼다. 그들은 주로 야간에 2~3차례에 걸쳐 야전침대의 네모진 각목으로 엉덩이와 종아리를 장작 패듯 두들겼다. 주로 매질을 한 사람은 ‘채제묵’이라고 했는데, 필경 본명은 아닐 것이다. 낮에는 이미 썼던 내용을 쓰고 또 쓰라는 명령이 계속되었다. 몽둥이찜질 사흘째가 되자 온통 피멍이 들었고, 그 위에 다시 매질을 해서 쓰리고 아프기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결국 매질 고문 닷새 만에 나는 항복했다. 다른 친구들이 썼다는 자술서를 거의 그대로 베꼈다. 그렇게 나는 ‘모택동주의자’가 되었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기억은 ‘실체적 사실’과 그들이 요구했던 “강요된 사실”이 뒤섞여 있는 상태다. 그럼에도 나는 당시 네 사람이 만났던 과정, 나눈 이야기 등 ‘실재적 진실’을 최대한 복원해 보고자 한다. 청우회 사건에 대해 이석태 변호사(법무법인 덕수)를 통해 ‘재심 재판’을 청구중인데, 마침 최근 당시의 공소장·진술조서·검찰조서 등을 다시 면밀히 살펴볼 기회가 있어서 큰 도움이 되었다.

고 이창홍은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 1년 선배이고, 정정봉은 경북고 1년 선배이자 문리대 사학과에 다녀 동숭동 대학 시절 알고는 지냈으나 별로 어울리지는 않았다. 문리대에서 등록금 분할납부 운동을 하다 제적된 이창홍은 건국대를 거쳐 70년대 초 <동아방송> 뉴스부 기자로 입사했다. 같은 동아일보사였지만 교류할 기회는 없었다. 그러다 73년 5월께 그는 민주화운동에 투신하겠다면서 회사를 떠났다. 나는 “운동을 위해서 직장까지 버리다니” 하는 마음에 이부영과 함께 회사 옆 중국집 ‘복취루’에서 ‘배갈’로 환송회를 해줬다. 그 뒤 74년 3월 하순께 13명이 해직된 ‘동아일보사 노조 결성’ 사태로 회사에 나가지 못하고 있는데, 이부영이 “이창홍이 우리를 위로하겠다며 집으로 초대했다”고 해서 함께 갔다. 정정봉도 와 있어 네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만났다.

이창홍은 그 자리에서 “곧 학생운동이 전국적 데모를 일으킬 것이며, 나는 이제 막 시작된 청년운동과 재야운동을 연결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 얘기가 한달 뒤 터진 ‘민청학련 사건’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그는 “두 사람(이부영과 나)에게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서로 식구끼리도 알고 지내자”고 제안했다. 그리하여 우리집, 정정봉·이부영의 집을 돌며 만남을 이어갔다. 그러던 어느 날 이부영이 “이창홍이 ‘긴조 4호’로 수배중인데 용돈도 필요하고 상황도 알고 싶다니 야유회 겸 한번 만나자”고 해서 공릉천에서 함께 놀며 용돈도 좀 챙겨주었다. 그러기를 또 한차례, 이창홍이 “아예 친목회를 만들자”고 제안했고, 우리는 그의 민주화운동에 동참한다는 뜻에서 동의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그런데 74년 9월 중순께 정정봉의 집에서 모였을 때 이창홍이 ‘청우회의 강령과 규약’이라는 문건을 들고 왔다. 거기엔 “모택동식 인민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목표로 한다”는 대목이 들어 있었다. 대충 훑어본 우리는 대경실색했다. 그래서 내가 정색하고 말했다. “이 선배가 친목회나 하자 해서 내키지도 않지만 동의했는데, 언제 우리가 사회주의에 합의했는가? 선배는 지금 수배중이라면서 이런 문건을 들고 다니면 어떻게 되는가? 친목 모임도 취소다.” 다른 두 친구도 동의했고, 내 부탁으로 정정봉이 그날 밤 문제의 문건을 불태워버렸다.

그런데 그렇게 없애버린 ‘강령과 규약’을 중정에서 더 자세하게 제시하고 있으니 어찌된 일일까? 심지어 중정은 이창홍이 정신분열증에 걸렸다며 ‘청우회 사건’에 공소조차 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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