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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동아투위 결성해 회사앞 6개월 침묵시위 / 이룰태림

등록 2014-03-19 19:13수정 2018-05-10 13:25

19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언론인 160여명은 인근 신문회관에 다시 집결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로 전환해 복직 투쟁을 하기로 결의했다. 사진은 3월18일 신문회관에서 열린 ‘동아투위’ 결성식에서 권영자(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초대 위원장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모습. <동아투위 민주화운동 25년> 중에서
1975년 3월17일 새벽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언론인 160여명은 인근 신문회관에 다시 집결해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로 전환해 복직 투쟁을 하기로 결의했다. 사진은 3월18일 신문회관에서 열린 ‘동아투위’ 결성식에서 권영자(당시 <동아일보> 문화부 차장) 초대 위원장이 성명서를 발표하는 모습. <동아투위 민주화운동 25년> 중에서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5)
1975년 3월17일 새벽 3시 동아일보사에서 거리로 쫓겨난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들은 오전 9시께 신문회관(현 프레스센터) 1층 로비에 모였다. 우리는 기협 동아일보분회 안종필 임시 분회장의 낭독으로 ‘폭력에 몰려 동아일보사를 떠나며’라는 성명을 발표하고 해산했다. 이어 3월18일 오전 다시 모여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동아투위)를 결성했다. 초대 위원장에는 권영자 문화부 차장이 선임되었다. 초기 가입 위원은 모두 138명이었다.

동아투위는 인근 세종여관을 다시 사무실로 빌린 뒤 “해임자 복직, 관선 주필 이동욱과 방송국장 이동수의 퇴진, 김상만 사장의 사죄”를 요구하면서 3월18일부터 9월17일까지 6개월 동안 토·일 주말만 빼고 매일 오전 8시 반부터 9시 반까지 동아일보사 정문(현 일민미술관) 앞에서 1시간 동안 침묵집회로 항의를 했다. 오후에는 담당 분야와 지역을 분담해 매일 발행하는 <동아투위 소식지>를 학생과 시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동아일보사는 3월27일 송건호 편집국장의 사표를 수리하고, 부차장급 7명 등 12명을 추가 해임했다. 한동안 쫓아낸 사원들에게 출근을 종용하던 회사는 이들이 “우리들은 무더기 해임 조치가 철회될 때까지 출근할 수 없다”며 버티자, 4월11일 82명에게 무기정직 처분을 내렸다. 이후 무기정직자 가운데 20명이 회사로 복귀했지만, 동아투위 위원 113명은 끝내 해직 언론인 신분을 감수했다. 참으로 의리에 죽고 사는 고지식한 인물들이었다.

동아투위는 목요기도회를 통해 큰 위로와 용기를 얻었다. 73년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을 계기로 이해동·김상근·조승혁·오충일 목사 등이 그해 여름 시작했던 목요기도회는 74년 4월 ‘민청학련 사건’이 터지면서 부활했다. 동아투위는 매주 목요일 오전 10시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광화문 동아일보사 사옥에서 종로5가 기독교회관으로 줄지어 걸어가면서 침묵시위를 했다.

개신교와 천주교계 모두 동아투위의 싸움에 경제적 정신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그중에서도 고 김관석 목사의 동아투위에 대한 걱정과 격려는 잊을 수 없다. “우리가 동아일보사에서 쫓겨난 3월17일 오후 김 목사를 찾아갔더니, ‘이제부터가 본격적인 투쟁의 시작입니다’라며 20만원짜리 수표 한 장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고, 나는 그 거금을 집행부에 전달했다. 그 돈은 사무실을 마련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1975>, ‘미국 이민 32년 내내 그리운 얼굴들’, 서권석)

고 김수환 추기경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의 도움도 컸다. 6월 말께 천주교는 명동성당 마당에서 ‘동아투위 돕기 바자회’도 마련해 주었다.

무엇보다 우리를 감동시킨 것은 이화여대생들이었다. 3월17일 4000여명의 이름으로 동아투위 지지 서명을 가장 먼저 발표했다. 돕기 운동에 앞장선 학생 정강자는 “새벽에 끌려 나와 기독교회관에서 농성하는 동아투위 아저씨들-그때 우리에겐 아저씨였다-을 위문하러 갔을 때 퀼트 이불 같은 것을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너무 처연했다. 각 서클이 나서서 동아투위 돕기 운동을 했다. 우리도 도봉산에 가서 ‘동아커피’를 팔았다”고 회고했다. 또 총학생회장 김매자 주도로 동양화의 한 장면, <논어>의 글 한 편, 윤동주의 ‘서시’를 새겨 넣은 3가지 손수건을 만들어 신촌캠퍼스와 동대문의 의대캠퍼스에서 300원에 팔아 성금을 모아 왔다.(<70년대 캠퍼스 1>, 신동호, 환경재단 도요새, 2007년)

박정희 정권은 ‘동아투위 돕기’를 온갖 방법으로 막았다. 서울시경은 75년 4월3일 선교자금 횡령·배임 혐의로 김관석·박형규·권호경·조승혁 목사 등을 구속했다. “서독 기독교단체에서 보낸 선교자금 중 일부를 ‘민청학련 사건’ 변호사비와 영치금 또는 ‘동아투위 생활비 돕기’ 등으로 사용했다”는 이유였다. 정작 자금을 지원해준 단체에서는 문제없다고 증언했지만, 재판부는 네 목사에게 6~10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천주교도 75년 6월 이른바 ‘명동성당 학생회 사건’으로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경찰은 ‘동아투위 돕기 손수건 팔기’에 나선 이대생들도 괴롭혔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75년 6월24일, 발족 100일째 되는 날 동아투위는 미국의 (안노 도미니의 약자) 잡지로부터 ‘러브조이 자유언론상’을 받았다. 시상식을 마치고 신문회관에서 나오는데 서대문경찰서 형사 2명이 나와 이태호를 연행해 갔다. 이대생들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동아투위 유인물’이 발견됐고, 우리가 배후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무려 15일간 영장도 없이 구금됐던 우리는 풀려났으나, 김매자와 김경애는 ‘긴급조치 9호’ 위반 혐의로 구속되고 말았다.”(<1975>, ‘역천의 세월,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가’, 이영록)

결국 동아투위는 6개월 만에 침묵시위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당장 가족들을 굶어 죽지 않게 하기 위해 새로운 생활전선에 뛰어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마저 공안당국의 방해로 여의치 않았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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