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의 파장이 확산되자 박정희 정권은 12월들어 동아일보사에 대한 광고 탄압을 감행했다. 사진은 11월27일 야당인 신민당과 재야세력이 연대해 유신헌법 개정운동에 나선 ‘민주회복 국민회의’의 ‘국민선언대회’ 소식을 1면 머리기사로 보도한 <동아일보> 1면.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1)
박정희 정권은 1974년 10월 동아일보사의 자유언론실천운동을 저지하지 못한다면 ‘유신체제’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정치적 본능으로 감지한 것 같았다. 자유언론실천운동은 그 자체로 커다란 사회적 쟁점이 되었다. 기독교교회협의회 인권위원회,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인권위원회,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 등이 잇따라 ‘선언’을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또 동아일보사의 젊은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들은 다른 언론사가 소홀히 다루는 대학가의 시위 현장, 종교계의 인권기도회, 노동운동 현장 등을 샅샅이 누비며 유신체제가 일으켜온 인권 탄압과 생존권 위협 실태를 집중적으로 보도했다. 공안 담당자들은 “당신들, 너무 앞서다가 혼난다”고 협박하기 일쑤였다. 그럼에도 앞서 얘기한, 그해 11월12일의 제작거부 투쟁 이후부터는 야당과 재야의 민주화운동도 비중있게 다루기 시작했다.
<동아일보>는 11월14일의 김영삼 신민당 총재 기자회견을 1면 머리기사로 올렸다. 김 총재는 “개헌추진 원외투쟁”을 전개하겠다면서, 개헌의 방향으로 ‘삼권 위에 군림하는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을 제거한다. 대통령 선거는 직선제로 하고 임기는 4년으로 하되, 1차에 한해서 중임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제시했다.
11월27일에는 각계 중진·원로들이 망라된 71인이 ‘민주회복 국민선언’을 발표했는데, 동아일보는 이 뉴스도 사진을 곁들여 1면 톱으로 보도했다. “현행 헌법은 최단시일 내에 합리적 절차를 거쳐 민주헌법으로 대체돼야 한다”, “반정부는 반국가가 아니다. 우리는 반정부 행동으로 말미암아 복역·구속·연금 등을 당하고 있는 모든 인사들을 사면·석방하고, 그들의 정치적 권리를 회복시키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할 것을 요구한다”는 선언문 내용을 자세히 전했다. 서명자 71명 전원의 명단도 실었다. ‘윤보선 공덕귀 백낙준 이인 김홍일 유진오 정일형 이우정 윤제술 김영삼 고흥문 양일동 김철 김정례 정화암 김재호 안재환 유석현 진헌식 송진백 황호현 윤형중 함세웅 신현봉 김택암 안충석 양홍 이창복 박상래 김재준 함석헌 강신명 강원용 김관석 윤반웅 조향록 이상린 박창균 강기철 계훈제 법정 이희승 정석해 이동화 전경연 박봉간 서남동 문동환 안병무 이헌구 김정한 박연희 김규동 백낙청 고은 김윤수 홍사중 천관우 이영희 장용학 김용구 부완혁 임재경 홍성우 황인철 한승헌 임광규 안필수.’
12월25일에는 ‘민주회복국민회의’ 창립총회 소식도 사진을 곁들여 1면 머리로 보도하고, ‘국민회의’가 상설 사무처를 두고 전국적으로 지방조직까지 확대해 나갈 것이라고 전했다. 그해 1월 장준하·백기완의 개헌청원 서명운동 때 ‘개헌의 개’ 자만 꺼내도 군사법정에 회부했던 박 정권으로서는, 그 뒤 11개월 만에 ‘개헌 요구’가 동아일보 1면을 장식하는데도 속수무책이었으니 ‘위기’를 절감했으리라.
근대 민주주의의 발상지였던 영국에서 19세기 중엽 발간된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은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사회의 힘없고 약한 수많은 구성원들은 탐욕스런 큰 독수리들의 먹이가 되지 않기 위해서, 그 독수리들을 다스리도록 위임받은 한층 뛰어나고 강한 맹금의 존재가 필요했다. 그러나 이 독수리의 왕도 다른 욕심쟁이 독수리들과 마찬가지로 작은 날짐승들의 무리를 잡아먹는 습성이 있었기 때문에, 그 주둥이나 발톱에 대해서 끊임없이 방위태세를 갖추는 것이 꼭 필요했다. 그래서 나라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목적으로 한 것은, 지배자가 사회에 대해서 행사할 수 있는 권력에 제한을 상정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 제한이야말로 바로 자유의 본질이라고 그들은 생각했던 것이다.”
74년 가을 한국에서도 유신체제의 무한권력에 대한 제한의 움직임이 활성화되기 시작하고 그 민주화의 목소리가 동아일보와 동아방송을 통해 온 국민에게 공공연하게 전파되고 있었다. 박 정권은, 세계의 눈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백명의 언론인을 모조리 감옥에 가둘 수도 없었고, 동아일보사를 범법자로 몰아 문을 닫게 할 수도 없었다. 남은 길은 사주와 경영진을 협박하고 회유하는 길밖에 없었다.
박 정권은 74년 12월 하순 학생들이 겨울방학에 들어가자 드디어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 탄압’의 칼을 빼들었다. 그 시작은 12월16일 한 기업 홍보담당 간부가 신문사로 찾아와 “이유를 묻지 말아 달라”며 광고 동판을 회수해 가면서부터였다. 12월20일에는 장기계약을 맺고 여러 해 동안 광고를 해오던 한일약품이 “사장님 지시”라며 동판을 찾아가더니 대한생명보험, 기아산업 등등이 뒤를 이었다. 1년 중 가장 광고가 몰리는 12월24일에도 롯데그룹, 오리엔트시계, 미도파백화점, 일동제약, 종근당, 한국바이엘, 태평양화학 등 대광고주들이 광고계약을 취소했다. 12월25일부터는 연말 대목을 노려야 할 극장의 영화 광고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 12월26일 대한비타민과 현대자동차 광고까지 대광고주 20여곳이 떨어져 나갔고, 광고란을 기사로 채울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광고 해약 사태는 동아방송, <신동아>, <여성동아>로 확대되었다.(<동아 자유언론실천운동 백서>, 동아일보사노조, 1989년)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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