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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저항적 문인들 ‘자실’ 띄우다 / 이룰태림

등록 2014-03-12 19:34수정 2018-05-10 13:23

1974년 11월18일 유신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문인들을 중심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됐다. 사진은 당시 문인협회가 들어 있던 의사회관 로비에서 결성식에 이어 ‘101인 선언’을 발표한 뒤 거리시위를 시도하려던 문인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11월18일 유신독재체제에 저항하는 문인들을 중심으로 ‘자유실천문인협의회’가 결성됐다. 사진은 당시 문인협회가 들어 있던 의사회관 로비에서 결성식에 이어 ‘101인 선언’을 발표한 뒤 거리시위를 시도하려던 문인들이 경찰의 제지를 받는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50)
박정희 군사독재와 유신체제를 언론분야에서 바라보면, 비판적 언론인, 저항적 언론인들의 펜과 마이크를 뺏고, 독재에 고분고분한 언론인과 언론사만 용납하며, 지지·찬양하는 언론인과 언론사에는 특혜를 주는 ‘당근과 채찍 정책’을 폈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정책은 문인들과 잡지·출판사에도 고스란히 적용됐다.

일찍이 박정희 정권은 1965년 7월7일 문인들이 한일협정에 반대하는 성명을 내자 이틀 뒤 소설 <분지>의 작가 남정현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남정현은 2년이나 끈 재판에서 “유죄는 인정되나 선고는 유예한다”는 판결을 받았다. 저항시인 김지하와 <사상계>, <씨알의 소리>, <다리>에 대한 탄압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했다.

작가 황석영의 회고를 보면, “(문인들이 그들의 펜과 활동 광장을 거의 대부분 빼앗긴) 72년 무렵부터 이호철·박태순·염무웅·이문구·황석영 등이 ‘문인공제회’ 준비모임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펜클럽 한국본부는 73년 11월16일 열린 정기총회에서 김병걸 교수 등 31명이 제안한 ‘표현의 자유에 관한 긴급동의안’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우리는 국제펜헌장에 입각하여 언론·출판 등 표현의 자유를 적극 수호하고 실천할 것을 다짐한다. 표현의 자유는 창작이나 출판의 자유는 물론 펜헌장 ‘제4항’에 명시된 대로 ‘정부나 기타 행정기관에 대한 비판의 자유’도 불가결의 요소이며 그것이 어떤 정당을 위해 왜곡되거나 제한하지 말 것을 확인한다. 우리는 복역중인 김지하 시인의 조속한 석방을 촉구한다.”

또 이희승·이헌구·김광섭·이호철·백낙청·임헌영·염무웅·박태순·이문구·김지하·황석영·이시영 등 문인들은 74년 1월초 장준하·백기완 선생의 개헌청원 100만명 서명운동에 호응해 ‘문인 61인 개헌지지 선언’을 발표하고 동참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 61명은 전원 중앙정보부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아야 했다. 이어 2월에는 이른바 ‘문인 간첩단 사건’으로 김우종·정을병·장병휘·이호철·임헌영 등 5명을 반공법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이들이 일본에서 발행되는 한국어잡지 <한양>에 한국을 비방하는 글을 발표했다는 게 이유였다. 중정은 그 잡지사 간부들을 “북괴 지도원”으로 몰았다.

이에 관변 문인단체에 맞설 조직을 만들기로 뜻을 모은 저항적 문인들은 74년 11월18일 저녁 ‘자유실천문인협의회’(자실)를 결성했다. 창립 대표간사는 고은이었고, 공동간사는 신경림·염무웅·박태순·황석영·조해일 등이 맡았다. 당시 문인협회가 들어 있던 의사빌딩(현 교보빌딩 자리) 로비에서 “김지하 시인 석방하라”, “우리는 멈추지 않는다”라는 펼침막을 내걸고 ‘문학인 101인 선언’도 발표했다.

문인들은 이 선언에서 “왜곡된 근대화정책의 무리한 강행으로 권력과 금력에서 소외된 대다수 국민들은 기초적 생존마저 안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신앙·사상의 자유는 어떠한 이유로도 제한할 수 없으며, 지식인은 이 자유의 수호에 앞장서야 한다”고 천명하고, 김지하를 비롯해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종교인·학생들의 즉각 석방을 요구했다. 또 자유민주주의 정신과 절차에 따라 새로운 헌법이 마련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황석영은 이 집회의 경과에 대해 “윤흥길·송기원·조해일·이시영 등등이 현관 앞에서 펼침막을 잡고 있었을 것이며, 고은 대표간사와 이문구 등은 로비의 안쪽 중앙에, 그리고 성명서 낭독을 맡은 나는 염무웅·한남철과 함께 계단 위에 서 있었다. 위치로 보면 거기가 단상이었던 셈이다. 미리 연락을 받은 기자들이 현관 안팎에 모여들었다. 내가 성명서 낭독을 마치면 문인들은 펼침막을 앞세우고 거리로 나갈 참이었다. 낭독이 끝나자마자 기자들에게 선언서를 나누어주는 찰나 사복들이 우르르 밀려들어와 문인들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문을 밀고 나가는 문인들도 있었지만 미리 대기하고 있던 기동대가 그들을 덮쳤다. 한남철이 내 뒷덜미를 잡아당겼고 염무웅과 함께 나는 자연스럽게 2층의 문인협회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들이 닭장차에 실려 광화문광장을 떠나는 모양을 내려다보았다. 10여명이 종로경찰서로 연행당했는데, 고은·박태순·조태일·윤흥길·이시영·송기원 등이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자실’의 결성에 대해 송기원은 또 다음과 같이 회고하고 있다. “원래 나는 문제의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었다. 오히려 퇴폐주의자였다. 그런데 74년 2월 문인 간첩단 사건이 터졌다. 이호철 선생은 서라벌예대(중앙대와 합병)에서 강의한 적이 있어 잘 알았는데, 그를 간첩으로 몰았다. 11월에는 문인들이 광화문에서 시위를 했다. 문학인 ‘101인 선언’ 사건이다. 여기에 참여하면서 시국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나쁜 놈들이구나’ 하고(…)”(<70년대 캠퍼스 1> 신동호, 환경재단 도요새, 2007)

동아일보사 기자·프로듀서·아나운서 등이 제작거부와 함께 농성을 하고 있는 가운데 동아일보사가 기자들을 단계적으로 해고하고 있던 75년 3월14일 ‘자실’은 동아일보사·조선일보사의 기자 해고 사태와 <기협회보>에 대한 폐간 조치, 김지하의 재구속 등에 항의하면서 ‘최근의 사태에 대한 문학인 165인 선언’을 발표했다.

‘자실’은 이후 70~80년대 ‘동아투위’, ‘조선투위’와 함께 지식인 민주화운동의 삼두마차를 이뤘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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