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계기로 <동아방송>에서도 ‘자유언론실행위원회’를 구성해 공정보도 투쟁을 본격화했다. 사진은 박정희 정권의 첫 방송탄압 사례로, 64년 ‘6·3 계엄령’ 때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부추겼다는 이유로 6명의 동아방송 언론인이 구속된 ‘앵무새 사건’을 보도한 <동아일보> 64년 7월 29일치.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9)
1974년 당시 <동아방송> 차장이었던 윤활식 전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장(<한겨레> 주식관리실장 지냄)은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을 했을 때를 이렇게 회고한다. “방송사의 한 간부는 ‘일제강점기 때 동아일보가 살아남은 과정을 생각해봐라. 움츠려야 할 때는 움츠리고, 기회가 오면 다시 기를 살리고, 그렇게 생존해온 것 아니냐’고 말했고, 또 어떤 간부는 ‘방송이 어떻게 언론이냐’는 억지소리를 했다.”(<1975>, 윤활식 장윤환 공저, 인카운터, 2013)
동아방송은 63년 출범 때 방송의 골격을 ‘살아있는 뉴스와 민주화 의식의 함양을 돕는 다큐멘터리와 수준 높은 음악’으로 내세웠다. 덕분에 중부지역에서만 시청이 가능한 지역 라디오 방송임에도 개국 초기부터 청취율 1위를 달렸다. 출범 초, 한국 현대사를 조명한 다큐 <여명 80년>이 유명했고, 최동욱 피디의 <탑튠 쇼> 같은 음악프로는 젊은이들을 사로잡았다.
박정희 정권은 개국 초부터 동아방송을 주목했다. 64년 ‘6·3 계엄령’ 때는 개국 1년밖에 안 된 동아방송의 편성간부 6명을 ‘앵무새 사건’으로 군법회의에 회부했다. ‘앵무새’는 밤 9시45분에 방송한 5분 시사고발 프로그램인데, 한일회담을 비판한 내용을 문제 삼은 것이다. 6월4일 최창봉 방송부장, 조동화 방송과장, 이윤하 편성과장, 고재언 뉴스실장, 이종구 외신부장, 김영효 담당 피디 등이 구속되었다. 이들은 해가 넘어가기 전에 모두 석방되긴 했지만, 69년 12월29일 고등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을 때까지 5년6개월이나 걸렸다.
당시 동아방송 피디였던 허육 동아투위 위원은 “72년 10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헌법안 국민투표’ 발표 직후, 유신의 당위성을 홍보하는 좌담 프로그램이 긴급 편성되었다. 좌담회에 출연할 인사들의 명단과 전화번호가 어디선가에서 내려왔다. <조선일보> 논설위원이 사회를 보고 대학교수 서너명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교수가 설마 이런 어용 프로에 나올까 하고 섭외를 했더니. ‘아 알아요, 나가죠’ 했다”는 일화도 기억한다.(<1975>, 2013)
중앙정보부는 모든 방송국에 출연금지자 명단도 보냈다. 애초 동아방송에 통보된 명단에는 윤보선·함석헌·장준하·김재준·강원용·이병린·이우정·김동길 등이 들어 있었다. 명단은 점점 늘어났다. 유신정권은 풍자·역사극·코미디 프로조차 감시·간섭했다. 피디들은 약간이라도 비판적인 프로를 만들 때는 지뢰밭을 건너는 심정이었다.
74년 무렵 동아방송에서는 64~68년에 입사한 5~8년차 피디들인 고 조민기·김창수·윤성옥·송재원·박노성 등이 죽정회(쭉정이들의 모임이라는 뜻)를 결성하고 제작권의 자유를 위해 고민하고 있었다. 이들은 ‘10·24 선언’ 때 적극 동참했다. 이를 계기로 동아방송에서도 ‘언론자유의 혼’이 아연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예컨대 출연금지 인사들을 인터뷰하고, 인혁당 사건 가족들의 호소를 녹음해 방송하고, 허황한 정부정책을 보도·해설한 직후 당시 유행하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라는 노래를 내보내는 식이었다.
결국 ‘거짓말이야’는 금지곡이 되었고, 김추자는 박정희 정권이 청년문화 탄압을 위해 75년 봄 일으킨 ‘대마초 사건’으로 27명을 구속시킬 때 이장희·윤형주·신중현 등과 함께 활동을 금지당했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 기도회 보도 문제로 <동아일보> 기자들이 제작거부 투쟁을 벌였던 74년 11월12일에는 한국 방송사에서 전파를 통해 집단적 저항운동을 벌인 최초의 사건이 일어났다.
동아방송 뉴스부 기자들과 아나운서·피디 등은 이날 낮 12시 뉴스 시간에 “지금 현재 동아방송 및 동아일보 기자 180여명은 어젯밤 명동성당에서 열린 인권회복 기도회가 보도되지 않는 한 방송 뉴스와 신문을 제작하지 않기로 결의했습니다”라는 성명서를 낭독하고, 뉴스 대신 음악을 내보냈다. 일선 언론인들의 언론자유 운동의 실상이 라디오를 통해 국민에게 직접 전해진 순간이었다.
75년 1월7일 동아일보에 대한 광고해약 사태가 방송에까지 번지자 피디·아나운서는 물론 엔지니어와 업무사원들까지 동참해 ‘동아방송 자유언론 실행 총회’를 열었다. “우리는 앞으로 동아방송과 동아일보에 대한 외부 세력의 어떤 탄압에도 굴하지 않을 것이며, 탄압 사실을 국민에게 알리겠다”는 결의와 함께 ‘동아방송 자유언론실행위원회’가 결성됐다. 실행위원장에는 이규만 피디, 위원에는 이문양·고준환·송준오·신태성·김태진·박노성·김창수·김덕렴·김기경·김영소·김창성·송재원·이강우·김영환 등이 뽑혔다.
‘동아방송 실행위’에서 발행한 회보 <스팟트> 75년 1월15일치 ‘제1호’에는 “오늘 오전 방송된 ‘뉴스쇼’의 어제 대통령 기자회견에 관한 보도가 개헌 반대에 치우친 거 같은 느낌을 받았는데, 매우 큰 유감을 표합니다”라고 지적해 놓았다. 이어 1월30일치 ‘제2호’에서는 “‘정계야화’ 재방송이 신설된 지 2주 만에 분명한 이유 없이 폐지되었다. 일요일 밤 9시의 본방송보다 청취율이 더 높은 재방송을 폐지한 것은 편성의 자주성과 제작의 독립성을 정면으로 거부하는 것”이라고 비판했다. 하지만 이동수 당시 라디오국장은 “어떠한 경우에도 재방송 폐지 철회는 없다”고 말했다.(<너마저 배신하면 이민갈 거야!>, 성유보 외 6인 지음, 월간말, 2002)
‘정계야화’는 이승만·여운형·신익희·조병옥 등 당대 정치 거물들의 생녹음을 곁들인 일종의 다큐 프로로 인기가 높았다. 담당 고 이병주 피디는 훗날 동아투위 위원장과 <한겨레> 창간 발기인·이사 등을 지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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