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 이후 기자협회동아일보분회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해 날마다 기사와 지면을 통해 실천운동에 나섰다. 사진은 제작거부 투쟁 끝에 하루 늦은 11월13일치에 실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인권회복을 위한 기도회’ 사진과 기사.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8)
1974년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은 참으로 한국 언론자유운동 사상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이날 <동아일보> 편집국에서 벌어진 선언대회에는 <아사히신문>의 정호상 기자, <에이피>(AP) 통신의 홍건표 기자 등 외신들이 취재에 나서, 언론사와 기자들이 거꾸로 취재 대상이 되는 기이한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
자유언론실천선언은 당시 한국 언론계 전체에 영향을 주었다. 이후 며칠 동안 <경향신문>, <서울신문>, <신아일보>, <중앙 매스컴>, <동양통신>, <합동통신>, <산업통신>, <시사통신>, <한국방송>(KBS), <문화방송>(MBC), <국제신보>, <부산일보>, <경기신문>, <강원일보>, <충청일보>, <충남일보>, <전북일보>, <전남매일>, <전남일보>, <대구매일신문>, <영남일보>, <경남일보>, <전주문화방송>, <춘천문화방송> <대구한국방송>, <내외경제신문>, <경남매일> 등 전국 31개 신문·방송·통신사 기자들이 일제히 언론자유수호선언에 나섰다.(<자유언론>(1975~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 중에서)
김병익 회장이 이끄는 기자협회는 10월25일 “언론자유수호운동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히고, ‘언론자유 침해에 대한 특별대책위원회’를 설치했다.
그러나 기자들의 이런 결의에도 불구하고 언론자유의 기상은 쉽사리 불타오르지 못했다. 61년 5·16 군사쿠데타 이후 74년까지 13년간 군사독재에 길들여진 언론은 ‘국민을 위한 제4부’가 아니라, 정부조직법 바깥에 존재하는 ‘정치권력의 제4부’, 정권의 ‘외곽 홍보 선전기관으로서의 제4부’ 노릇을 쉽게 뿌리치지 못했다. 기관원들이 언론사 출입을 조심하는 것은 분명했다. 그러나 ‘협조 요청’이라는 행위를 꼭 만나서만 하는가? 전화도 있고, ‘전인’(傳人)도 있기 마련이다.
10월26일 기협 동아일보분회는 ‘자유언론실천선언 특별위원회’를 구성하고 이계익(조사부) 기자가 상임위 간사를 맡았다. 특위 위원으로는 안성열(기획부), 김욱한, 송경선(펀집부), 강성재, 이경재, 박순철, 이종대(정치부), 성영소, 이종욱(경제부), 김일수, 심송무(외신부), 전만길, 정연주(사회부), 이광석, 심재택(지방부) 김대은(체육부), 서권석(문화부), 조학래(과학부), 조천용, 윤석봉, 김창선, 김순경(사진부), 신해명, 문연상, 이충남(교열부), 김영일, 김언호, 김동현(신동아부), 김양래(여성동아부), 황명걸, 양한수(출판부), 강운구(출판사진부), 문영희, 김민남(방송국 정경부), 김종철, 이성주(방송국 사회문화부), 김유주(방송국 보도제작부) 등 모두 40명이 활동했다.
실천특위는 매일 오후 6시 편집국 조사부에 모여서 신문과 방송 뉴스를 분석·평가하고 대책을 논의해 <알림>이라는 분회보를 통해 공유했다. 물론 1차적 장애는 일부 간부들의 기회주의적 태도였다. 김진현 <동아방송> 뉴스제작 담당 부국장이 대표적이었다. 그는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들은 거의 한 차례만, 청취율 낮은 시간대를 골라 짧게, 어떤 때는 단 한 줄로 내보내는 횡포를 저질렀다. 실천특위의 요청에 따라 10월30일 아침 기자들이 집단적으로 항의하자 중간 간부들은 “우리의 고충을 알아달라”는 변명만 늘어놓았다.
기협 분회와 실천특위는 11월 들어 군사독재에 의해 훼손되어온 시사용어들을 바로잡는 운동도 전개했다. 74년 11월6일부터 발간된 <알림>에는 “학생 데모를 ‘학원사태’로, 공공요금 인상을 ‘공공요금 현실화’로, 임금동결을 ‘임금안정’으로, 담화를 ‘훈시’로, 중앙정보부와 국군보안사를 통칭 ‘모 기관’으로, 부정부패를 ‘사회 부조리’로, 예방을 ‘접견’으로, 불하를 ‘민영화’로, 세법 개정을 ‘세제 개혁’으로 왜곡해온 용어들을 바로잡을 것을 요구하는 내용을 담았다. 또 ‘1단 벽 깨기 운동’으로 거의 대부분 1단 취급되는 민주화운동 관련 기사를 뉴스 비중에 따라 편집하도록 요구했다.
‘민청학련 사건’으로 융단폭격을 받은 학생운동은 ‘동아 10·24 선언’ 이전인 9월부터 다시 일어서고 있었다. 이화여대생 4000명이 9월23~24일 교내집회를 열자 공안당국은 총학생회장 이영화를 비롯해 김선숙·정강자·정선자·정인숙(선교부장) 등을 곧바로 연행했다. 10월10~11일 이틀간 고려대생 2000명은 데모를 시도해 1주일간 임시휴교령을 받았다. 10월 말까지 동국대·건국대·중앙대·조선대·부산대·성심여대·경북대·경희대·서울대농대·성균관대·연세대·광주일고 등에서 집회와 시위가 계속되었다. ‘1단 벽 깨기 운동’으로 동아일보는 이들 학생 시위를 비중있게 보도할 수 있었다. 이후 겨울방학 때까지 학생운동의 빈도와 참여 학생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회사 쪽과 갈등도 계속됐다. 실천특위는 11월6일치 7면에 보도된 ‘와이더블유시에이(YWCA) 수감자를 위한 기도회’ 기사가 전국 15개 시도에서 열린 대회인데도 고작 1단으로 처리된 데 항의하고 “뉴스의 축소, 은폐, 왜곡은 전적으로 국장단에 책임이 있음”을 환기시켰다. 그럼에도 11월11일 전국 10개 교구에서 동시에 열린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 기도회를 사회면 2~3단 기사로 보도하려는 움직임에 기협 분회는 ‘사진 포함 1면 톱’이나 최소한 ‘사회면 톱’으로 다뤄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회사 쪽이 받아들이지 않아 제작거부에 들어갔고 결국 11월12일치 신문은 발행하지 못했다. 송건호 편집국장이 절충에 나서 사제단 기도회 기사를 11월13일치 사회면에 사진을 곁들여 ‘중간 톱’으로 합의한 뒤에야 신문은 다시 발행됐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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