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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12시간 제작거부…자유언론실천선언문 1면 실어 / 이룰태림

등록 2014-03-09 18:39수정 2018-05-10 13:22

1974년 10월24일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 소속 기자 200여명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반유신독재 투쟁에 나섰다. 사진은 이날 오전 9시 편집국에서 분회 총무 홍종민(오른쪽) 기자가 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왼쪽 사진) 기자들은 이날 12시간 제작거부 투쟁 끝에 <동아일보> 1면에 ‘선언’ 기사를 보도했고, 같은 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의 투쟁 소식도 실었다.(오른쪽 사진) <자유언론>(1975~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 중에서
1974년 10월24일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 소속 기자 200여명은 ‘자유언론실천선언’을 발표하고 반유신독재 투쟁에 나섰다. 사진은 이날 오전 9시 편집국에서 분회 총무 홍종민(오른쪽) 기자가 선언문을 낭독하는 모습.(왼쪽 사진) 기자들은 이날 12시간 제작거부 투쟁 끝에 <동아일보> 1면에 ‘선언’ 기사를 보도했고, 같은 날 <조선일보>와 <한국일보> 기자들의 투쟁 소식도 실었다.(오른쪽 사진) <자유언론>(1975~2005 동아투위 30년 발자취) 중에서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7)
“본질적으로 자유언론은 바로 우리 언론 종사자들 자신의 실천과제이지 당국에서 허용받거나 국민 대중이 찾아다 쥐여주는 것이 아니다. 따라서 우리는 자유언론에 역행하는 어떠한 압력에도 굴하지 않고 자유민주사회 존립의 기본 요건인 자유언론 실천에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을 선언하며 우리의 뜨거운 심장을 모아 다음과 같이 결의한다. (…) 1.신문·방송·잡지에 대한 어떠한 외부 간섭도 우리의 일치된 단결로 강력히 배제한다. 1.기관원의 출입을 엄격히 거부한다. 1.언론인의 불법 연행을 일절 거부한다. 만약 어떠한 명목으로라도 불법 연행이 자행될 경우 그가 귀사할 때까지 퇴근하지 않기로 한다.”

1974년 10월24일 오전 9시 고 홍종민 기자가 떨리는 목소리로 동아일보사 기자 200여명 앞에서 낭독한 ‘10·24 자유언론실천선언’이다.

이 선언문은 그냥 나온 것은 아니다. 박정희 정권은 그해 4월3일 ‘긴급조치 4호’를 통해 ‘언론사가 민청학련 사건을 독자적으로 취재·보도하면 긴급조치 위반으로 처벌한다’고 공표했다. 언론사와 언론인들은 졸지에 ‘필경사’, ‘속기사’로 전락할 처지였다. 박정희 대통령은 ‘8·15 광복절’ 기념식장에서 부인 육영수가 피살된 뒤 ‘긴급조치 1·4호’를 일단 해제했다. 하지만 기왕의 긴급조치 위반사건 관련자들에 대한 구금과 재판은 계속되었다. 또 공안기관들의 언론 간섭은 그칠 줄을 몰랐고, 주눅이 든 언론사 사주들과 간부들은 더욱 고분고분해졌다.

한국 현대사의 지형이 바뀌기 시작한 74년 여름, 한국 언론은 종교계 반유신 움직임이나 학생운동에 대해 거의 보도하지 않았다. 이에 동아일보사 노조는 본격적인 ‘언론자유 운동’을 전개하기로 하고, 중견급 기자를 지휘자로 세우기로 했다. 전국기자협회와 기자협회 동아일보분회를 개편할 필요성도 제기됐다.

공교롭게도 74년 9월 기자협회장 김인수 기자(<신아일보> 정치부)와 동아일보분회장 강인섭 기자(정치부)가 비슷한 시기에 자진사퇴를 했다. 김 회장은 내무부 대변인 내정 발표가 나면서 언론계의 비난 여론이 비등하는 바람에 두 자리 모두 내놓았고, 강 분회장은 동아일보 정출도 기자가 “엠바고를 깼다”는 이유로 상공부 기자단에서 제명된 사건에 잘못 대처했다는 비판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

노조는 이 기회에 제12대 기자협회장을 동아일보에서 내기로 하고 문화부의 김병익 기자에게 요청했다. 문화예술계에서 큰 신망을 받고 있었고 <문학과 지성> 동인으로도 참여하고 있던 김 기자는 이 제안을 흔쾌히 수락했다. 그런데 10월19일 단독 입후보한 김 기자가 협회장에 당선되자, 회사는 “사원의 대외 활동은 회사의 동의를 받아야 한다”며 무기정직이라는 어처구니없는 처분을 내렸다.

동아일보 분회장감으로 노조는 당시 문화부에서 영화·연극·음악·무용 등 공연예술을 담당하면서 “딴따라 기자”로 자처하던 장윤환 기자를 점찍었다. 많은 젊은 기자들은 그가 사실 가슴속에 뜨거운 열정을 지니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당시 문화부에서는 가입 자격이 없는 권도홍 부장만 빼고 권영자(차장)·장윤환·정자환·김병익·서권석(현재 미국 뉴저지 거주)·홍휘자·이길범·이부영 기자 등 전원이 노조에 가입해 있었다. 노조의 제의에 장 기자는 “선언만 하면 뭣하나? 실천에 나서야지!” 하며 후배들보다 오히려 더 강한 기백을 보여주었다.

10월21일의 분회장 선거에서 장 후보는 전체 회원 189명 중 152명이 투표한 가운데 ‘찬성 144표, 기권 7표, 무효 1표’로 압도적 지지를 받았다. 이어 10월22일 부분회장에 김명걸(사회부), 총무에 고 홍종민(편집부), 보도자유부장에 장성원(방송뉴스부), 복지부장에 황의방(여성동아부) 기자를 지명해 새 집행부를 구성했다.

장 분회장은 10월24일을 ‘자유언론실천선언’의 날로 잡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10월21·22일 <동아방송>의 ‘뉴스쇼’ 담당 박종길 부장이 학생 시위 보도와 관련해 두 차례나 중앙정보부의 조사를 받았고, 10월23일에는 1단 기사로 나간 서울대 농대생 300여명의 시위 보도를 이유로 동아일보의 송건호 편집국장, 박원근 사회부장, 한우석 지방부장 등 3명이 또 연행됐다. 기자들은 당연히 분기탱천했고 10월23일 밤 편집국에서 밤샘농성을 했다.

마침 10월24일은 ‘유엔의 날’로 공휴일이라 외근 기자들이 출입처로 나갈 일이 없었다. 그리하여 편집국·출판국 기자 대부분이 참석한 이날 ‘자유언론실천선언’ 대회장은 열기가 가득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나는 이날 대회장에서 “우리의 ‘자유언론실천선언’이 신문에 꼭 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째 이유는, 언론자유를 향한 동아일보사의 각오를 국민들에게 알림으로써 동아일보사가 쉽사리 언론의 자유를 배반할 수 없게 하자는 것이었다. 또다른 이유는 “기관원의 출입을 금지한다”는 우리의 결의를 통해 그들이 그동안 한국 언론의 실질적 편집국장·데스크·논설위원 노릇을 해왔다는 사실을 국민에게 알려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권력의 통제와 간섭을 막는 것만이 한국 언론이 진정한 ‘제4부’로서 거듭 태어나는 길임을 국민 모두가 알아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편집국 기자들은 이날 오전 10시부터 제작거부에 들어갔다. 동아일보사 젊은 기자들은 12시간의 제작거부 운동을 통해 자유언론실천선언 전문을 1면에 3단으로 실을 수 있었다. 평소 낮 12시 나오던 초판은 밤 10시에야 발행됐고, 그때부터 동아일보의 언론자유 운동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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