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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민청학련 조작사건 공범은 언론 / 이룰태림

등록 2014-03-05 19:25수정 2018-05-10 13:20

19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터뜨린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조작 사건이었다. 사진은 민청학련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철·강구철·유인태’에 대해 현상금 200만원을 내건 수배 전단(왼쪽)과 ‘여정남’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해 인혁당과 연계시켜 그려놓은 조직 체계도.(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1974년 4월 중앙정보부가 터뜨린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은 박정희 유신독재의 명분으로 이용하기 위해 만들어낸 정치적 조작 사건이었다. 사진은 민청학련 사건의 주범으로 지목된 ‘이철·강구철·유인태’에 대해 현상금 200만원을 내건 수배 전단(왼쪽)과 ‘여정남’을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해 인혁당과 연계시켜 그려놓은 조직 체계도.(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5)
1974년 4월4일 이른바 ‘민청학련’ 사건을 터뜨린 박정희 정권은 대대적인 검거에 나섰다. 이미 3월28일의 서강대 시위 때 서중석·최병두·이종구·김국주 등을 연행했고, 4월9일에는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의 이직형 총무, 안재웅·정상복 간사, 나상기 등 26명, 서울대 공대 학생회장 이종원 등 6명, 한양대 이우회·이상익, 전남대의 문덕희·이학영·윤한봉·박형선·김상윤 등이 줄줄이 연행되고 4월13일에는 수백명이 수배되었다. 경찰은 유인태·이철·강구철 등에 대해서는 현상금 200만원과 1계급 특진을 내걸었다. 수사당국은 최종적으로 모두 1024명을 연행해 203명을 구속시켰다.

4월25일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중간 수사발표’를 하자, 언론은 일제히 ‘민청학련’ 학생들이 “공산계 불법단체인 인민혁명당 조직과 재일 조총련의 조종을 받는 일본 공산당원 및 국내 좌파 혁신계 등의 사주를 받았다”고 받아적었다.

<동아일보>(편집국장 고재욱)는 5월27일치 1면 머리로 “학원 내 적화기지 구축 획책, 비상군법회의 검찰부 민청학련 54명 구속기소”라는 기사를 싣고 바로 뒤이어 “민청학련, 인혁당이 지원, 일 공산당과 제휴, 김지하 등 자금 지원”이라는 해설기사를, 4면과 5면을 털어 ‘민청학련 사건 공소장 요지’를 실었다. 검찰이 제공한 조직도표까지 실었다.

그러면 중정은 민청학련 사건을 어떻게 조작해냈는가? 앞서 말한 대로, 중정의 끄나풀 조직휘의 주선으로 이철을 인터뷰한 <주간현대>의 다치가와는 인터뷰 사례비로 7000엔을 주었다. 당시 동아일보사 기자인 내 월급이 약 7만원이었으니 요즈음 시세로 환산하면 한 50만원 정도나 될까? 중정은 이 사례비를 ‘혁명자금’으로 꾸몄다. 문제의 곽성문도 그렇다. 스스로 이철을 찾아와 “학생회장을 하고 싶다”고 했던 그가, 이철로부터 진짜로 공산주의 폭력혁명을 지시받았다면 왜 그 자리에서 거절하지 않고 뒤늦게 중정의 증인으로 나타났는가?

‘민청학련’의 배후로 지목된 인혁당 인사 7명은 또 어떤가? 64년의 ‘1차 인혁당 사건’ 때 재판받은 12명 중 2명만 ‘반공법 위반’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후 내내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사찰·감시했음에도 7명 중 누구도 ‘민청학련 학생들’과 접촉한 사례는 없었다. 다만 경북대 법정대 학생회장을 했던 여정남(64학번)이 72년부터 같은 대구 출신의 인연으로 이철·유인태와 간혹 어울린 정도였다. 중정도 처음에는 이철·유인태가 여정남에게 대구지역 시위를 지시한 것으로 사건을 꾸미려다가, 민청학련 상부 조직으로 ‘인혁당 재건위’를 그려 넣고자, “인혁당의 지령을 받은 여정남이 두 사람 등에게 공산폭력혁명을 교사·지령했다”고 줄거리를 바꾸었다.

그런데 수사과정에서 문제가 생겼다. 학생들이 ‘유신반대 전국대학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데 필요한 활동자금을 주로 윤보선 전 대통령과 지학순 주교 등 재야와 종교계 인사들로부터 지원받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윤 전 대통령의 돈은 고 이우정 선생을 거쳐 박형규 목사, 고 나병식을 통해 전달되었고, 지 주교의 지원금은 김지하를 통해 주었다. 학생들은 애초 박 목사와 김지하를 보호하기 위해, 안재웅의 결혼 축의금을 끌어다 쓴 것이라 둘러대었다. 하지만 중정이 사건을 자꾸만 인혁당과 결부시켜 “공산폭력혁명 기도”로 몰고 가자 하는 수 없이 털어놓았던 것이다. 윤 전 대통령과 지 주교를 공산주의자로 몰 수는 없으리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박 정권은 그 상식조차 배반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박 정권은 ‘민청학련’ 사건에 대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인혁당이라는 비밀지하당과, 또 다른 통로로 북한의 지령을 받아 움직이는 일본 공산당 계열과 조총련계가 ‘공산폭력혁명’을 사주하고, 이를 위한 거사 자금은 한국의 전직 대통령·개신교·천주교 쪽에서 대고, 또 이 폭력혁명을 시민민주주의자 김동길·김찬국 교수가 촉구·선동하고, 개신교의 많은 젊은 교역자들이 함께했다”는 누더기 공소장을 발표했다.

이 해괴한 공소장으로 인해 수백명이 고문을 당하고, 기소자 수십명이 합계 1800여년의 천문학적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며, 인혁당의 서도원·도예종·하재완·송상진·이수병·우홍선·김용원 등 7명과 여정남은 하나뿐인 목숨을 사실상 재판도 없이 잃어야 했다.

‘민청학련 조작 사건’ 당시 한국 언론은 명백한 공범자였다. 언론은 중정이나 군검찰, 군사법정, 포괄적으로는 박정희 정권의 총체적 공안몰이에 대해 아무런 의문도 제기하지 않은 채 그들의 발표문을 도배함으로써 국민들로 하여금 그 발표를 사실로 오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지금껏 왜 언론의 책임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제기가 없는 것일까?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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