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4년 4월 박정희 정권은 대학가의 반유신 시위를 억누르고자 ‘긴급조치 4호’를 발동해 ‘민청학련 사건’과 ‘인혁당 사건’을 조작해 터뜨렸다. 사진은 중앙정보부 발표문대로 대서특필한 4월4일치 <동아일보> 1면(왼쪽)과 민청학련과 북한을 연계시켜 그려놓은 ‘4·3 폭력혁명 과정 도시’(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4)
‘동아일보사 노조’가 승인 투쟁을 하던 1974년 4월4일 <동아일보> 1면은 ‘대통령 긴급조치 4호’ 기사로 온통 뒤덮였다. “반국가적 불순활동 발본색원-데모 주동 최고 사형, 위반 학교는 폐교”, “대통령 긴급조치 4호 선포, ‘민주학생총연맹’(민청학련) 관련 활동 금지”, “보도·비방 금지, 치안유지 위해 지방장관 요청하면 병력 출동”이라는 톱기사에, “국론분열 책동 불용”이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특별담화와, 김성진 청와대 대변인의 “민청학련 관련 학생들, 반국가단체와 결탁 노농정권을 기도”라는 기사, 민관식 문교장관의 “폐교 등 제반조치 별도로 공고”라는 기사가 뒤따랐다.
‘긴조 4호’는 “조치를 위반했을 때는 법관의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배하며, 비상군법회의에서 심판”하되 “사형, 무기 또는 5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하도록 했다.
74년 3~4월 터져나온 대학생들의 반유신 시위는 철저히 묵살했던 언론들은 “민청학련이라는 불법단체가 인민혁명을 수행하기 위한 상투적 방편으로 통일전선의 초기단계적 지하조직을 만들어 반국가적 불순활동을 전개했다”는 박 대통령의 발표문을 대서특필했다.
유신체제가 들어서자 학생운동 진영은 “민주화가 착취당하는 민중의 삶과 직결되는 문제이며, 국민대중 전체를 의미하는 민족의 국내외적 자주권의 문제”라고 인식하기 시작했다. 이런 사상은 74년 4월3일 ‘민청학련’ 이름으로 발표된 ‘민중·민족·민주 선언’에 잘 나타나 있다. 선언문에는 ‘근로대중의 최저생활 보장’, ‘모든 노동악법 철폐와 노동운동의 자유 보장’, ‘반민족적 대외의존경제 청산과 자립경제 확립’ 등도 들어 있다.
그러므로 74년 봄 이전 학생운동의 흐름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73년 가을 반유신의 목소리가 터져나오자 74년 봄 전국적인 학생 시위 전개를 낙관하고, ‘3선 개헌 반대 운동’으로 강제징집됐다가 복학한 서울대 문리대 67~69학번생들과 71~72학번생들이 접촉하기 시작했다.
구체적인 모의는 서중석(사학과 67)·안양로(정치학과 68)·유인태(사회학과 68)·이철(사회학과 69) 등이 시작했다. 이들은 강북구 삼양동에 하숙집을 구하고 서울대 문리대의 정윤광(철학과 66)·고 나병식(국사학과 70)·정문화(외교학과 70)·황인성(독문학과 71)·서울대 상대 김병곤 등을 불러 모았다. 이어 서울대 각 단과대, 서울시내 대학, 전국 각 대학 순으로 접촉을 넓혀갔다. 당시 각 대학의 이념동아리들은 연대운동의 매개체로 큰 구실을 했다.
우선 서울대를 보면, 문리대의 강제징집 복학생 모임인 ‘부문회’(제정구·심재권·이호웅 등), ‘후진국사회연구원’(서중석·안병욱·유초하·심재식·손학규 등 40~50명), 문리대 학보 <형성> 편집실(안병욱 등), ‘이와나미 신서 독서클럽’(이철·신동수·강구철·이해찬·최권행·백영서·신대균), 법대의 ‘사회법학회’, 상대의 ‘한국사회연구회’ 등이 있었다. 이화여대에는 ‘새얼’, 연세대에는 ‘한국문제연구회’와 ‘자유교양회’, ‘인간걱정회’, 경북대에는 ‘한국풍토연구회’, 전남대에는 ‘교양연구회’ 등이 있었다. 개신교의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황인성·나병식·신대균·이종구)과 흥사단(황인범)도 있었다.(<한국민주화운동사 2>, 돌베개, 2009년)
이들이 74년 2월부터 본격적으로 접촉한 사람들은 서울대 문리대의 이종구·전흥표·강구철·이해찬·송운학, 상대 학생회장 정금채, 공대의 서경석·신철영·신수철, 의대의 심재식·황승주, 사대의 서종수, 연세대 김영준·김학민·최민화·송무호, 고려대 강박인·제철, 성균관대 김수길, 한신대 김경남, 동국대 고 여익구, 서강대 황민수·박석률, 이화여대 김은혜·오성숙, 경북대 여정남·이강철·정화영·임규영, 영남대 김광택, 전남대 박석무·윤한봉·이강·김정길·주영길, 부산대 김재규, 강원대 정성헌 등이었다.
하지만 유신 반대 시위는 계획대로 진행되지 않았다. 3월22일 경북대가 첫 물꼬를 텄으나 200명 소규모였고, 3월28일 서강대의 시위 계획은 성토대회로 끝난 채 임성균·김윤·박호용 등이 체포됐다.
학생들의 전국적 시위 계획이 실패한 데는 일제 이래 사찰·감시·협박·회유에 이골이 난 유신 경찰과 공안기관에서 일찍부터 학생들의 동향을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증거로, 이철과 일본 <주간현대>(슈칸겐다이)의 프리랜서 기자인 다치가와의 인터뷰를 주선해준 조직휘가 중앙정보부에 포섭된 가짜 대학생으로 밝혀졌다. 그는 훗날 중정에 취업했으나 자살했다. 또 73년 “시켜주면 유신정권에 맞서 앞장서서 싸우겠다”고 약속해 서울대 문리대 학생회장이 됐던 곽성문(국사학과 72)이 ‘민청학련 사건’ 때 군사법정에 증인으로 나와 “이철이 내게 공산폭력혁명을 지시했다”고 거짓 증언한 것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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