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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정권과 사주 탄압에 맞선 동아노조 / 이룰태림

등록 2014-03-03 18:47수정 2018-05-10 13:18

동아일보사 노조가 1974년 3월8일 서울시에 설립신고서를 내자마자 회사 쪽은 노조 간부 전원과 기자 등 13명을 무더기 해임했다. 사진은 3월14일 노조의 상무집행위와 부당해임대책위 이름으로 노조 인정과 해임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왼쪽)와 4월14일 회사 쪽의 ‘징계 사면’ 등 특별 담화문이 나온 뒤 노조 대표들이 김병만 사주를 만난 경위에 대한 보고문(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동아일보사 노조가 1974년 3월8일 서울시에 설립신고서를 내자마자 회사 쪽은 노조 간부 전원과 기자 등 13명을 무더기 해임했다. 사진은 3월14일 노조의 상무집행위와 부당해임대책위 이름으로 노조 인정과 해임 징계 철회를 요구하는 성명서(왼쪽)와 4월14일 회사 쪽의 ‘징계 사면’ 등 특별 담화문이 나온 뒤 노조 대표들이 김병만 사주를 만난 경위에 대한 보고문(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3)
‘동아일보사 노조’는 출발부터 박정희 유신정권과 동아일보사 사주로부터 양면 협공을 받았다. 동아일보사의 김상만 사주는 노조가 서울시에 설립신고서를 낸 1974년 3월8일 노조 간부 11명 전원(지부장 조학래, 부지부장 문영희·김두식·이영록, 사무장 정영일, 회계감사 이기중·임부섭, 총무부장 양한수, 쟁의부장 강정문, 조직부장 성유보(필자), 섭외부장 이부영)과 심재택(제1차 자유언론수호선언의 주동자)·박지동(민족주의비교연구회 5대 회장) 기자 등 13명을 무더기로 해임했다. 그럼에도 3월9일에는 <동아방송>의 피디·아나운서 등을 포함해 조합원이 173명으로 늘어났다.

노조는 또 회사 쪽의 탄압에 대비해, 사전에 ‘제1차 비상대책위원회’를 꾸려놓았고, 노조 집행부가 해임되자 곧바로 출범시켰다. ‘1차 대책위’는 권근술·김동현·김민남·김양래·김용정·김종철·김진홍·박순철·박종만·오정환·이종대·전만길·홍종민 등 13명이었다. 그러자 회사는 3월13일 비대위 5명(권근술·김동현·김종철·박순철·박종만)과 고준환 기자를 해임하고, 김민남·김양래·이종대·홍종민과 김영일·송경선 기자 등 6명을 무기정직시켰다. 1차 비대위의 김용정·김진홍·오정환·전만길과 김언호·이종덕·이종욱·이태호·최학래·허태홍 등 10명은 ‘4개월 감봉’에 처했다.

이때 노조가 회사 쪽의 탄압을 예상한 것은 동아일보사가 60년 4월혁명 때 사설을 통해 ‘전국교원노조 결성’을 반대한 사례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60년 8월22일치 동아일보 사설은 “교육사업은 일반 사기업처럼 영리사업이 아니고, 따라서 노자간(勞資間)에 이해대립이란 있지 아니하므로 전자가 후자에 대하여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조합 같은 것은 교육사업에서는 시인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는 동아일보사 경영진이 노동운동을 ‘노동자와 사기업 간의 이익 다툼’ 정도로 파악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60년 봄의 교원노조 운동이, 이승만 정권의 ‘교육 어용화’ 정책에 의해 원자화된 교원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게 동원되었는가를 반성하고 아래로부터의 교육 민주화 투쟁을 위해 결성되었다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이 사설의 ‘교원노조’라는 단어 대신에 ‘동아노조’를 대체해 읽어보면 사주와 경영진이 노조 등장에 얼마나 부정적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서울시 역시 노조 등록 필증을 발급해주지 않았다. 그런데 서울시의 설립신고서 반려 이유가 참으로 우스꽝스러웠다. 양택식 서울시장 이름으로 ‘현재 노조 임원 전원이 동아일보사에 재직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고서를 접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논리라면 노동자들은 절대로 노조를 설립할 수 없었다.

노조는 2차 대책위를 출범시키면서 회사를 상대로 ‘해고 무효 소송’을 제기하는 한편, 서울고법에 ‘노조 설립신고 반려 취소를 요청’하는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고 황인철·홍성우·김상훈·강신옥·민병국·박철우 변호사 등이 노조 쪽 무료 소송대리인으로 참여했다. 그러자 행정소송 가처분 소송에서 패소할 것을 예감한 김상만 사장은 74년 4월12일 “두 차례에 걸쳐 했던 징계를 4월13일자로 사면한다”, “노조 명의의 일체의 언동, 유인물 배포, 집회는 엄금한다”는 ‘특별 담화문’을 발표했다.

‘동아 노조’는 즉각 회의를 소집했다. 노조 임시사무실로 빌려 쓰던 신문로 세종여관에 모인 수십명의 노조원들은 장시간 토론 끝에 복귀를 결정했다. 노조는 회사 쪽에 “부당한 징계에 대해 사면이 아니라 철회할 것”을 요구하는 한편, “노조는 회사 복귀 후에도 노동조합의 정당한 활동을 계속할 것임을 분명히 밝힌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또 이 성명을 ‘내용증명 우편’으로 회사에 통보했다.

회사 복귀 뒤 노조는 회사 쪽과 간담회를 했다. 회사 쪽에서는 김상만 사장, 홍승면 이사, 김성열 이사, 송건호 수석논설위원, 이동수 동아방송 수석해설위원이, 노조 쪽에서는 조학래 지부장, 문영희 부지부장, 정영일 사무장, 이부영 섭외부장이 참석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이때 김 사장은 “이번 사태는 불행한 일로 가슴 아프게 생각한다. 집단행동을 하지 않더라도 계통을 밟아 여러 번 이야기하면 결국은 젊은 기자들의 의사가 전달되지 않겠는가?”라고 말했고, 노조는 “등록 필증이 나오지 않더라도 노조 활동을 계속할 것이다. 그러나 노조 활동의 주된 목표가 언론자유운동인 만큼 회사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겠다. 회사도 대화의 통로를 열어달라”고 요구했다.

74년 4월 노조는 안성열 노조원을 통해 송건호 수석논설위원을 편집국장으로 추천했고 회사는 이를 수용했다. 송 선생을 편집국장으로 임명한 것은 70년대 초중반의 동아일보사 행적 중에서 유일하게 잘한 일이라 할 것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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