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2월24일 장준하·백기완 선생의 주창으로 시작된 유신헌법 철폐를 위한 ‘개헌청원 백만인 서명운동’은 불길처럼 번져 박정희 정권을 위협했다. 사진은 12월24일 서울 종로 와이엠시에이 총무실에서 장준하 선생이 서명운동 시작을 선언하는 모습(왼쪽), ‘개헌서명운동을 즉각 중지하라’는 박정희 대통령의 경고를 1면 머리기사로 소개한 12월29일치 <동아일보>(오른쪽).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41)
‘유신체제’에 대한 저항의 선두 역시 학생운동이었다. 1973년 10월2일 서울대 문리대, 10월4일 서울대 법대, 10월5일 서울대 상대, 11월5일에는 경북대에서 유신반대 시위가 일어났다. 그러자 박정희 정권은 서울대 문리대의 고 나병식·고 정문화·정찬용·강영원·황인성·고 강구철·도종수(문리대 학생회장)·안양노(문리대 동아리 ‘부문회’ 회장), 서울대 법대의 최동준, 서울대 상대의 고 김병곤·김병만, 경북대의 이강철·정화영·황철식 등을 구속하는 한편 10월25일 ‘유럽 거점 대규모 간첩단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중앙정보부가 그 혐의자로 수사하던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를 고문치사시키는 바람에 이 사건은 유야무야되었다.
이처럼 73년 여름 이후 김대중 납치사건과 학생들의 유신반대 시위가 잇따라 일어나자 재야에서도 ‘유신 철폐 운동’이 시작됐다. 사실 ‘재야’, ‘재야 인사’는 대한민국에만 존재하는 독특한 용어인데, 백기완 선생은 재야 인사라는 말을, “인권이 침해당하고, 자유가 박탈당하는 ‘거친들’에 곡식과 나무를 심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70년대 초 자신이 맨 처음 사용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73년 당시에는 ‘재야’라고 부를 만한 인사들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해 11월5일 시국선언을 하고 ‘민주적 제 질서의 시급한 회복’을 요구한 15명을 선구자로 꼽을 수 있다. 바로 강기철·계훈제·김숭경·김재준·김지하·박삼세·법정 스님·이재오·이호철·정수일·조향록·지학순·천관우·함석헌·홍남순 등이었다. 12월13일에는 윤보선·김재준·함석헌·김수환·김관석·이병린·천관우·김홍일·유진오·이인·이정규·이희승·한경직 등이 ‘국민 기본권 보장’, ‘3권 분립 재확립’, ‘공명선거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요구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내는 공개 건의문’을 발표했다.
고 장준하 선생과 백기완은 이러한 재야 원로들의 뜻을 현실화·구체화하기 위해 ‘유신헌법 철폐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12월24일 ‘개헌청원 100만인 서명운동’에 돌입했다. 34명이 각자 운동본부가 되어 서명을 받고, 그 명단을 장준하가 취합하기로 했다. ‘운동본부 34명’은 앞서 시국선언과 공개 건의에 나선 인사들과 더불어 장준하·김동길·안병무·박두진·문동환·김정준·김찬국·문상희·백기완·이상은·이호철·김윤수 등이었다. 서명에는 대학생 이상이면 누구나 참여할 수 있으며, 개인이나 단체로 서명한 사람들은 그 명단을 운동본부 34명 중 한 사람에게 보내도록 했다.
이 서명운동에 개신교 도시산업선교운동의 교역자와 신도들, 문학인들도 대거 참여하는 등 전 국민적 관심사가 되자, 신민당도 동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명운동이 얼마나 신속하게 퍼졌던지 불과 보름 만에 장준하에게 취합된 서명자 명단만 40만명에 이르렀다.
이처럼 개헌청원 서명운동이 폭발성을 띠자, 박정희 정권은 74년 1월8일 ‘유신헌법을 부정·반대·비판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한다’, ‘이를 위반한 자들은 영장 없이 체포·구속·압수수색하며,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이런 사실을 알리는 일체의 행위도 금한다’는 긴급조치 1호와, ‘이 긴급조치를 위반한 자는 비상군법회의에 회부한다’는 긴급조치 2호를 잇따라 공표하고, 장준하·백기완을 구속해버렸다.
긴급조치 1·2호가 발동되면서 개신교의 젊은 교역자들이 항의운동에 나서다 또다시 대거 구속되었다. 74년 1월17일 인명진·김경락 목사, 이해학·김진홍·이규상 전도사 등이 구국선언기도회를 열다가 구속되었고, ‘개헌청원운동 성직자 구속사건 경위서’를 작성해 전국 교회에 우송한 권호경·김동완·이미경(에큐메니칼 현대선교협의체 간사)·차옥숭(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간사)과 대학생인 박주환·박상희·김용상·김매자 등도 투옥됐다.(<한국 민주화운동사 2>,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돌베개, 2009)
박정희 정권의 일련의 긴급조치는 한국 사회에서 싹트고 있던 시민민주주의 운동을 말살하려는 것이었다. 긴급조치는 첫째로 ‘자연법사상’에 기초하는 ‘시민들의 신체 자유권’을 파괴했다. 근대 시민민주주의는 어떠한 때에도 ‘법원의 허락 없이 시민들을 연행·체포·구금할 수 없다’고 규정하고 있다. 둘째, 헌법이나 법률을 바꿀 수 있는 민주국가 국민의 당연한 권리를 송두리째 박탈했다. 셋째로 이들 긴급조치는 국민의 ‘말할 권리’, ‘알 권리’를 박탈했을 뿐 아니라 언론사와 언론인들로 하여금 “독재 권력의 시녀로 살아남느냐, 아니면 고문 받고 감옥 가고 목숨까지 거는 ‘저항 언론인’으로의 길을 걷느냐” 하는 선택을 강요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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