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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미수에 그친 유신반대 시위도 내란음모죄 / 이룰태림

등록 2014-02-25 18:45수정 2018-05-10 13:16

유신독재체제에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내민 1973년 4월22일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이래 개신교 진보세력은 박정희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은 75년 4월 ‘수도권 선교자금 횡령 사건’으로 구속된 박형규(왼쪽부터)·김관석·조승혁·권호경 목사가 재판을 받는 모습으로, 그해 6월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필자(성유보)는 서대문구치소에서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유신독재체제에 가장 먼저 도전장을 내민 1973년 4월22일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이래 개신교 진보세력은 박정희 정권 내내 탄압에 시달려야 했다. 사진은 75년 4월 ‘수도권 선교자금 횡령 사건’으로 구속된 박형규(왼쪽부터)·김관석·조승혁·권호경 목사가 재판을 받는 모습으로, 그해 6월 다른 사건으로 구속된 필자(성유보)는 서대문구치소에서 이들과 인연을 맺었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39)
1972년 ‘유신체제’는 주권자인 국민이 더이상 선거를 통해 정치권력을 교체할 수 없게 만들었다. 유신체제에 대한 첫 공개 도전은 73년 봄 개신교 쪽에서 터져나왔다.

그해 4월22일 부활절을 맞아, 보수교단인 ‘대한기독교연합회’와 진보교단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가 서울 남산 야외음악당에서 ‘부활절 연합예배’를 공동 개최하기로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개신교의 보수파와 진보파가 함께 행사를 하게 되면 주로 재정을 담당하는 보수파가 주도권을 잡았다. 그해 부활절 연합예배도 마이크는 보수파가 잡았다.

박형규 목사는 김관석 교회협의회 총무로부터 연합예배 소식을 들었다. “그(김관석)는 이 집회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낼 여지는 거의 없다고 푸념 비슷하게 말했다. ‘우리의 목소리?’ 그렇다. 우리의 목소리가 있어야 했다. (…) 며칠 동안 숙고한 끝에 유신체제를 비판하는 펼침막과 전단을 만들어 배포하기로 했다. 당시 서울제일교회에서 함께 시무하고 있던 권호경 전도사에게 거사 자금 10만원을 주면서 거사는 반드시 예배가 끝난 뒤에 해야 하며 용어는 철저하게 기독교적인 표현을 써야 한다고 당부했다.”(박형규 회고록 <나의 믿음은 길 위에 있다>, 신홍범·임재경, 창비, 2010년)

권호경은 남삼우(감리교청년회 회장), 고 김동완(당시 전도사), 이규상(전도사), 나상기(당시 한국기독학생총연맹 회장) 등과 함께 펼침막 10여개와 유인물 2000장을 만들었다. 그러나 펼침막은 경찰의 감시가 하도 삼엄해 내걸지도 못했고, 유인물도 일부만 뿌리다 말았다.

그런데 두 달이나 지난 6월 말 국군 보안사가 먼저 남삼우·진산전(신민당 국회의원 비서) 등을 조사한 뒤 박형규·권호경·김동완·황인성(당시 학생사회개발단장)·정명기·서창석·이상윤 등을 연행해 갔다. 보안사는 이 작은 데모 미수사건을, “연합예배에서 시위대를 조직하여 일부는 방송국을 점거하고 일부는 중앙청과 국회의사당을 점거하여 국가를 전복하려 했다”며 내란음모죄로 몰았다. 교회협의회 소속 6개 교단이 일제히 항의에 나섰다. 개신교 성직자들을 폭력혁명세력으로 몬 것이 진짜 문제였다. 결국 박정희 정권은 11명을 즉심으로 돌리고 9월에는 박 목사 등도 병보석으로 모두 풀어줬다.

내가 박 목사를 처음 만난 것은 서대문구치소에서였다. 훗날 다시 얘기하겠지만, 75년 6월 ‘청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나는 가을께 재판정으로 출두할 때 박형규·김관석·조승혁·권호경 목사를 만났다. 이때 이미 박 목사는 ‘남산 부활절 연합예배 사건’, ‘민청학련 사건’에 이어 ‘수도권 선교자금 횡령 혐의’로 구속되어 이른바 ‘별’(감옥살이)을 세 개나 달고 있었다. 이 네 분과의 만남을 계기로 나는 기독교 신자가 아님에도 민주화운동 과정에서 개신교계와 여러 인연을 맺게 되었다.

2001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이 국회를 통과했을 때, 민주화운동 진영은 누구를 초대 이사장으로 모실 것인지를 두고 고민했다. 당시 나를 포함해 10명의 대표설립위원(김용태·고 나병식·박원순·성해용·안병욱·장인태·조성우·지은희·최열)은 박 목사를 모시기로 합의했다. 그런데 당시 김대중 정부의 집권 새천년민주당에서 박 목사를 반대했다. 87년 대선 때 ‘후보단일화파’였다는 이유였다. 그쪽에서는 ‘김대중 비판적 지지파’ 중에서 이사장을 물색하고 있었다. 이에 설립위원들은 “집권세력이 선호하는 인물에게 이사장을 맡기면 기념사업회가 집권세력의 사유물이 된다”고 주장하고 ‘설립위원 전원 사퇴’ 카드로 박 목사를 관철시켰다.

기념사업회법 제7조는 ‘이사장은 행정안전부 장관이 임면한다’고 정해놓았다. 기념사업회가 발족한 뒤, 이 7조의 위험성을 제거하기 위해 따로 정관을 만들어 행안부의 승인을 받아놓았다. 그 정관에는 ‘행정안전부 장관은 기념사업회 이사장과 임원을 임명할 때, 기념사업회 임원추천위원회가 추천한 인사들 중에서 임명한다’고 못박았다.

노무현 정부 때는 별 논란 없이 2·3대 이사장으로 함세웅 신부를 모실 수 있었다. 이명박 정부에서는 ‘낙하산 이사장’을 임명하려다 반발에 밀려 기념사업회에서 추천한 정성헌 이사장을 임명하는 소동을 빚었다. 그런데 최근 박근혜 정부에서 제5대 기념사업회 이사장으로 지난 대선 때 박 후보를 공개 지지한 박상증 목사를 지명해 기념사업회 설립위원, 전직 이사들, 직원들은 물론 민주화세력 전반의 강력한 취임거부운동에 직면하고 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오랜 민주화운동의 산물이다. 민주화운동의 성과와 역사를 계승·발전시키기 위해 설립된 공공법인이다. 정부 조직이 아닌 별도의 법인으로 설립한 것도 특정 정파에 휘둘릴 우려를 덜기 위해서였다. 민주화운동의 역사적 사실이 특정 집권세력의 호오에 의해 왜곡돼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집권 2년째를 시작하는 박 정부는 박상증 이사장 임명을 철회함으로써 ‘불통 정치’, ‘권력 사유화’를 반성하겠다는 신호를 보여줘야 할 것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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