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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입’ 틀어막은 박정희, 언론탄압 노골화 / 이룰태림

등록 2014-02-20 19:12수정 2018-05-10 13:15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71년 3선 연임까지 박정희 집권 10년 동안 언론의 수난사는 끊임없었다. 68년 ‘군기누설 필화사건’으로 3명의 기자가 구속된 <동양통신>(왼쪽), 70년 창간 2호 만에 폐간당한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창간호 표지.(오른쪽)
1961년 ‘5·16 쿠데타’ 이후 71년 3선 연임까지 박정희 집권 10년 동안 언론의 수난사는 끊임없었다. 68년 ‘군기누설 필화사건’으로 3명의 기자가 구속된 <동양통신>(왼쪽), 70년 창간 2호 만에 폐간당한 함석헌 선생의 <씨알의 소리> 창간호 표지.(오른쪽)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36)
1971년 4월 3선 대통령에 취임한 박정희 대통령의 전반기 집권 10년 동안을 되돌아보면 ‘무조건 나만 따르라’는 일방적 리더십이었다. “아니요” 하는 사람이나 집단은 사회적으로 몰락하고 배제됐다. 당연히 ‘말로 먹고 사는 사람들’이 가장 힘들게 되었다. 언론인·출판인·문인·학자·신문사·방송사·출판사들이 고달파졌다.

앞서 68년 ‘<신동아> 차관 기사 필화사건’에서 알 수 있듯이 박정희 정권의 언론 탄압은 집권 초기부터 시작되었다. 61년 5·16 쿠데타 직후 <민족일보>가 폐간되고, 사장 조용수가 사형을 당했다. 그 1년 뒤에는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라는 명분으로 정기간행물 1200여종을 폐간시키고, 916개 언론사 가운데 일간지 39개사, 일간통신 11개사, 주간지 31개만 남긴 채 모두 문을 닫게 했다.

물론 ‘4월 혁명’ 직후 언론자유의 흐름을 타고 너도나도 언론사를 만들어 사이비 언론들이 사회혼란을 크게 부추기기는 했다. 그러나 사이비 언론에 대한 정리는 권력을 이용한 강제정리가 아니라, 사법적 절차에 따라야 했다. 물론 언론의 자유에는 ‘거짓말을 할 자유’, ‘남에게 협박하거나 공갈할 자유’ ‘언론이라는 이름으로 특권을 누릴 자유’는 없다. 하지만 ‘특권’을 ‘자유’로 착각하는 일부 언론의 행태를 잡지 않고 언론사만 강제로 줄인다고 사이비 언론이 없어지겠는가? 그러므로 박 정권의 집권 초기 언론통폐합은 ‘내 말에 따르지 않는 언론은 처벌받는다’는 공포 분위기 조성용이었고, 정치인 박정희는 집권 초기부터 독재자였던 것이다.

‘독재’란 “혼자서 판단하고 결정하고 심판한다”는 뜻이다. ‘독재자’는 자신의 말에 따르지 않는 자나 집단에는 가혹한 불이익을 준다. 당연히 그러한 독재사회에서는 독재자와 그 추종자들이 ‘사회적 언어’, 즉 말부터 독점한다.

박 정권 초기 10년에는 필화사건이 잇따랐다. 모두 박 정권의 정책에 대해 “이게 아닌데요”라고 반론을 제기한 사람들, 그 반론을 전파한 언론인과 언론사를 겨냥한 탄압사건들이다.

고 리영희 선생은 64년 필화사건으로 언론계에서 첫번째로 축출됐는데, 그가 문제를 제기한 “미국과 소련의 동서냉전이 화해무드로 전환하고 있는 60년대 전환의 시대에 반공 국시는 맞지 않다”라는 글 때문이었다. 65년에는 소설가 남정현의 <분지> 필화사건이 있었고, 68년 7월에는 ‘<동양통신> 군기누설 필화사건’이 뜨거웠다. 이는 앞서 소개했던 신동아 필화사건과 마찬가지로 대형 언론사조차 길들이고자 했던 심각한 언론자유 침해사건이었다.

동양통신은 68년 6월21일 당시 최영희 국방부 장관이 국회 국방위원회 공개회의에서 보고한 내용을 토대로 ‘전투태세 완비 3개년 계획 확정’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내보냈다. 그런데 한달쯤 뒤 육군 방첩대는 “국가기밀 유출”이라며 동양통신 이주호 편집부장, 김광순 사회부장 대우, 전제열 국방부 출입기자를 구속하고, 기사를 전재한 <경향신문> <대한일보> <신아일보>는 물론 기사를 소개하지도 않은 <동아일보> <조선일보>까지 8개 중앙일간지와 2개 통신사 기자·간부 등 30여명을 소환해 심문했다.

70년 들어 언론 탄압은 더욱 노골적이 되었다. 그해 5월호 <사상계>에 실린 김지하의 담시 ‘오적’이 신민당 기관지 <민주전선>에 전재되자, 중앙정보부는 김지하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기소하고 문공부는 사상계를 등록 취소시켜 버렸다. ‘오적’은 당시 사회 부패상을 풍자한 내용이었다. 이때 병보석으로 석방된 김지하는 72년 <창조> 4월호에 담시 ‘비어’를 실었다가 또다시 반공법 위반으로 구속되었다.

고 함석헌 선생이 발행하던 <씨알의 소리>도 70년 5월 창간 2호 만에 등록 취소를 당했다. ‘씨알의 소리’는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나라가 산다’는 철학을 내건 잡지였는데, 생각을 많이 하면 할수록 할 말이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 박 정권의 ‘말의 독점’에 방해꾼이 될 뿐이었다. 하지만 등록을 취소시킬 구실이 마땅치 않자 박 정권은 ‘70년 5월호를 문공부에 등록하지 않은 인쇄소에서 찍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기어코 폐간시켰다. 그나마 대법원의 등록취소 무효 판결로 씨알의 소리는 71년 9월호부터 복간되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71년 초에는 잡지 <다리> 필화사건이 일어났다. 정권은 70년 12월호에 실린 문학평론가 임중빈의 글 ‘사회참여를 통한 학생운동’을 문제 삼아 필자와 발행인 윤재식, 주간 윤형두를 반공법 위반 혐의로 구속했다.

반독재 시민민주주의운동은 일반적으로 모든 자유의 연결고리인 ‘언론자유운동’, ‘말의 독점 철폐운동’에서부터 시작되기 마련이다. 그러나 71년 대선 승리를 발판으로 박 정권이 장기집권에 들어가면서 언론계의 어둠은 더욱 깊어가기만 했다.

필자/성유보

정리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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