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년 4월27일 ‘제7대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야당 대선 후보의 세대교체를 주창하며 출마를 선언한 ‘40대 기수’ 3명이 70년 9월 신민당 후보 지명대회를 앞두고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왼쪽부터 당시 김대중 의원, 유진산 총재, 고흥문 사무총장, 이철승 전 의원, 김영삼 원내총무.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34)
박정희 대통령이 헌법을 뜯어고치면서까지 3선 연임에 나선 ‘제7대 대통령 선거’가 1971년 4월27일로, ‘제8대 국회의원 선거’는 5월25일로 잡혔다. 당장 박정희 ‘철권통치’에 맞설 야권 후보가 누가 될지 국민적 관심사가 되었다.
애초 7대 대선은 박정희 대통령-유진오 신민당 총재의 대결로 전망됐다. 그런데 69년 12월 유 총재는 뇌동맥 경련증으로 요양차 일본으로 출국해버렸다. 학자풍의 유진오는 윤보선 후보를 앞세워 자신이 신민당 총재로 선거를 총지휘한 67년 대선 때의 격무, 뒤이은 제7대 국회의원 총선거에서의 참패와 69년 ‘3선 개헌 반대운동’의 무력감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지쳐버린 것이다.
70년 초 유진오의 정계 복귀가 불가능해지자, 신민당은 새로운 지도부 구성과 제7대 대선 후보 선출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신민당은 우선 1월27일 새로운 당 지도부 구성을 위한 임시 전당대회를 열었다. 이 전당대회에서 유진산이 이재형·정일형과의 3파전에서 2차 투표 끝에 또다시 총재로 선출됐다. 그러나 54년 무소속으로 처음 민의원에 당선된 이후 5선 의원인 유진산은 과거 민주당 구파들이 만든 신민당의 간사장으로 정치적 입지를 다졌고 박정희 정권과 줄곧 타협적 자세를 취해, 군인정치에 맞설 패기와 정열이 부족하다는 인식을 국민들에게 안겨주고 있었다.
그에 앞서 69년 11월8일 당시 신민당 원내총무 김영삼 의원이 외교구락부에서 기자회견을 했다. 김영삼은 “71년 제7대 대선 때는 나 스스로 대통령 후보로 출마하여 우리 당을 승리로 이끌고 거국적인 민주세력을 집결시키는 막중한 작업에 구심점이 되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고 선언했다.
42살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은 누가 봐도 ‘야당의 세대교체’ 선언이었다. 이는 또한 남북 분단 이후 50~60년대 친일 지주세력과 친일 관료세력 중심의 원로정치를 펴오던 한민당-민주당 계보의 일대 탈바꿈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들 세대교체를 반대하는 당내 원로를 등에 업은 유진산은 총재가 되자, 곧바로 김영삼의 대통령 후보 출마 선언을 “구상유취한 일”(젖비린내 나는 어린아이가 저지른 터무니없는 일)로 일축했다.
하지만 70년 1월24일 43살의 김대중 의원이 “박정희 군인정치를 종식하는 지름길은 민주당의 40대 젊은 정치인들이 공정한 당내 경선을 통해 대통령 후보를 선출하는 길밖에 없다”며 ‘40대 기수론’을 내세워 출마 선언을 하고, 박 정권에 의해 정치활동을 금지당한 지 8년 만에 해금돼 신민당에 막 입당한 48살의 이철승마저 ‘40대 후보론’에 가세하며 출마를 선언하자, 신민당 내의 세대교체론은 무시 못할 형세로 돌변했다.
애초 유진산은 세대교체 움직임을 견제하고자, 총재가 임명권을 지닌 20명의 정무위원에 홍익표·양일동·윤제술·조한백·김영삼·고흥문·이충환·박기출·박병배·정해영·김홍일·정성태·김대중·김원만·김응주·김영일·김세영·이철승·윤길중·최용근 등 주로 50대 이상을 지명하고, 원래 70년 6월로 예정된 대통령 후보 지명대회를 9월로 연기하는 한편, ‘대통령 후보 조정 12인 위원회’를 구성해 이범석·백낙준·허정·이인·정일형·김홍일·유진오 등의 영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단일후보로 추대되지 않으면 출마하지 않겠다고 밝혀 영입작업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편 김영삼의 제안으로 3명의 ‘40대 기수’는 따로 만나 이렇게 합의했다. ‘우리 세 사람은 자율적으로 단일화에 노력한다. 단일화가 성립되지 않으면 지명대회에서 선의의 경쟁을 한다. 1차 투표에서 모두가 과반수에 미달할 때, 만약 다른 경쟁자가 있으면 1위에게 표를 몰아준다’는 내용이었다.(소석 이철승 회고록 <대한민국과 나> 제1권·시그마북스)
유진산은 대통령 후보 원로 추대 작업이 실패로 돌아가자, 총재에게 지지후보 추천권을 달라고 요구한 뒤, 김영삼과 이철승을 불러 ‘양자 단일화’에 대한 약속을 받고는, 김영삼 후보 공개 추천을 선언했다. 그런데 이런 정치공작은 역풍을 불러 일으켰다. 70년 9월28일 신민당의 대선 후보 지명대회는 열렸고, 1차 투표에서 김영삼이 421표로 김대중 382표보다 앞서 1위를 차지했으나, 백지투표가 78표나 나와 총투표자의 과반을 확보하는 데 실패했다. 이철승계 일부가 기권표를 던진 것이었다. 이어 2차 투표에서는 김대중이 오히려 458표를 얻어 410표에 그친 김영삼을 누르고 역전승했다.
‘큰 뱀’으로 불렸을 정도로 노회한 정략가였던 유진산은 지명대회 이후 내리막을 걷다 74년 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70년의 신민당 대선 후보 경선은 한국 정치사에서 새로운 정치풍토를 조성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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