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8년 11월 말 필자(성유보)가 <동아일보> 수습 11기 기자로 입사했을 때, 이른바 ‘신동아 차관 기사 필화 사건’으로 동아일보사는 초토화됐다. ‘차관 기사’를 작성한 박창래·김진배(왼쪽 사진) 기자는 유배됐고, ‘차관 필화 사건’에 대한 사설을 쓴 천관우(오른쪽) 주필은 쫓겨나는 등 모두 12명의 기자가 구속·해직·유배 등을 당했다.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9)
1968년 ‘1·21 사태’(북한 게릴라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 습격사건)로 강도 높은 유격훈련을 받아 말년이 약간 고달프긴 했지만, 나는 비교적 평온하게 군 생활을 마치고 1968년 9월14일 제대했다. 사회 복귀를 하자마자 <동아일보>의 10월 말 수습기자 시험 공고가 나왔다. 마포에서 산부인과 의사를 하던 사촌누나 집에 기숙하면서 아현도서관에서 한달 반 동안 하루 10시간씩 공부했다. 정성이 통했는지 ‘동아일보 수습기자 11기생’으로 합격했다. 김두식(전 한겨레신문 사장·작고), 이부영(전 국회의원), 이종덕(전 국제신문 사장), 이기중(전 한겨레신문 이사), 오정환(전 롯데그룹 이사), 김언호(도서출판 한길사 대표), 정영일(변호사), 박기정(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김용정(전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용수, 이성주, 노재성 등이 동기생이다. 이밖에도 <동아방송> 아나운서에 김기경·황유성, 프로듀서(PD)에 이광·김정환 등이 함께 입사했다.
68년 11월30일, 나는 동아일보사 첫 출근 날의 기억을 결코 잊을 수 없다.
바로 그날 중앙정보부는 <신동아>(1968년 12월호)의 ‘차관’ 기사를 문제 삼아 홍승면 주간, 손세일 부장, 유혁인 정치부 차장을 연행해 갔다. 이미 공동집필자 박창래 경제부 기자와 김진배 정치부 기자를 잡아가 수사한 뒤였다. 그래서 신문사 전체가 뒤숭숭했고 우리 수습기자들의 입사를 맞아주는 분위기도 영 신통치가 않았다.
신동아의 ‘차관’ 기사는 박·김 두 기자가 그해 9월 국회에서 ‘외자도입특별국정감사특위’ 활동을 취재하고, 국회의원 면담 과정을 거쳐 작성한 해설기사였다. 정부의 차관 도입 실태, 차관 배정 과정, 차관 도입의 공과 등에 대해 심층취재해 차관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정황을 파헤쳤다. 원래 ‘차관 산업개발’은 잘되면 기업이 흥하고, 잘못되면 국민들이 바가지를 쓰게 되는 셈이라, 언론이 나랏빚에 관심을 갖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중정은 문제를 삼았고, 더구나 ‘반공법 위반 혐의’를 조사한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박창래 기자는 중정에서 “당신의 차관망국론이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는 주장을 여러 번 들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김진배 기자는 그해 11월25일 김포공항에서 중정으로 바로 연행되었다. 68년 봄 김종필이 돌연 정계은퇴를 선언한 이유가 ‘70년 대통령 선거’ 출마를 준비하고 있다고 의심한 박정희 대통령의 압력 때문이라는 사실을 특종보도해 동남아 특별휴가를 갔다 오던 길이었다. 김 기자는 이 사건에 대해 <관훈저널> 2008년 봄호에 기고한 ‘1968년 그해 영광과 곤욕’에서 이렇게 술회하고 있다.
‘수사관이 요구했다. “우리가 보기에 차관 도입에 따른 커미션 출처며, 분배방식이며, 권력층의 내막을 아주 정확하게 아는 행세깨나 하는 놈들이 조직적으로 동아일보에 제공한 자료를 근거로 하고 있어. 그 출처만 대면 당신은 죄가 없어. 어물어물하면 반공법 4조 1항에 해당돼.” 대답을 않자 그는 다른 방으로 끌고 가게 했다. “너 6·25 때 총 들고 의용군 했지? 여기 경찰 정보 갖고 있어.” “네 애비는 남로당 세포고, 3·22 폭동(1947년) 때 인민위원장 한 거 우리가 다 알고 있어. 이러니 대한민국에 해가 되는 기사를 써서 민심을 혼란시키고….” 나는 그자를 똑바로 노려보며 천천히 말을 꺼냈다. “우리 아버님은 해방 직전에 돌아가셨습니다. 내가 열두살 때, 초등학교 5학년 때입니다.” “이 새끼가 덤벼? 이런 빨갱이 새끼가!” 순간 나는 옆에 놓인 걸상을 번쩍 들어 책상 위에 던지며 소리쳤다. “이런 개 같은 새끼! 너 6·25 때 뭐 해먹은 놈이야! 네 애비는 뭐 해먹었어! 내 열여덟에 총 들고 싸웠다. 그때 죽었을 내가 여기까지 살아왔다. 이놈의 새끼, 너 같은 건 내가 죽여!” 정말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그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하고 손도 들지 못했다. 나는 그들 한두 놈쯤 죽일 것처럼 살기를 돋웠다. 그러자 다시는 “빨갱이다”, “공산당이다”라는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발행인이 김상만 부사장에서 고재욱 사장으로 바뀌고 천관우 주필은 자진사퇴라는 이름으로 해직되었다. 곧 김성열 편집국장 대리도 런던특파원으로 쫓겨나고 김 기자는 출판부로 유배되었다. 박정희 정권은 ‘차관 필화사건’에 대해서는 무혐의와 기소유예로 후퇴했지만, 대신 <신동아> 11월호에 실렸던 재미학자 조순승 교수의 ‘북괴와 중소분쟁’이라는 기고를 뒤늦게 문제 삼아 홍 주간과 손 부장을 반공법으로 구속하고 두 사람의 사표를 구치소에서 받아 갔다.
중정은 불과 2주일 사이에 당시 최대 부수를 자랑하던 동아일보사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동아일보사는 대응 한번 제대로 못했다. 우리 수습기자들의 미래를 보는 것 같았다. 이에 실망한 나머지 동기 가운데 정승택·최재원·김부연·박혜란은 수습기자 교육이 끝날 무렵 자진 사직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 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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