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은 1967년 ‘6·8 부정선거’ 한달 뒤 이른바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을 터뜨리고,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주도한 서울대 민족주의비교연구회 중심인물들을 세번째 구속시켰다. 사진은 67년 11월30일 3차 공판에서 동백림과 민비연을 연결시킨 고리로 지목된 지도교수 황성모(오른쪽)가 간첩죄로 재판을 받고 있는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8)
박정희 대통령은 전형적인 파시스트였다. 그의 사전에는 대화와 타협, 협상이라는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박정희식 정치에는 “정치란 없고, 통치만 있었다.”
1965년 ‘2차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사건’ 때 검찰(박종연 검사)은 중형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66년 2월 1심(재판장 김용철 부장판사)에서 김중태에게 징역 2년, 나머지 피고들에게는 집행유예 및 무죄를, 2심(서울형사고법 백낙인·김진우·박충순 판사)에서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
그럼에도 박정희 정권은 67년 7월11일 ‘3차 민비연 사건’을 일으켰다. ‘6·8 부정선거’ 한달 만인 7월8일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이른바 ‘동베를린(동백림) 간첩단 사건’을 터뜨렸다. “독일, 프랑스 등 유럽에 거주하는 동포 예술가·지식인·학자·유학생들이 북한에 입북하거나 노동당에 입당하고 국내에도 잠입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는 것이다. 앞서 얘기한 대로 중정은 이 동베를린 사건과 민비연의 연결고리로 황성모(1992년 작고) 지도교수에게 간첩 혐의를 뒤집어씌웠다.
26년 경남 사천 출생인 황성모는 서울대 문리대와 대학원을 거쳐 57년 독일 뮌헨·함부르크·뮌스터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60년 뮌스터대학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이화여대 사회학과 교수를 거쳐 62~69년 서울대 문리대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국내 사회학계의 태두 가운데 한 사람이다.
중정은 ‘동백림 사건’으로 194명을 기소했는데, 그중 23명이 간첩죄였다. 또 나도 포함해 민비연 회원 50여명을 조사하고, 황 교수, 초대 회장 이종률(당시 <동아일보> 기자), 초대 총무부장 박범진(당시 <조선일보> 기자), 2대 회장 김중태(당시 신한당 25인 운영위원회 최연소 위원), 3대 회장 현승일(당시 <동양통신> 기자), 김도현(당시 윤보선 신한당 총재 비서), 조봉계(당시 육군 복무중), 5대 회장 박지동(뒷날 <동아일보> 기자) 등 9명을 ‘동백림 간첩단’과 연계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기소했다. 중정은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 내란을 음모하고 시위를 배후조종한 것이 모두 간첩 황성모의 사주에 의한 것”이라고 발표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통영 출신의 재독 음악가 윤이상과 재불 화가 이응노처럼 세계적인 명성의 예술가들도 바로 이 사건에 간첩으로 몰려 옥고를 치러야 했다. 한승헌 변호사는 이응노가 북쪽과 접촉한 것은 6·25 전쟁 때 납북된 아들 소식을 알고 싶어서였다고 한다. 하지만 중정은 “박 대통령 재선을 축하하기 위해 국외 유명 인사를 초대하기로 했다”고 속여 이응노를 귀국시킨 뒤 간첩으로 체포했다. 이응노는 89년 서울 호암갤러리에서 그의 회고전이 열리던 첫날 파리에서 심장마비로 쓰러졌다.
나는 67년의 ‘제3차 민비연 사건’과 ‘동백림 간첩단 조작사건’을 떠올릴 때마다, 새삼 박정희의 ‘레드 콤플렉스’가 빚어낸 비극에 비통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다.
‘거장’ 피카소에게는 이런 일이 있었다. 그는 스페인 내전 당시 나치 독일의 무차별 폭격으로 민간인 2500명이 학살당한 게르니카의 참극을 보고 <게르니카>를 그렸다. 프랑코가 집권하자 프랑스로 망명한 그는 2차 대전 이후 공식적으로는 죽을 때까지 조국 스페인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프랑코 치하지만 고향을 가보고 싶어 여름이면 ‘프랑코 몰래’ 고향 말라가를 찾아 아름다운 해변에서 수영을 즐겼다. 훗날 알려진 바로는 독재자 프랑코도 사실은 피카소의 고향 방문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동시대 천재 예술가에게 경의를 표하는 뜻에서 그의 입국을 묵인했다고 한다.
2차 세계대전의 영웅이자 프랑스 대통령 드골의 경지에 이르면 우리는 더욱 할 말이 없어진다. 알제리 독립전쟁이 한창이던 59년 대통령에 취임한 그는 전쟁을 마무리할 방도에 골몰하고 있었다. 그 와중에 프랑스에 거주하는 알제리인들이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세계적 문호’ 장 폴 사르트르를 통해 알제리 독립군에게 전달한 사실이 드러났다. 사르트르를 처벌하라는 측근들의 아우성이 보통이 아니었다. 그때 드골은 말했다. “그냥 놔두게. 그도 프랑스야!” 사르트르는 아무런 조사도 받지 않았다.
한일회담 과정에서 ‘민족의 자주와 자존’을 외쳤던 학생운동세력들에 대해 “그들도 대한민국이야! 그들을 내버려둬!”라고 박정희가 한마디만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윤이상도, 이응노도 유럽에서 본연의 예술활동을 하도록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을까? 그들이 무장세력을 조직해 대한민국으로 쳐들어올 리도 만무했을 텐데 말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