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한일회담 비준 반대 성명을 낸 단체들의 연대기구인 조국수호협의회 결성을 사흘 앞두고 7월28일 예비역 육군 중장이자 외무부 장관 출신인 김홍일 대표 집행위원(가운데)과 예비역 육군 준장이자 전 무임소장관인 박원빈 간사장 등이 협의를 하고 있다. 하지만 8월14일 공화당 단독국회에서 한일국교조약은 통과되고 말았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4)
1965년 6월22일 도쿄에서 이동원 외무장관과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이 ‘한일협정’에 정식으로 서명하였다는 보도가 전해지자,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국회에서의 비준을 저지하자”는 방향으로 급전환했다.
이후 열흘도 안 되는 6월 말까지 서울대·고려대·연세대·동국대·명지대·수도공대·성균관대·건국대·수도의대·홍익대·한양대·이화여대·가톨릭의대·숭실대·인하공대·경북대·외대·경기공전·부산대·동양공전·명지대·동덕여대·국학대·수도공대생들이 시위에 나섰고, 보문고·동대문상고·동양공고·논산대건고·부산공업전문고·대전대성고생들도 거리로 몰려나왔다. 전국 대학과 고교에 조기방학과 휴교 지시가 내려진 7월 초에도 서울대 의대생들이 흰 가운을 입고 거리로 나서는가 하면, 대구대·상명여고·부산동래고·대구협성상고·강릉상고·여수공고·동북고·성북고·경복고·강문고·동성고·한영고생들이 비준 반대 시위에 합류했다. 하지만 7월10일께부터 학원가는 교문이 닫혀 적막강산이 됐다.
그러자 비준 반대운동은 기성세대로 옮겨갔다. 재경 문학인 82명의 비준 반대 성명, 역사교육연구회(대표 김성근)·역사학회(대표 고병익)·한국사학회(대표 김성준)의 비준반대 연합성명, ‘4월혁명 동지회’의 성명, 기독교인들의 전국적인 비준 반대 구국기도회, 재경 대학교수단 354명의 비준 반대 선언문 발표가 잇따랐다. 서울시내 6개 대학 학생회장단(고려대 유유길, 서울대 서성준, 숙명여대 박경자, 연세대 권상운, 이화여대 진민자)은 ‘한일협정 비준 반대 각 대학 연합체’(한비연)를 결성해 연대운동을 도모했다.
7월14일에는 예비역 장성 11명도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발표했다. 서명자는 김홍일(육군 중장·전 외무부 장관), 김재춘(육군 소장·전 중앙정보부장), 박병권(육군 중장·전 국방부 장관), 박원빈(육군 준장·전 무임소장관), 백선진(육군 소장·전 재무부 장관), 송요찬(육군 중장·전 육군참모총장), 손원일(해군 중장·전 국방부 장관), 이호(육군 준장·전 법무부 내무부 장관), 장덕창(공군 중장·전 공군참모총장), 조흥만(육군 준장·전 치안국장), 최경록(육군 중장·전 육군참모총장) 등이었다. 장성들은 성명에서 “잔학과 수탈로 일관했던 과거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한 속죄와 보상은 전혀 몰각되고, ‘이미 무효화’를 천명함으로써 일제의 죄책을 합법화시켰으며 (…) 징병과 징용으로 강제동원되었다가 종전 후에도 일본의 번영에 물심양면 공헌하여온 재일동포에 대하여는 강제퇴거 사유를 확대시키고, 그들 자손에 대한 영구권의 보장조차 불확실한 규정에 조인했습니다”, “이에 입법부는 주권자인 국민의 의사를 그대로 대표해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전력을 다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라고 주장했다.
이어 7월20일 대한변호사협회(회장 고재호)도 한일협정 반대 성명을 냈다.
7월31일에는 비준 반대 단체들이 모여 서울 대성빌딩 강당에서 ‘조국수호국민협의회’를 결성했다. ‘조수협’은 각계 대표들로 24명의 집행위원을 뒀다. 학계의 권오돈·조윤제·정석해, 독립운동가 김홍일·신봉제, 기독교계의 서병호·박윤영, 경제인 유창순, 문인 양주동·박두진, 법조인 이인·김춘봉, 천도교 박연수, 여성계 최은희, 유림 오양, 종교인 함석헌, 청년대표 하은철·정원찬, 예비역 장성 박원빈·손원일·박병권 등이었다. 대표집행위원에 김홍일, 간사장에 박원빈을 선출했다.
조수협은 8월2일 행동강령을 채택하고, 야당인 민중당 국회의원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발표했다. 8월3일에는 재미 목사들의 비준 반대 결의 소식도 전달됐다. 8월11에는 조수협과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가 연합전선을 펴기로 하고 8인 소위원회를 구성했다.
하지만 각계 기성세대의 비준 반대운동은 때늦은 감이 있었다. 공화당은 7월14일 국회 법사위에서 비준동의안을 기습 발의해 버렸고, 민중당의 대표최고위원 박순천은 7월20일 청와대에서 박정희 대통령과 여야 영수회담을 하면서 한일협정 비준동의안과 월남파병 동의안을 다루기 위한 ‘제52회 임시국회 소집’에 합의해 버렸다. 당시 의석 분포로는 국회가 문을 여는 순간 비준 통과는 불 보듯 뻔했다. 공화당 110석, 민중당 61석, 무소속 4석의 여대야소였으니 말이다.
이에 민중당 강경파는 ‘선 총선, 후 비준 논의’라는 당노선에 배치된다며 반발했고 결국 윤보선계와 박순천계로 갈라졌다. 이효상 국회의장은 8월13일 윤보선·김도연·서민호·정일형·정성태·김재광 등 탈당계를 낸 윤보선계 강경파 6명의 의원직 자동 상실을 공표했다. 바로 다음날인 8월14일 공화당은 단독국회를 열어 ‘한일국교조약’을 비준해 버렸다.
그렇게 한일협정 반대운동은 무위로 끝났고, 기약 없는 ‘백수’ 신세였던 나는 허탈할 뿐이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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