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5년 2월18일 낮 12시 한일회담의 일본 대표인 시나 에쓰사부로 외상이 청와대를 방문해 박정희 대통령과 환담을 나누고 있다.(왼쪽 사진) 같은 날 비슷한 시각 서울 종로 파고다공원에서 ‘6·3동지회’ 학생들이 ‘이등박문 망령 성토 학생대회 을사기원 61년 회갑기념’ 펼침막을 내걸고 ‘6·3 계엄령’ 이후 최초로 회담 반대 시위를 재개했다.(오른쪽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3)
1964년 ‘6·3 계엄령’ 이후 가을학기 들어 학생들의 한일회담 반대운동이 잠잠해지자 박정희 정권은 회담을 서둘렀고, 일본 쪽은 더욱 고자세로 나왔다.
시나 에쓰사부로 일본 외상은 64년 12월 “독도문제 해결을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해 한국 쪽이 이에 응하는 시점에 해결하겠다”고 말했다. 새로 일본 수석대표가 된 다카스기 신이치는 취임 기자회견에서 “일본은 형이 된 기분으로 일한회담에 임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이 조선을 통치한 것은 분명히 조선을 더 낫게 하려고 한 일이었다. 일본이 20년쯤 더 조선을 지배했더라면 좋았을 것이다”고 말했다.
다카스기뿐 아니라 역대 한일회담의 일본 대표들은 번번이 한국과 한민족을 비하·모욕하는 발언을 했다. 하지만 우리 쪽은 한번도 이들에 대해 교체 요구를 하지 못했다. 또 한국은 일제의 한반도 식민지배에 대해 사과하라는 요구도 한번 못했다.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100만명에 이르는 강제징용자, 5만 학도병, 일본군 위안부 피해 조선 여성들에 대한 배상 요구도 애매모호한 ‘청구권 자금 합의’ 속에 파묻혀 갔다. 재일동포들의 신분 보장 요구 역시 묵살되었다. 평화선 문제도 일방적으로 양보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렸다.
그즈음 시나 외상이 65년 2월17일 방한한다는 정부 발표가 나왔다. ‘6·3 계엄령’으로 구속되었다 풀려난 학생들이 결성한 ‘6·3동지회’가 즉각 한일회담 반대집회 재개의 첫 깃발을 들었다. <경향신문>(2월18일치 석간)은 “18일 하오 1시 반쯤, 6·3동지회 학생 30여명이 종로 파고다공원 안 팔각정에서 성토대회를 열었다. 이들은 동국대 정치과 3년 김경남군이 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이등박문 망령 성토 학생대회 을사기원 61년 회갑기념’이라고 쓴 펼침막을 내걸었다. (…) 종로경찰서는 학생 7명을 연행해 갔는데 그 명단은 이경우(고려대 법과), 김병길(고려대 법과), 박동인(동국대 법과), 김경남(동국대 정외과), 이재우(경희대 정외과), 김보환(숭실대 사학과), 이우영(건국대 경제과) 등이다”라고 보도했다.
박정희 정권 시절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크게 보아 세 단계로 나눌 수 있다. 첫 단계는 이미 기술한 64년의 ‘3·24~6·3’ 투쟁이다. 둘째 단계는 서울에서 이동원 외무와 시나 외상이 ‘한일기본조약’에 가조인한 65년 2월20일부터 6월22일 도쿄에서 ‘한일기본조약’에 정식으로 서명할 때까지 전개한 반대운동이었다.
이때부터는 고교생들의 참여가 부쩍 늘었다. 65년 3월26일에는 배재·중동·성북·동도·보성·경기고 등 서울의 고교생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이날치 <동아일보> 석간은 경기고생 1500명의 시위를 7면 머리로 싣고 사진까지 곁들였는데, 사진설명에 “이것이 민족적 민주주의더냐, 낯선 자본 앞에서 외치는 내일의 담당자들”이라고 썼다. 자료집 <아! 문리대>에서 이 기사를 소개해놓은 송철원은 당시 경기고생 시위를 고 조영래 변호사가 주도했다고 증언하고 있다. 이날 마포고, 숭실고, 대광고, 양정고, 서울고, 원주 대성고, 대구 계성고, 영남고, 경북대 사대부고, 순천 매산고, 익산 함열중고, 광주일고, 광주 숭일고, 광주고, 보문고, 목포고 학생들도 시위를 벌였다.
야당과 재야세력의 ‘대일굴욕외교 반대 범국민투쟁위원회’도 전국 순회 성토대회에 나섰다. 대학생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법대·상대·사범대·문리대·농대·치대 등 대부분의 서울대 단과대를 비롯해 동국대, 전남대, 경희대, 연세대, 동국대 2부, 성균관대, 고려대, 국학대, 중앙대, 제주대, 외국어대, 중앙대, 이화여대, 전북대, 서강대, 부산수산대, 경북대, 인하공대, 장신대, 대구대, 청구대, 한신대, 단국대, 중앙대, 숭실대, 건국대 등이 시위에 참가했다.
한국내 여론에 아랑곳없이 시나 외상은 “한국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해서라도 한일회담을 종결할 확고한 결심을 하고 있는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고, 이에 화답하듯 65년 4월19일 한국 국방부는 “앞으로 전국 각처에서 한일회담 반대 데모가 심해져 경찰력으로 막기 어렵게 되면, 경찰이 요청 시 수도경비사령부 이외에도 군에서 데모 진압을 지원해 주도록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경찰의 탄압도 점점 더 강화되었다. 이 기간 수십명의 학생들이 구속되었는데, 그중에는 전남대 정동년, 서울대 문리대의 조양(외교학과4)·정탁(철학과3)·최병권(정치학과3)·박지동(˝)·장중웅(˝)·최극언(사학과3), 서울대 법대의 장명봉(법학과3)·임종율(법학과3), 동국대의 곽노형, 부산수산대의 김기홍(증식과3)·김상규(수산경영과3) 등이 있었다.
65년 6월22일 결국 조약이 체결되자 국민들은 셋째 단계로 ‘국회 비준 반대운동’에 돌입했다. 요즘 젊은이들 용어로 ‘알바 신세’였던 나는 65년 학생운동에는 얼굴 한번 못 내밀고, 앉은뱅이 방 안에서 용쓰듯 성원만 보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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