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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언론사 시험 계속 낙방 ‘백수’로 사회 첫발 / 이룰태림

등록 2014-02-02 19:31수정 2018-05-10 11:36

 필자(성유보)는 1965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언론사 공채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사진은 63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문리대 앞 마로니에 나무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학우들을 문리대학보 <새세대신문> 편집장이자 정치학과 동기생 김도현(전 문화체육부 차관)이 스케치 삼아 찍은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이원재·송재윤·박삼옥·안택수, 둘째 줄 왼쪽부터 필자·김영배·박용환·김중태·김지하·박재일(작고), 뒷줄 왼쪽부터 조화유·김유진·백성진·송진혁·이수용·배한용·최혜성 등이다.  사진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 제공
필자(성유보)는 1965년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언론사 공채에 도전했으나 번번이 낙방했다. 사진은 63년 겨울 방학을 앞두고 문리대 앞 마로니에 나무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학우들을 문리대학보 <새세대신문> 편집장이자 정치학과 동기생 김도현(전 문화체육부 차관)이 스케치 삼아 찍은 것이다. 앞줄 왼쪽부터 이원재·송재윤·박삼옥·안택수, 둘째 줄 왼쪽부터 필자·김영배·박용환·김중태·김지하·박재일(작고), 뒷줄 왼쪽부터 조화유·김유진·백성진·송진혁·이수용·배한용·최혜성 등이다. 사진 송철원 현대사기록연구원 이사장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2)
1964년 2학기는 박정희 정권의 계엄령 아래 한일회담 강행과 수배·체포·구속 등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시대도 어수선했지만 내 심정은 참으로 착잡했다.

정신적 방황 상태에서 대학 1·2학년을 보내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려던 참에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발을 담가 대학 후반기를 보내다 보니, 어느새 사회적 독립을 해야 하는 성인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코앞에 닥쳐야 숙제를 하는 천성대로 앞날 대책 없이 대학 4년을 허송한 것이다.

그해 말 나와 중·고교, 서울대 정치학과 동기생인 송진혁(전 <중앙일보> 편집국장), 정치학과 동기생 김학준(전 <동아일보> 회장), 사회학과 동기생 조화유(<조화유 영어>의 저자)가 <조선일보> 수습기자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늘 어울려 다닌 친구들이었기에 “어떻게 나만 모르게 시험을 칠 수 있는가?” 하고 따져 물었더니 그들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문리대 출신이 시험 쳐서 취직할 데가 신문사 기자 말고 어디 있냐? 너는 대학 4년 동안 뭐하고 자빠져 있었냐?”

생각해 보니 특별한 연줄이 없는 한, 문리대 출신이 공채로 들어갈 수 있는 곳이 별로 없었다. 그래도 ‘언론’ 하면 ‘사회의 목탁’이니 ‘권력의 파수견’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4월 혁명’으로 민주주의의 세례를 받았다고 믿어온 나는, 직접 정치에 나설 형편이 못 된다면 ‘권력을 감시하고, 국민의 알 권리를 지키는’ 언론인도 아주 매력적인 직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기자 시험에 도전해 보았다. 보기 좋게 낙방이었다. ‘언론고시’라 불릴 만큼 경쟁이 치열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조선일보>와 <한국일보>는 이례적으로 가을에 이어 봄에도 기자를 뽑았다. 64년 겨우내 ‘언론고시’ 준비에 몰두했다. 65년 봄 다시 <조선일보>에 응시해 1차 필기시험은 합격했다. 기자 선배가 된 송진혁이 “1차 성적은 비교적 좋단다. 면접에서는 군대 문제를 물어볼 테니, 대답 잘 해라”고 귀띔을 해줬다. ‘한일회담 반대 시위’로 홍역을 치른 박 정권이 언론을 길들이기 위해서 병역미필 또는 병역면제 기자들을 대상으로 재신검을 해서 결격 사유가 없으면 강제징집을 하고 있다고 했다.

그때부터 나는 병역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봤다. ‘30 대 1’이니 ‘50 대 1’이니 하는 좁은 문을 통과하기가 좀 어려운가? 이번 기회를 놓치면 영영 기자가 될 길은 없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제가 알아서 문제 생기지 않게 병역면제를 받겠습니다”라고 대답할까 하는 유혹이 생겼다. 하지만 끝내는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국방의 의무’도 다하지 않은 자가 ‘권리’만 주장할 수는 없다”는 원론에 더하여, 제대로 된 언론인이라면 권력과의 갈등이 없을 수 없는데, “스스로 거리낄 만한 행동을 한 언론인이 권력에 당당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었다.

과연 <조선일보> 면접시험관들은 내게 단 한 가지 질문만 던졌다. “군대 문제는 어떻게 할 것이냐?” 내 대답은 이랬다. “대한민국 남자로서 군에서 필요하다고 하면 갔다 와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예상대로 낙방했다.

65년 가을 징집명령서가 날아왔다. 그런데 66년 7월에 입대하라니 그때까지 1년 가까이를 실업자로 보낼 수밖에 없었다. 사회생활의 첫발을 실업자로 보내는 괴로움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더군다나 ‘우골탑’(牛骨塔)이라는, 부모가 소 팔아서 대준 비싼 등록금으로 대학을 다니고도 취직을 못하는 농촌 출신 대졸자의 참담한 심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다.

요즈음은 좀 변하고 있는 듯도 하지만, 우리 민족은 ‘조선왕조 500년’ 이래 오랫동안 ‘남존여비 사상’에 찌들어 있었다. 내가 청소년 시절 우리 집은 정미소를 운영해 경산에서 “그래도 밥은 먹고 지낸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8남매 자식 모두를 대학 보내기는 버거웠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4남4녀 중 딸들은 교육의 희생자가 되었다. 바로 손위 누나와 셋째 여동생은 대학을 못 갔고, 둘째와 넷째는 학비 부담이 덜한 교대를 선택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이런 형편에 졸업하고도 집에서 생활비를 타 쓸 수는 없었다. 염치 불고하고, 불광동에 살던 셋째 삼촌댁에서 1남3녀 사촌 사이에 얹혀살았다. 사촌 남동생과 한방을 썼고, 나보다 두 달 늦게 태어나 동생이 된 걸 억울해하던 맏딸 성정숙은 서울대 문리대 사학과 61학번으로 대학 생활을 나와 같이 했다. 그는 훗날 <문화방송> 프로듀서로 사회생활을 하다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가 한때 <뉴욕중앙일보> 편집국장을 지냈다. 그나마 ‘중고생 과외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용돈을 벌며 65년 한 해를 ‘백수’로 보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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