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6월3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한일회담 반대를 요구하는 학생과 시민 수만명이 청와대 진출을 시도하며 공수부대와 대치하고 있다.(왼쪽 사진) 박정희 정권이 6월3일 저녁 8시를 기해 서울지역에 비상계엄을 선포한 뒤 6월4일 오전 세종로 거리에는 계엄군만 삼엄한 경계를 서고 있다.(오른쪽 사진)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21)
1964년 5월20일 서울대 문리대 축제에서 ‘민족적 민주주의 장례식 시위’로 연행된 학생들의 구속영장이 대거 기각되자, 육군 공수부대 군인 13명이 무장한 채 법원으로 난입하더니 급기야 영장담당 양헌 판사의 집에까지 몰려가 사법부를 협박하는 ‘초유의 사건’이 일어났다. 5월21일 새벽 중앙정보부가 학원프락치 사건을 폭로한 문리대 4학년 송철원을 납치 고문한 사건까지 알려지면서 문리대 학생회장 김덕룡을 비롯한 40여명이 5월30일부터 단식농성에 돌입했다. 참가자는 계속 늘어났다.
마침내 6월3일 그동안 곳곳에서 술렁이던 대학생·고교생들이 전국적으로 일제히 들고일어났다. 이른바 ‘6·3 사태’다.
<한일협정반대운동(6·3운동) 사료총집>(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2013)을 보면, 6월3일 서울대·고려대·연세대·단국대·동국대·성균관대·중앙대·한양대·홍익대·건국대·경희대·한신대·숭실대·충남대·충남대 농대 등의 대학생과 청주상고·제주상고 등 고교생 5만여명이 거리로 나왔다. 특히 서울에서는 학생·시민 1만여명이 세종로 일대에 집결해 오후 3시부터 중앙청 앞에서 경찰의 최루탄에 투석전으로 대치하다가, 오후 7시 반쯤 청와대 앞까지 진출했다. 박정희 정권은 공수부대를 동원해 청와대를 방어하더니 밤 9시 반 무렵 서울 일원에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이튿날 일단 거리시위가 잠잠해지자, 계엄사령부는 시위 주동자들을 영장 없이 연행·체포·구금하고 언론 검열을 강화하는 한편, 주동 학생들에 대해 대대적인 수배령을 내렸다. 하지만 6월4일에도 부산대·동아대·전남대·조선대·춘천농대·목포동광중고·인천공고 등 지역에서는 시위를 멈추지 않았다.
주요 수배자 명단을 보면, 서울대 문리대에서 김지하(미학과3)·김덕룡(사회학과4)·박재일·김정남(정치학과4)·송철원(˝)·이문승(˝)·손정박(˝4)·박삼옥(˝3)·최혜성(철학과3)·조봉계(사회학과4)·이원재(˝)·이현배(사학과3)·김병석(식물학과2), 서울대 법대의 정정길(행정학과4)·조해녕(˝)·김정용(˝)·김병만(행정학과2)·오낙준(법학과1), 서울대 사대는 김각(일반사회과2) 등이다. 고려대에서는 박정훈(정치과4)·최장집(˝)·김재하(법과4)·이명박(상과4)·정성헌, 성균관대는 정일룡(정치과4)·이성구(정치과2)·송영삼(경제과4)·임동철(동양철학과2)·오성섭(중국문학과2), 건국대는 유동원(법과4)·박상채(정치과4)·이태우(경제과4), 한양대는 이정재(섬유과4)·이기문(원자력학과3)·김용달(토목과4)·이길호(법학과3), 동국대는 박희부(법과4), 숭실대는 김보환(사학과4), 홍익대는 신정섭(회화과4) 등이다.
송철원은 끝까지 도피에 성공한 자신 말고는 모두 다 구속되었다고 기억했다. 나는 B급·C급 수배자 명단에 들어 있었는데, 경산 집에 가려다 경찰에 붙잡힐 뻔한 위기를 무사히 넘기고 유야무야될 때까지 숨어 지냈다.
이어 6월15일 계엄사령부는 <동아방송> 방송부장 최창봉, 뉴스실장 고재언, 외신부장 이종구, ‘앵무새’ 프로 담당 김영효, 제작과장 조동화, 편성과장 김윤하 등 6명을 ‘반국가단체 찬양 고무, 내란 선동, 불법집회 방송’ 혐의로 구속했다.
계엄사령관 민기식은 6월18일 계엄령 위반 구속자가 348명이라고 발표했고, 이날 계엄사 군법회의는 김중태·현승일·김도현을 내란죄로, 김중태를 숨겨준 손흥민(당시 49)을 범인 은닉죄로 기소했다. 7월말까지 군법회의에 의해 150명의 고교생과 대학생이 구속·기소됐고, 352명은 학사징계를 당했다.
박 정권은 계엄령으로 반대 여론을 억누른 채로 그해 연말까지 3가지 정책을 밀어붙였다. 한-일 통상회담·무역회담·어업회담 등을 잇따라 연 데 이어 12월3일 ‘제7차 한일회담 1차 본회담’을 열었다.
한편으로 박 정권은 한일회담 반대운동을 용공으로 몰아갔다. 경찰은 “공산주의자 김정강(서울대 문리대 3학년)의 메모 노트를 압수했다”고 발표하고, 김정남(전 청와대 교육문화수석) 등 학생운동가 여러 명을 연행·수사했으나, 김정강과 모의했다는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 그럼에도 내무부 장관 양찬우는 기자회견에서 “한일회담 반대운동은 김정강이 조직한 ‘불꽃회’가 배후조종한 적색활동”이라고 발표했고, 언론은 이를 대서특필했다.
중앙정보부장 김형욱은 8월14일 “북괴의 지령을 받고 대규모 지하조직을 만든 인민혁명당 사건을 적발해 57명 중 41명을 구속하고 16명을 수배 중에 있다”, “남파간첩 김영춘, 민주민족청년동맹 경북도 간사장이던 도예종 등이 발기인대회를 열어 인민혁명당을 발족했고, 3·24 학생 시위가 일어나자 불꽃회 간부 등을 포섭해 배후에서 현 정권 타도와 국가반란을 음모했다”고 말했다. 이른바 ‘1차 인혁당 사건’이다.
집권여당인 공화당은 8월2일 단독국회를 열어 ‘언론윤리위원회법안’을 통과시키는 한편 학원 장악을 위한 ‘학원보호법’도 상정했으나 제정에는 실패했다. 박정희는 ‘계엄령 독재’에서 ‘독재의 제도화’로 점점 치닫기 시작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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