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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서울대 문리대 ‘민비연’ 2년만에 강제해체 / 이룰태림

등록 2014-01-27 19:35수정 2018-05-10 11:34

1964년 봄부터 65년 여름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필자(성유보)도 참여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주도로 이뤄졌다. 사진은 훗날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된 김중태 등 민비연 사건 피고인들이 68년 11월22일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한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1964년 봄부터 65년 여름까지 줄기차게 이어진 서울대 문리대생들의 한일회담 반대 투쟁은 필자(성유보)도 참여한 민족주의비교연구회(민비연) 주도로 이뤄졌다. 사진은 훗날 동백림(동베를린) 사건에 연루된 김중태 등 민비연 사건 피고인들이 68년 11월22일 항소심 선고 공판에 출석한 모습. 사진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제공
이룰태림(성유보)-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19)
한국전쟁 와중인 1951년 이승만 정권부터 장면 내각, 박정희 군사정권을 거쳐 14년 동안 끌어온 ‘한일 국교회담’이 박 정권에 의해 65년 6월22일 조인되고 8월14일 국회에서 비준되었다. 한국과 일본이 2차 세계대전 이후 최초로 공식 국교를 맺은 것은 한민족 전체에 ‘6·25’ 이후 가장 큰 정치적 경제적 국제적 변화를 가져올 전환점이었다.

그런데 박 정권의 한일회담 교섭 과정에 큰 문제가 드러났다. 한국 쪽이 일본에 굴욕을 당하고 있었다. 그 첫째 증거는 한국의 김종필 중앙정보부장과 오히라 마사요시 일본 외상이 62년 11월12일 교환한 이른바 ‘김-오히라 메모’였다. ‘김-오히라 메모’를 요약하면, 첫째 일본은 한국에 무상으로 3억달러를 10년간 지불하되, 둘째 경제협력 명목으로 정부 차관 2억달러를 연리 3.5%에 7년 거치 20년 상환 조건으로 10년간 제공하며, 셋째 민간 상업차관으로 1억달러 이상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그밖에도 쿠데타로 집권한 박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 탓에 한국은 회담 과정에서 비굴할 정도로 저자세를 보이고 있었다.

64년 봄부터 65년 여름까지 서울대 문리대생들은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박 정권과 전면적인 투쟁을 벌였다. 그 바람에 나 역시 ‘졸업 후 사회진출’에 대한 아무런 계획도 없이 마지막 대학 1년을 보내게 되었다.

‘한일회담 중단’을 가장 먼저 요구한 것은 재야 인사들이었다. 김병로·윤보선·허정·이인·이범석·장택상·김도연·김준연·박순천·백두진·전진한·김법린·정일형 등 13인은 63년 5월1일 “한일회담을 선거로 새로 출범할 민간정부에 넘기라”는 성명을 냈다. 뒤이어 재야 인사들과 야당은 ‘한일문제 범야투쟁위원회’를 결성했다.

그해 가을 출범한 문리대의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민비연)에서도 한일회담을 가장 중요한 현안 문제로 삼았다. 민비연은 63년 10월7일 서울대 문리대 강당에서 50여명의 창립회원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대 사회학과 황성모 교수를 지도교수로 삼아 학생처에 정식 등록하고 발족했다.

민비연은 창립선언문에서 “고립적 일방적 전근대적 강의의 맹점을 탈피하고 여러 나라의 민족주의를 비교·연구함으로써 민족주의에 대한 과학적 인식의 토대를 마련하여 민족사적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한국적 민족주의의 관념을 정립하겠다”고 밝혔다. 그리고 가능한 한 합법적인 범위 안에서 학생운동의 기반을 넓히고, 둘째 연구발표회나 세미나를 통해 학술적 이념적 지표를 확립하며, 셋째 민정이양에 대비한 학생운동의 새 방향을 정립한다는 활동 목표를 세웠다.(<한일협정 반대운동(6·3 운동) 사료총집>,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3년)

민비연의 초대 집행부는 대부분 정치학과생이었다. 회장 이종률(<동아일보> 기자·유정회 국회의원 지냄), 총무부장 박범진(<조선일보> 기자·국회의원 지냄), 연구부장 김경재(국회의원 지냄) 등은 정치학과 4학년생이었고, 기획부장 김승의 밑에 정치학과 3학년 동기인 권근술과 성유보(필자)가 차장으로 선임되었다.

민비연은 출범 직후 한일회담의 막후 실력자였던 김종필 당시 공화당 의장을 초청해 토론회를 열었다. 나도 토론자로 참석해 “공화당이 주장하는 민족적 민주주의에 북쪽 겨레도 포함되는가?”라고 물은 기억이 남아 있다. 하지만 김종필은 즉답 대신 “우리의 민주주의는 오직 자유민주주의다”라고만 말했다. 결국 북한과는 대화하지 않겠다는 뜻이어서 우리를 실망시켰다. 이 토론에 대해 김종필 자신은 “학생들에게 당했다”고 말한 적이 있는 데 반해, 후일 학계 소장학자들 사이에서는 “토론회가 김종필의 선전장이 되어 버렸다”는 비판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편으로 토론회는 “박 정권이 한일회담을 통해 한국 자본시장을 일본 자본에 예속시킬 것”이라는 경계심을 강화시키는 효과가 있었다.

63년 말, 4학년 졸업이 가까워지자 김중태가 2대 회장을 맡았다. 나는 연구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64년 3월 새 학기가 되자 김중태는 ‘한일회담 반대운동’에 앞장서기로 하고 회장직을 사퇴해 3대 회장을 현승일이 맡았다. 민비연을 연구 동아리로 계속 유지시키려는 속셈이었다. 그런데 현승일도 한일협정 반대 시위로 구속됐고, 2학기에는 조봉계(사회학과 4년)가 4대 회장을 이어받았다. 65년 겨울에는 정치학과 3학년 박지동(훗날 <동아일보> 기자, 동아투위 위원, 광주대 교수 지냄)에게 5대 회장직이 넘어갔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역시나 박 정권은 민비연을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명색이 연구부장인 나는 연구발표회나 학술대회 제대로 한번 못 해보았고, 박지동도 제대로 활동 한번 못한 채 감옥만 가게 되었다. 5대 회장 박지동은 65년 3월 27일 민비연 주최 학술강연회를 열었다는 이유로 구속됐다. 이때 초청연사는 시인 조지훈, 언론인 송건호, 김성두, 조동필 고려대 교수였다. 민비연은 65년 9월16일 박 정권에 의해 강제로 해체되었다.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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