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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의 기억 / 이룰태림

등록 2014-01-19 19:18수정 2018-05-10 11:30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주도로 진행된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현장 설명회에서 희생자 유족들이 뼈만 남은 주검들을 살펴보고 있다. 필자(성유보)는 9살 때인 1950년 여름 당시 경산의 고향 마을에서 코발트광산으로 실려 가는 ‘흰옷 입은 어른들’의 트럭 행렬을 목격했다. 사진 영남대 경산 광산 유적발굴단 제공
2007년 9월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주도로 진행된 경산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유해발굴 현장 설명회에서 희생자 유족들이 뼈만 남은 주검들을 살펴보고 있다. 필자(성유보)는 9살 때인 1950년 여름 당시 경산의 고향 마을에서 코발트광산으로 실려 가는 ‘흰옷 입은 어른들’의 트럭 행렬을 목격했다. 사진 영남대 경산 광산 유적발굴단 제공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⑬
1950년 여름 초등학교 2학년생, 내 어린 눈에는 그저 멀리 풍경화처럼 스쳐 지나갔던, ‘트럭에 실려 가던 흰옷 아저씨들’은 누구였고, 어디로 실려 갔으며, 어떻게 되었을까? 53년 정전협정이 체결되어 한반도에 총성이 멎자, 그 트럭에 실려 갔던 ‘흰옷 어른들’이 인근 ‘경산 코발트광산으로 끌려가 총살되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일제가 운영하다 폐광된 그 굴에서, 내가 보았던 그 어른들이 모두 집단학살당했던 것이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이후로도 오랫동안 나는 내 고향 경산에서 일어난 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사건에 별 관심을 기울이지 못했다. 최근에야 한겨레신문사 초대 부사장을 지낸 임재경 선배의 주선으로, 2005년 ‘영남대 경산 광산 유적발굴단’ 단장을 맡아 50여구의 유해를 발굴해냈던 박현수 명예교수(문화인류학과)를 만나 ‘진상’을 확인할 수 있었다. 2010년 정년퇴임한 박 교수가 건네준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의 <경산코발트광산 민간인 학살 관계 보고서>(2010년)에는 믿기지 않는 내용들이 담겨 있었다.

‘49년 10월 이승만 정권은 남한 내 공산주의 세력 약화를 위해 과거 좌익에 몸담았던 사람들을 전향시킨다는 목적으로 ‘국민보도연맹’을 전국적으로 결성시켰다. 그러다 한국전쟁이 터지자 경산시·청도군·대구시·영동군 보도연맹원 및 요시찰 대상자 중 많은 수가 예비검속되어 경찰서 유치장 및 인근 창고 등지에 구금돼 갑·을·병으로 분류되었다. 이 가운데 갑·을로 낙인찍힌 사람들은 대구형무소의 재소자들과 함께 50년 7월 중하순 무렵부터 8월 중순까지 경산 코발트광산(경산시 평산동 산42-1) 등지에서 군경에게 집단사살되었다. 민간인 희생자는 1800명을 넘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규모는 확인되지 않았다. 희생자들은 비무장 민간인이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들은 남하하는 인민군에 협조할 위험이 있는 잠재적 적으로 간주되어 사살된 것이었다. 직접적인 가해기관은 각 지역 경찰서, 경북지구 미군방첩대(CIC) 및 각 지역 방첩대 파견대, 국군 제22헌병대이다.’

보고서는 “이들에 대한 학살이 내무부-치안국-경북지방 경찰국-각 경찰서, 육군본부와 경남북지구 계엄사령부로 이어지는 지휘명령체계 속에서 이루어졌으며”, “국민의 생명과 재산 보호 임무를 수행해야 할 군과 경찰이 범죄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민간인들을 예비검속해 사살한 것으로, 명백한 불법 행위이다”라고 결론짓고 있다.

박의원 경산코발트광산 유족회장은 2013년 10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사건 현장보전 및 유골안치를 위한 전국 토론회’에서 “경산 코발트광산 유해발굴이 6차례 진행되었는데, 1차는 2001년 2월 유족회와 <문화방송>(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책임피디 이채훈) 제작진에서, 2차는 2002년 유족회 자체 발굴, 3차는 2005년 8월16일부터 11월9일까지 유족회와 경산 시민단체들이 공동으로, 2007년부터는 ‘진실화해위’ 주도로 4~6차 발굴작업이 진행되었다”고 밝혔다.

이 토론회는 경기도 고양시가 주최하고 금정굴인권평화재단이 주관한 자리였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고양지역에서도 민간인 학살의 비극이 벌어졌던 것이다. 고양시민회가 2011년 12월 말 펴낸 <금정굴의 진실을 찾아서> 보고서를 보면, ‘금정굴 사건은 50년 10월9일부터 31일까지 고양·파주 지역 153명 이상의 주민들이 부역 혐의자 및 그 가족이라는 이유로 고양시 일산서구 탄현동 황룡산의 금정굴에 끌려가 집단총살당한 사건’이다. 희생자의 아들인 이병순, 금정굴유족회 부회장 이경숙, 금정굴인권평화재단 운영위원장 유왕선과 연구소장 신기철, 그리고 여순유족회 전 총무 김화자 등의 증언을 보면, 금정굴 말고도 한강 이산포와 산남리 강변, 덕이동, 도내동 뒷산, 성석동 귀란골 등 여러 곳에서 집단학살이 자행돼, 그 희생자가 1000명 이상일 것으로 추산된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6·25’ 민간인 학살 사건은 전국적 현상이었다. 진실화해위는 2007년부터 3년 동안 전국 13개 민간인 학살 암장지에서 약 1600구 이상의 유해와 6000여점의 유품을 발굴했는데, 당시 조사를 신청한 지역만도 전국적으로 154군데나 되었다. 그나마 이명박 정권 들어 예산 지원이 끊겨 발굴작업이 중단된 상태다.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과 서중석 교수는 민간인 학살 규모를 최소한 100만명 이상으로 추산한다.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들을 아무런 법적 절차도 없이 집단학살하고, 정전 이후 60년이 지나도록 이 ‘비극적 참극’에 대한 진상규명과 피해자 가족들에 대한 위로와 보상이 없다는 것은 우리 스스로 “우리는 야만족”이라고 광고하고 있는 꼴이 아닌가.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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