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2·28 대구 고교생 연합시위’를 주동했던 경북고생 이대우군은 ‘3·15’ 부정선거에 항의한 ‘마산 시민 의거’가 터지자 경찰에 강제납치되
어 동해안으로 끌려다녀야 했다. 사진은 별세하기 2년 전인 2007년 부산대 정년퇴임식 때의 이대우 교수.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⑪
일찍이 함석헌 선생님의 말씀대로, 독재사회를 막는 지름길은 시민 또는 국민이라 불리는 “깨어 있는 백성”이다. 그러니 백성을 깨어나게 하고, 이들을 효과적으로 조직해 독재자와 맞서게 하는 게 민주화운동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대구 2·28’을 주도한 이대우는 고등학생 때 이미 민주화운동가의 반열에 들어갔다고 할 수 있다.
훗날에야 알게 됐지만, 경찰은 ‘3·15 마산 시민 의거’가 일어나자, 이대우를 강제로 납치해 이승만이 퇴진할 때까지 형사 3명과 동행시켜 동해안 포항·영덕·울진 일대를 ‘유람’하고 다녔다. 이대우가 사라지자 대구의 고교생들은 지휘자 없는 오합지졸이 되어 ‘3·15’, ‘4·19’ 그리고 4월26일 이승만 퇴진 때까지 내내 방관자, 구경꾼 신세였다.
‘4월 혁명’이 성공하자 대구·경북의 초·중·고교에서는 ‘교원노조’ 열풍이 불었다. ‘교육의 민주화’와 ‘교원들의 정치적 중립’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졌다. 하지만 60년 5월 허정 과도내각에 이어 들어선 민주당의 장면 내각은 교원노조를 인정하지 않았다. 2학기를 앞두고는 주도 교사 300명을 전근시켰다. 2학기가 시작되자 교원노조는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승만 정권 때 ‘정치적 줄세우기’로 선생님들이 곤욕을 치르는 모습을 목격해온 우리는 단식농성을 전폭 지지했다. 전교생이 교실에서 닷새간 농성을 했다. 그러나 교원노조 지도부는 이듬해 박정희 쿠데타 이후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대부분 투옥되고 결국 교원노조는 해체됐으니 참으로 슬픈 일이다.
“법과대학을 들어가 판검사가 되어라!” 아버님의 은근한 압력에도 불구하고 공대에 가려고 생각해왔던 나는 고3 때 정치학과로 진로를 바꿨다. 전적으로 ‘4월 혁명’ 때문이었다. ‘민주정치란 무엇인가?’ ‘민주정치는 어떻게 현실화되는가?’를 한번 제대로 공부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아버님은 법대 지망을 바라셨으되 강요는 하지 않으셨다. 하지만 대신 내가 자원한 대학에 무조건 합격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생겼다. 나는 고3 때 평생 공부를 다 해버릴 것처럼 열심히 노력했다. 그리고 61년 봄 서울대 문리대 정치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다.
공자 말씀의 ‘입지’(立志) 나이였던 고교 2~3학년 때 겪은 ‘4월 혁명’은 내게 ‘민주주의’와 ‘언론 자유’의 꿈을 깊이 새겨주었다. 이 ‘입지의 시대’에 이대우가 준 영향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한다.
이대우가 세상을 떠난 지 4년이 넘었다. 만학으로 외국어대를 나온 그는 78년부터 부산대 교수로 재직하면서 후학을 양성하다가 퇴임 2년 만인 2009년 혈액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스승의 죽음을 안타깝게 여긴 부산대 사범대 윤리교육과 제자들은 김홍수(영산대 교수)를 중심으로 ‘고 이대우 교수 1주기’를 맞아 두 권의 유고집, <2·28은 살아있다>와 <지휘자 없는 합창>(세종출판사)을 출판했다. 고향 친구들인 임병춘(고 김달호 사회대중당 의원 비서관), 김광, 박광현, 박병언(신라교역 부회장), 권준화(무역협회 뉴욕지사장, 뉴욕코리아센터 대표이사), 전화섭(개인사업), 이원영(전 브라질·스페인 대사), 윤종명(중국 무역업), 윤정묵(전 포철 상무), 유경훈, 민태식(전 석유공사 임원), 유시건(전 정신문화연구원 지냄), 외대 후배 심의표(전 한국방송 보도본부장), 고 정주헌(전 탄자니아 대사) 등은 그의 기일과 ‘4·19’ 기념일 때마다 이대우의 가족과 함께 수유리 ‘4·19 묘소’에 묻힌 이대우를 참배해왔다. ‘이사모’라고나 할까. 지난해 4주기에는 경북고 42회 동창회장 임대용(전 브라질 대사)과 경북고 서울동창회 총무 김혁권(전 농협 지점장), 동문 박충경(개인사업) 등이 함께해주었다.
임대용 회장은 추모사에서 “1960년 2월28일을 우리는 영원히 잊을 수 없습니다. 자유당 독재정권에 용기 있게 항거할 계획을 세우고 이를 실행한 형이야말로 선구자였으며 투사였습니다. 2·28 민주학생운동은 4월 혁명의 출발점이자 한국 민주화운동의 효시였습니다. (…) 형이 그토록 염원하던 남북통일을 기원합니다”라고 고인을 기렸다.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