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 ‘4·18 고대생 습격사건’ 이후 십대 중학생들까지 뛰쳐나와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마라’고 외칠 정도로 민심이 돌아서자 4월26일 결국 이승만 대통령은 ‘하야 선언’을 발표하고 하와이 망명길에 올랐다. 필자(성유보)는 ‘4·19혁명’을 세계적으로 보기 드문 성공한 민중혁명이라고 평가한다. <한겨레> 자료사진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⑩
1960년 4월19일 ‘피의 화요일’부터 줄기차게 계속되던 시민들의 봉기에 기름을 부은 것은 4월25일의 ‘교수 데모’였다.
4월25일 오후 서울지역 대학교수 258명은 동숭동 서울대 의대 교수회관에 모여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5시30분부터 거리시위에 나섰다. 뒷날 이 시국선언은 고려대의 이상은·조용만·이종우·정재각·김경탁·김성식·이항녕·변희용·박희성·손명현 교수, 연세대의 정석해·조의설·권오돈 교수, 서울대의 이희승·최재희·김증한 교수, 성균관대의 조윤제 교수, 중앙대의 이종극 교수, 동국대의 김영달 교수, 외국어대의 유진 교수 등이 주도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교수들이 그날 거리로 나선 것은 시국선언을 마칠 무렵 동국대 김영달 교수의 즉석 제안에 따른 것이었다. 교수들이 “이승만 정권 물러가라”,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며 국내외 기자 수십명과 함께 서울대 의대 교문을 나서자 순식간에 학생과 시민들이 합류했다. 종로2가에 이르자 1만여명,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에 왔을 때는 수만명으로 늘어났다.
오후 7시 국회의사당 앞에서 고려대 이항녕 교수가 시국선언문을 다시 한번 낭독한 뒤 교수단은 해산했다. 하지만 군중들은 곳곳에서 시위를 계속했다. 경찰은 내무부 앞과 이기붕의 집 앞에서 시위하던 군중들에게 이날도 총을 쏴 10여명이 숨지고 200명 가까운 부상자가 발생했다.
교수단의 시위는 정치상황을 급변시켰다. ‘한국 지성을 대표하는’ 학계까지 반이승만 대열에 동참했다는 상징성과 “이승만 퇴진”을 처음으로 요구했다는 점에서 국민들 사이에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승만 독재에 대한 첫 반기였던 ‘대구 2·28’의 구호는 “학생을 정치도구화하지 말라”였다. 그다음 학생들은 “부정선거 규탄”을 외쳤다. ‘3·15 마산 시민 의거’에서는 “부정선거는 무효다”를, ‘4·19’ 때는 “재선거 실시하라”로 구호가 바뀌었다. 그리고 마침내 교수들이 시국선언에서 불법·부정선거의 최종 책임자이자 최대 수혜자인 이승만 대통령에게 “물러나라”고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다.
결국 4월26일 이승만 대통령은 훗날 ‘하야 선언’으로 불리게 되는 담화문을 발표했다. 그는 ‘첫째,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을 사임하겠다. 둘째, 3·15 선거가 많은 부정이 있었다고 하니 다시 선거하도록 지시하였다. (…) 셋째, 선거로 인연한 모든 불미스러운 것을 없이하기 위하여 이미 이기붕 의장에게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나도록 하였다. 넷째, 이미 합의해 준 것이지만, 만일 국민이 원한다면 내각책임제를 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나로서는 신문에 실린 담화문을 몇 번이나 읽어봐도 이승만이 사임을 하겠다는 것인지, 자신이 계속 집권하면서 문제를 풀어나가겠다는 것인지 분명한 뜻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만 그런 게 아닌 모양이었다. 이승만의 담화 직후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있던 시민·학생들은 의회에 보내는 ‘국민대회 결의문’을 채택했다. “국민은 이승만 대통령의 즉시 하야를 원한다”는 등 6개항을 담았다. 이에 국회는 자유당 온건파들도 가세한 가운데 이승만 퇴진을 기정사실화하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1960년대 대한민국은 수십만명이 ‘빨갱이’로 몰리고, 200명 가까운 학생·시민이 죽고, 수천명이 다친 이후에야 겨우 독재자를 퇴진시킬 수 있었다. 당시 한국 사회에서는 독재자에게 “이제는 그만 물러나 주시오”라는 말 한마디 꺼내기가 그토록 힘들었다.
나는 학자가 아니라서 학문적 논리를 개진하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4월 혁명’은 분명히 성공한 혁명이라고 생각한다. 5천년의 역사를 자랑한다는 한민족사에서 우리 국민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권력자를 쫓아낸 적이 ‘4월 혁명’ 이전에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왕조는 여러 차례 바뀌었어도, 그것은 새로운 무장세력이 낡은 무장세력을 몰아내고 등장했을 뿐이었다.
근대 시민민주주의의 전범(典範)으로 여기고 있는 1789년의 ‘프랑스 혁명’도 1799년 나폴레옹의 군사쿠데타로 무너지지 않았던가? 프랑스는 이후 나폴레옹 황제시대, 부르봉 왕조의 복위, 나폴레옹의 조카 루이 보나파르트의 공화정, 그의 변심에 의한 제2제정을 거쳐 1871년 제3공화정이 등장한 이후, 80년 만에야 비로소 완성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사가와 정치학자들은 아무도 프랑스 혁명을 ‘실패한 혁명’이라고 부르지 않았다. 일시적 반동은 왔어도 프랑스 시민들 사이에 뿌리 내린 시민민주주의 정신(자유·평등·우애의 사상)을 어떠한 권력도 지워버릴 수 없기 때문이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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