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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찾아서] 1960년 4월19일 ‘피의 화요일’ / 이룰태림

등록 2014-01-13 19:15수정 2018-05-10 11:28

1960년 4월18일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나섰다가 학교로 되돌아가던 고려대생을 비롯한 시위대는 임화수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명이 희생당했다.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씨가 유일하게 찍어 이튿날 아침 신문에 보도된 이 사진은 ‘4·19 혁명’을 폭발시켰다.
1960년 4월18일 ‘3·15 부정선거 항의 시위’에 나섰다가 학교로 되돌아가던 고려대생을 비롯한 시위대는 임화수를 비롯한 정치깡패들의 습격을 받아 수십명이 희생당했다. 당시 <조선일보> 사진기자 정범태씨가 유일하게 찍어 이튿날 아침 신문에 보도된 이 사진은 ‘4·19 혁명’을 폭발시켰다.
이룰태림-멈출 수 없는 언론자유의 꿈 ⑨
1960년 4월 들어 개학한 대학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긴장한 경찰은 사찰 형사들을 각 대학에 잠입시켜 학생들의 동태를 살피게 했다. 그러나 대학교들을 감시한다고 해서 시위를 예방할 단계는 이미 지나 있었다. 대학 곳곳에서 시위가 모의되고 있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고려대생들이었다. 4월16일로 예정된 신입생 환영회날 시위에 나서기로 묵계가 되었다. 낌새를 알아차린 학교에서는 환영회를 4월18일로 연기했다. 하지만 학생들의 결심은 그럴수록 더 굳어졌다.

4월18일 오후 1시 학생들은 인촌 동상 앞에 모이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3000명이 모였다. 곧바로 선언문을 낭독한 학생들은 안암동 사거리로 나왔다. 경찰의 산발적인 저지망을 뚫고 고대생들은 태평로 국회의사당(지금의 서울시의회) 앞으로 나아갔다. 수천명의 중고생과 시민들이 합류해 오후 5시쯤에는 시위대가 3만명으로 불어났다. 유진오 고대 총장이 직접 나서 시위를 중단하라고 설득했다. 연행된 학생들이 모두 석방되었다는 유 총장의 말을 믿고 학생들은 학교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그런데 오후 6시40분쯤 고대생들과 수만명의 중·고교 학생들, 시민들이 함께 을지로4가 쪽에서 종로 쪽으로 방향을 틀 무렵 100여명의 정치깡패들이 시위대를 습격했다. 학생들이 그들과 맞서 집단난투극이 벌어지자 정치깡패들은 순식간에 사라졌다. 하지만 경찰은 이들을 한명도 잡지 못했다. 아니 잡지 않았다.

이튿날 <동아일보>는 “벽돌과 몽둥이, 쇠뭉치, 갈고리 등을 들고 느닷없이 우리를 습격했다”는 고대생들의 증언과 함께 이날 부상자가 41명이나 된다고 보도했다. 더구나 경찰의 보호 속에 귀교하던 고대생들이 깡패들에게 공공연히 테러를 당했는데도 경찰이 한명의 범인조차 잡지 못했다는 기사와, 폭도들에 의해 부상당해 거리에서 신음하며 쓰러져 있는 학생들의 사진을 본 시민들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4월19일 아침 시민들은 거리로 쏟아져나왔다. ‘4·19 혁명’은 그렇게 일어났다.

그러면 4월18일 고대생들을 습격한 정치깡패들은 누구였을까? 당시 신문들은 이들 정치깡패가 임화수·이정재·유지광이 거느리고 있던 주먹들임을 밝혀냈는데, 그 셋은 경무대(청와대) 경호실장 곽영주의 비호 아래 있었다. 그중 대장 격인 임화수는 이승만의 비호로 중앙극장을 소유하고 ‘반공예술인단’을 만들어 단장 자리를 차지하고, 배우들을 강제동원해 <독립협회와 청년 리승만>이라는 영화를 제작한 인물이었다. 그는 배우 김희갑을 때려 갈비뼈를 부러뜨리는 중상을 입혀 구속되었다가 나흘 만에 곽영주의 입김으로 풀려나기도 했다. 이정재는 동대문시장 일대에서 ‘한국판 마피아’로 군림하고 있었고, 유지광은 그의 수하였다.

민주당은 임화수가 고대생 테러 직후인 4월18일 밤 11시30분쯤 ‘이·유’까지 대동하고 조인구 치안국장을 만나고 돌아갔다고 폭로했다. 조 치안국장은 민주당의 추궁에 대해 “임화수가 아무 연락도 없이 찾아왔으며, 일본 도쿄영화제에 다녀온 인사차 방문한 것”이라고 둘러댔다. 소도 웃을 일이었다.

4월19일은 전국이 시위로 용광로가 되었다. 서울에서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성균관대·동국대·중앙대·한양대·경희대·이화여대·숙명여대 등 대학생들과, 대광고·강문고·동성고·선린상고 등 고교생들, 그리고 시민들이 한데 뭉쳐 경무대, 대법원, 이기붕의 집, 내무부 등으로 몰려다니며 ‘불법·부정선거’를 규탄했다. 부산, 대구, 광주, 인천, 대전, 청주 등 거의 모든 대도시에서도 대규모 학생·시민 시위가 일어났다.

경찰력은 한계를 드러냈다. 경무대로 몰려가던 시위대에 경찰은 발포를 했고 수십명이 죽고 다쳤다. 오후 2시 서울지역에 계엄령이 선포되었고. 오후 4시 반에는 부산·대구·광주·대전·인천 등지로 계엄이 확대되었으며, 오후 5시에는 경비계엄이 비상계엄으로 강화되었다. 군병력의 가세에 자신감을 찾은 듯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본격적으로 발포를 했고 결국 서울에서만 100여명이 목숨을 잃었다. 광주에서는 통행금지령이 내려진 밤 9시쯤에도 야간시위가 벌어져 경찰의 총에 9명이 죽고 74명이 다치는 등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훗날 역사학자들은 이날을 ‘피의 화요일’로 기록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4월20일 이승만은 긴급담화를 발표했다. “급선무는 법과 질서를 회복해 계엄령의 필요성이 없게 하는 일이다”, “질서가 회복되면 정부는 이번 소요사건의 조사에 최대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죄가 있는 사람들은 벌을 받을 것이며, 불평의 주요 원인이 있으면 다 시정될 것이다”, “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고 부상을 당하고 피를 흘렸으며, 많은 손해를 입게 된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하는 바이다.”

하지만 이 모든 비극이 자신의 영구집권 야욕 때문이라는 사실을 외면한 그의 담화로는 이미 불붙은 반정부 운동을 끌 수 없었다.

성유보(필명 이룰태림·71) 희망래일 이사장
정리 도움/강태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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