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사회 노동

미국은 ‘생식독성물질 EGE’ 사용금지…한국선 규제

등록 2014-11-13 22:43수정 2016-03-22 13:47

[심층 리포트] ‘반도체 아이들’의 눈물(하)
한국의 시간은 미국보다 20년 더 늦게 흐른다.

생식독성물질의 관리와 생식보건 문제에 관한 한 한국은 미국보다 20여년 뒤처져 있다. 미국에선 1990년대 중반에 자취를 감춘 에틸렌글리콜에테르(EGE·이하 에틸렌글리콜)가 한국 반도체 사업장에선 여전히 사용되고 있는 까닭이다. 가임기 여성이 노출될 경우 불임과 유산, 기형아 출산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대표적인 생식독성물질인 에틸렌글리콜은 무색의 단맛이 나는 액체로 먹을 경우 치명적이다. 간이나 신장, 중추신경계의 손상을 가져올 수도 있고 심할 경우 혼수상태나 호흡곤란에 의한 사망을 일으킬 수 있는 유해물질이다. 자동차 부동액으로 일상생활에서도 흔히 쓰인다.

동물실험 결과와 더불어 인간에게도 비슷한 생식독성 영향을 끼친다는 점이 드러나 1990년대 미국 반도체 업계에서 퇴출된 에틸렌글리콜은 지금도 한국 반도체 사업장에서 대표적인 휘발성 유기용제로 쓰이고 있다. <한겨레>가 지난 8월에 만난 박민희씨, 이선영씨, 김은지씨(<한겨레> 11월13일치 4면)도 삼성전자 기흥사업장에서 일했을 당시 에틸렌글리콜을 다뤘다고 말했다. 그들은 4~5년 불임을 앓거나 여러 차례 유산했다. 심지어 중추신경계 질환 및 유방암, 유방섬유선종 등에 시달렸다. 고통은 대물림되는 것일까. 그토록 어렵게 가진 아이들은 태어나서 후두엽성 간질을 앓거나 융모종이 전화되어 태어나지도 못하고 적출되었다.

에틸렌글리콜이 고용노동부가 정한 사용금지물질에 포함되지 않은 채 지금껏 사용되고 있다는 점은 정부도 인정하고 있다. 고용노동부 산하 산업안전보건연구원(산보연)은 에틸렌글리콜을 반도체 가공라인에서 노출 가능한 물질로 꼽았다. 그렇다면 관리는 잘되고 있을까. 에틸렌글리콜은 산업안전보건법(산안법)상 특별관리물질도, 산보연이 선정한 생식독성 1급 물질도 아니다. 1급 발암물질 벤젠이 특별관리물질(발암성·생식세포변이원성)과 1급 생식독성물질로 분류돼 규제되고 있는 데 반해, 에틸렌글리콜은 별다른 규제 없이 사용되고 있다.

에틸렌글리콜 여전히 사용
유해성 인정한 정부
특별관리물로 지정은 안해

관련법엔 생식독성 개념조차 없고
노동자 특별검진 항목에도 포함 안돼
산업재해 인정받지도 못해

1980년대 이미 정부가 에틸렌글리콜의 유해성을 발표했던 미국의 경우 1996년 존스홉킨스대학 보건대학원의 유해성 연구 결과가 나오면서 미국반도체협회 차원에서 사용이 금지됐다. 그 이후에도 미국은 생식독성물질의 유해성을 지속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있다. 2000년대 초 안전한 대체물질로 여겨지던 PGES조차 일부 물질들이 암이나 발달장애를 일으킬 수 있다고 밝혀지자, 2004년 6월 캘리포니아주는 주 법률상 이를 발암물질로 규정했고, 화학물질 직업병 데이터베이스를 관리하는 국립과학도서관은 생식독성물질로 등재해 관리에 나선 것이다.

사실 그동안 한국 사회에서 노동자들의 생식보건 문제는 ‘산업재해’로 인정받지 못했다. 산업안전의 근간을 이루는 법이라 할 수 있는 산안법에는 생식독성과 관련한 개념조차 없다. 또 유해사업장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하는 특별건강검진 항목에도 생식독성 관련 조항은 찾아볼 수 없다. 가임기 여성을 방사선이나 유해화학물질이 사용되는 위험한 사업장에 고용할 수 없다고 못박은 근로기준법 65조는, 20~30대 여성이 많은 반도체 사업장을 비춰볼 때 ‘잠꼬대’ 같은 법규가 된 지 오래다. 주로 사고성 재해에 초점을 두고 있는 현재의 산업안전보건 체계 안에서 생식보건 문제는 이처럼 간과되고 있다.

아이비엠(IBM)은 1982년에 이미 임산부 고용 금지와 업무 이동 등을 내용으로 하는 모성보호 규정을 별도로 두고, 태아의 경우 화학물질에 더 취약하기 때문에 더 강한 기준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바 있다. 지난 8월에는 애플이 아이폰과 아이패드 최종 조립 과정에서 발암물질인 벤젠과 노멀헥산을 사용하지 않기로 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5개월 전 미국의 시민단체 ‘그린아메리카’와 ‘차이나레이버워치’ 등의 지적에 따른 것이다. 법적 제도적 장치가 한국처럼 미흡한 상황에서 한국의 반도체 대기업들이 미국의 기업들처럼 자발적으로 에틸렌글리콜 같은 생식독성물질을 규제할 가능성은 많지 않아 보인다. 그나마 벤젠을 비롯해 에틸렌글리콜 등의 생식독성물질 11종의 사용을 자체적으로 규제하면서 산업보건검증위원회를 통해 임직원의 생식보건 문제를 모니터하겠다는 에스케이(SK)하이닉스의 시도가 반가운 이유다.

오승훈 기자 vino@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사회 많이 보는 기사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1.

전광훈 ‘지갑’ 6개 벌리고 극우집회…“연금 100만원 줍니다”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2.

하늘이 영정 쓰다듬으며 “보고 싶어”…아빠는 부탁이 있습니다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3.

‘윤석열 복귀’에 100만원 건 석동현…“이기든 지든 내겠다”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4.

검찰, 김정숙 여사 ‘외유성 출장’ 허위 유포 배현진 불기소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5.

‘장원영’이 꿈이던 하늘양 빈소에 아이브 근조화환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