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3월 출범한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는 첫 공개 노동자연대조직으로서 노동운동사에 새로운 전기를 제공했다. 이총각도 운영위원으로 참여해 부천노동사목과 연계 활동에 나섰다. 사진은 3월10일 서울 홍제동성당에서 열린 창립대회 모습. <한겨레> 자료사진
이총각-우리들의 대장, 총각 언니 92
1984년 3월10일 한국노동자복지협의회(한국노협)가 출범했다. 서울 홍제동 성당에서 창립대회를 열고 방용석 원풍모방 전 지부장을 초대 위원장으로 선출했다. 최초의 공개적인 노동운동단체인 한국노협은 70년대 민주노조 위원장들이 대부분 참여해 이영순(콘트롤데이타)이 사무국장을 맡고, 운영위원으로는 박순희(원풍모방)·민종덕·양승조(청계피복)·이총각(동일방직)·조금분(반도상사)·최순영(YH무역)·김문수(한일도루코)·남상헌(고려피혁)·조경수(동남전기) 등이 있었다.
이날 대회에서 채택된 ‘노동운동의 새로운 출발을 위한 선언’에서는 ‘유신독재의 어두운 시대에 민주노동조합을 지키려고 몸부림치다 권력의 잔인한 탄압에 의해 희생된 당사자로서, 비조직적이고 고립분산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노동운동의 주체성·통일성·연대성을 드높일 것’을 천명했다.
한국노협의 결성은 두 해 전부터 논의가 시작됐는데, 이총각도 처음부터 함께했다. 80년대의 노동운동은 70년대와는 다른 조직이어야 했다. 단위 노조별 혹은 기업별 노조를 넘어선 연대의 틀을 만들어 노동운동의 전국적이고 통일적인 구심점을 만들어야 한다는 공동의 목표가 있었다. 총각의 부천노동사목은 이들의 모임 장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국노협은 원풍모방 노조가 강제 해산된 뒤, 남아 있던 조합비로 마련한 서울 신길동 삼호연립 101호 ‘원풍의 집’에 사무실을 두고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우선 일반 노동자를 대상으로 임금체불·퇴직금·산업재해·부당노동행위 등에 대한 상담과 더불어 신규 노동조합과 노조 간부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사업을 활발하게 진행했으며 기관지 <민주노동>도 발간했다. 거제·제주·진주·이리·안산 등 전국을 돌며 연간 100여차례의 교육을 진행했다.
특히 앞서 83년 9월30일 결성된 민주화운동청년연합(민청련) 등과 함께 ‘블랙리스트’ 철폐운동과 노동법 개정투쟁을 펼쳐나갔다. 블랙리스트 철폐운동은 83년 12월 태창메리야스 해고노동자들이 노동부 이리(익산)지방사무소 근로감독관 책상 위에 놓여 있는 블랙리스트를 발견하면서 본격적인 투쟁이 전개되었다. 인천에서는 전국섬유노조 전 위원장 김영태에 의해 배포된 블랙리스트 때문에 다른 사업장 재취업이 불가능했던 동일방직 해고자들을 비롯한 여성 노동자 6명(김옥섭·김용자·안순애·신정희·서기화·김복자)이 철폐운동에 앞장섰다.
총각은 부천노동사목 활동을 한국노협의 사업과 공유하며 노동자 문제를 해결해 나가는 데 혼신의 힘을 다했다.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한 노동자의 상담을 받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밤새 논의를 하기도 하고, 노조 결성 때문에 해고당한 뒤 투쟁을 준비하는 노동자들이 노동사목에 모이기도 했다. 총각은 노동사목을 찾은 노동자들을 위해 따뜻한 밥을 지어 먹이고 밤새 그들과 이야기 나누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또 노동자들의 문제뿐만 아니라 동네 부인들의 모임도 진행했는데, 그들은 비디오도 보고 다양한 교육도 받으며 노동사목이 지역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데 많은 도움이 되기도 했다.
오기백 신부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찾아오는 노동자들을 맞느라 잠시도 쉴 틈이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피곤한 상태에서도 노동자들을 늘 반기며 따뜻하게 맞아주는 그 모습이 총각은 정말 보기 좋았다. 그는 노동사목을 통해 노동자들을 만나고 마음이 따뜻한 활동가들과 함께 일을 하는 것이 즐거웠다.
한번은 산재환자들을 중심으로 부활절 미사를 드리고 복음 나누기를 하는데 늘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다니던 한 노동자가 손을 꺼내며 말을 이어갔다. 18살인 그는 사고로 손가락 세 개를 잃고 그것이 속상하고 부끄러워 늘 손을 감추고 다녔다고 했다. 그런데 이제는 예수처럼 자신도 떳떳하게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고 신앙고백을 했다. 오 신부는 두려움과 부끄러움을 극복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는 그의 말을 듣고 자신도 부활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한국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인식하고 그 노동의 현장에서 노동사목을 할 수 있었던 그 시절이 그의 삶에 커다란 축복이었다고 했다.
이총각 구술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이총각 전 동일방직 노조위원장
구술정리 박민나<가시철망 위의 넝쿨장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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