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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노동

여공들의 민주노조,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

등록 2010-10-03 21:27수정 2010-10-04 09:37

얼굴이 하얗던 지부장 방용석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고, 꽃다운 처녀이던 조합원들은 예순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들은 지난 시간들을 역사 앞에 불러내고 싶어했다. 방 전 장관은 “책을 엮은 이유는 이런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어서입니다. 역사를 학자나 지식인에게만 맡기지 말고 민중 스스로가 기록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콘트롤데이타, 동일방직, 청계피복노조 등에서도 조합원들의 삶이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지식인사회와 언론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방 전 장관, 조합원 양승화·박순애·황선금·정선순씨.  이종근 기자 <A href="mailto:root2@hani.co.kr">root2@hani.co.kr</A>
얼굴이 하얗던 지부장 방용석은 어느덧 일흔을 바라보고, 꽃다운 처녀이던 조합원들은 예순을 바라보는 아줌마가 되었다. 그들은 지난 시간들을 역사 앞에 불러내고 싶어했다. 방 전 장관은 “책을 엮은 이유는 이런 민중의 목소리를 담아내고 싶어서입니다. 역사를 학자나 지식인에게만 맡기지 말고 민중 스스로가 기록을 남길 수 있어야 합니다. 콘트롤데이타, 동일방직, 청계피복노조 등에서도 조합원들의 삶이 역사에 기록될 수 있도록 지식인사회와 언론이 지속적인 관심을 가져주었으면 합니다”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방 전 장관, 조합원 양승화·박순애·황선금·정선순씨. 이종근 기자 root2@hani.co.kr
[한겨레가 만난 사람] 원풍노조운동사 펴낸 방용석 지부장·조합원들
청계피복·동일방직과 함께 70년대 대표적 노조
82년 강제해산 뒤에도 20여년 법외노조 활동
“원풍출신 밝혀지면 임금주고 나가라 하더군요”

한국 노동운동사에서 원풍모방 노조는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청계피복, 동일방직, 와이에이치(YH)무역 등과 함께 여성노동자들이 중심이 됐던 70년대 한국 노동운동의 대표적인 민주노조였다. 특히 원풍은 1982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해 조합이 강제해산되고 여성노동자 570명이 집단해고된 뒤에도 법외노조로서 80년대 노동운동의 대열에서 벗어나지 않은 드문 사례이다. 태반이 중졸 정도의 학력을 가진 10~20대 여성들이던 이들은 원풍노조 활동이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된 2001년까지 방용석(65·전 노동부 장관) 당시 지부장(조합장)을 중심으로 가족 같은 유대감을 형성하며 끈질기게 원상회복 투쟁을 전개했다. 지난 9월20일에는 이명박 정부하의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에서도 원풍노조의 강제해산과 블랙리스트에 의한 여공들의 재취업 방해 등이 당시 공권력의 부당한 개입에 의해 저질러진 것임을 재확인했다.

그들이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룬 850쪽 분량의 <민주노조의 전설-원풍모방노동조합운동사>(김남일 엮음)와 조합원 7명의 삶을 추적한 ‘생애사’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를 함께 펴내고 10월9일 오후 5시 서울 대방동 서울여성프라자 국제회의장 1층에서 조촐한 출판기념회를 연다. 이 인터뷰는 출판기념회를 널리 알리고 싶어 기획했지만, 방용석을 비롯한 570명 어린 여공들의 삶을 통해 우리 근현대사의 자랑이자 아픔인 산업화의 길 위에 아직도 생생한 흔적으로 남아 있는 피와 땀과 눈물을 정면으로 응시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인터뷰는 방용석 지부장이 주로 답하고 함께 나온 당시 조합원들이 설명을 덧붙여 자연스레 집단인터뷰 형식이 되었다. 기자가 찾아간 날은 공교롭게도 28년 전 원풍모방노조가 폭력배들에 의해 강제해산된 바로 그날(1982년 9월27일)이었다. 방 지부장 외에 정선순(55) 후임 조합장, 박순애(56), 양승화(54), 황선금(56), 김금자(55) 등 당시 조합 간부들이 함께했다.

방용석 지부장
방용석 지부장

조합원들 시각과 육성 옮겨 노조역사 재출간
“공순이 이미지 나빠 가족·친구에도 숨겼는데
아이들이 엄마에 대한 긍지 갖는것 보면 보람”


-이번에 나온 원풍모방노동조합운동사의 특징과 의의를 꼽는다면?

방용석 “제가 도망을 다니면서도 목숨처럼 간직한 조합 관련 자료를 토대로 1988년에 원풍모방노조 활동사인 <민주노조 10년>을 펴냈습니다. 운동의 주요 내용은 대부분 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만, 정작 운동의 주역인 조합원들의 목소리는 분량상 많이 반영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새로 책을 엮으면서 450쪽 분량을 더해 조합원의 시각과 육성을 역사에 남기고자 했습니다.”

-해산된 노조나 단체가 3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기란 쉽지 않은데요?

“책을 만들기 위해 조합원 43명의 구술을 받았는데 모두가 일치한 말은 ‘행복했다’였습니다. 여공 대부분이 중졸 전후 학력의 어린 처녀들인데, 그들은 비록 높은 학교는 못 갔지만, 노조활동 속에서 배운 사회적 지식과 생각이 자신을 성장시켰다고 말합니다. 공동체를 이뤄가는 과정에서 오는 만족감, 자신들이 하나의 인격체로 인정받고, 자신들의 의사가 반영되고 실현된다는 데 대한 자부심이 컸던 게 아닌가 합니다.”

원풍모방노조는 1972년 어용노조를 청산하고 조합원 선출로 민주노조를 건설했다. 1982년 9월27일 회사가 폭력배들을 동원해 조합을 침탈하고 경찰이 여공들의 농성을 강제해산하면서 조합이 깨지고 570명의 여공이 강제해고됐다. 이후 1990년대 초반까지 조합 간부 출신들은 경찰의 블랙리스트(요시찰인물) 때문에 취업이 제한되는 고통을 당했다. 그런 중에도 이들은 법외노조를 건설해 원풍노조의 깃발을 끝까지 내리지 않았다. 원풍모방노조 활동은 2001년 김대중 정부 때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되었으며, 2007년에는 명예회복자에게 정부의 생계지원금이 지급됐다.

-원풍노조 하면 방용석인데, 방 지부장 얘기 좀 해볼까요?

박순애 “멋있었어요. 우리 언니 소개해주고 싶을 정도로.”

양승화 “지도력이 뛰어났어요. 지부장에 대한 우리들의 신뢰는 거의 무한대였습니다.”

정선순 “회사가 부도난 뒤 조합이 회사 정상화에 나섰을 때 보여준 능력, 민주노조를 만들어나가는 당찬 모습, 은행 등 회사 바깥과의 교섭 능력 등을 통해 지부장에 대한 믿음과 카리스마가 쌓여갔습니다.”

방용석은 충북 진천에서 3대 독자로 태어나 고교 졸업 후 상경해 1970년 한국모방(원풍모방의 전신)에 공원으로 입사했다. 착실한 기독교 신자인 그는 회사가 여공들에게 퇴직금을 안 주려는 것을 보고 의분을 느껴 민주노조 건설 작업에 참여했다가 생애 처음으로 구속되는 경험을 했다. 기소유예로 풀려난 뒤 여공들로부터 영웅 대접을 받자 우쭐해진 마음에 노동운동가의 길로 들어섰다. 1974년 섬유노조 원풍노조지부장에 선출됐다. 뛰어난 친화력과 지도력으로 1980년 신군부에 의해 해고·수배될 때까지 조합을 이끌었다. 그가 해직된 뒤 조합원들이 그의 생계를 지원했는데, 매달 받는 돈이 월급보다 많아 오히려 생활이 더 좋아졌다. 그의 집에는 늘 국수 다발이 천장까지 쌓여 있을 정도로 조합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조합원에게 그는 아버지나 오빠와 같은 존재였다고 한다. 고문 후유증으로 오른쪽 귀가 난청이다. 노동문제 전문가로서의 능력을 인정받아 김대중 정부 시절 국회의원(15대)과 노동부 장관을 지내기도 했다.

-82년 해산 당시를 회상해 볼까요? 해고된 뒤에는 어떻게 됐나요?

“저를 비롯해 구속된 조합 간부들이 석방된 게 이듬해인 83년 8월이었습니다. 그때 다시 모여 결의를 했어요. 원풍노조는 법외노조로 활동을 지속한다고요. 조합비도 걷고, 정기적 모임도 갖기로 했어요. 그때 원풍 사람들이 블랙리스트 때문에 취직도 못하고 고통받으며, 생계를 잇기 위해 전국으로 흩어져 갔지만, 이 모임만은 이 집(신길동에 있는 빌라. 조합기금으로 83년에 사 지금까지 원풍 사람들이 쓰고 있으며, 민주화운동 시기에는 숱한 운동가들의 회의실이자 은신처였다)에서 오늘 이 순간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경찰이 계속 감시하고,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재취업도 못하게 했지요?

“원풍 출신임이 드러나면 사장이 불러다 임금 다 계산해 주고는 나가라고 해요. 어떤 사장은 오히려 통사정했어요. 제발 부탁한다고. 경찰이 좀 괴롭혀야 말이죠.”

“영세하청업체에 들어갔는데 정말 열악했어요. 참다 못해 제가 나서 노동부에 고발하면 그제야 월급을 제대로 줘요. 제가 영세사업장 몇 군데 전전했는데, 한번도 노동부에 고발하지 않고 임금을 받은 적이 없었어요. 그 과정에서 제가 원풍 다녔다는 게 나오죠. 그러면 제 월급은 물론 다른 사람 것까지 다 챙겨주고는 나보고 나가달래요.”

김금자 “92년에 소비조합에 취직했는데 거기 사장이 나 때문에 너무 힘들어했어요. 아줌마 나 어떡해, 짜르라고 성환데 어떡해, 하면서 늘 울상을 지었어요. 그 양반 그러다 폐암으로 죽었어요. 원풍 사건이 난 지 10년이 지났는데도 말이죠.”

황선금 “2007년 생계지원보상금을 탈 때도 마지막까지 갈등한 친구들이 많았어요. 지금까지 감춰왔는데 끝까지 드러내고 싶지 않은 마음과, 이걸 신청했다가 나중에 자식들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하는 피해의식 때문이었답니다.”

-다들 어려운 시기를 그래도 슬기롭게 넘기고 이 자리에 모여 있는 거군요. 얼마 전 진실화해위가 원풍노조 활동에 대한 정부의 부당개입을 인정했는데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방 “함께 결정을 받은 11개 노조단체와 상의를 해봐야겠지만, 정부를 상대로 강제해고와 취업방해 등에 대한 피해보상 소송을 할 계획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앞으로 우리가 무엇을 할 것인가입니다. 현재로서는 자녀들과 함께 하는 사회공헌 활동을 해보자는 데 의견을 모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보다 못한 이웃을 돕는 것이기도 하지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는 데 덕이 되는 활동이 아닙니까? 이걸 우리가 뒷받침하면 나중엔 걔들이 중심이 되지 않겠어요? 앞으로 넉넉잡고 5~10년은 그런 일을 해보자고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일동 “70년대 여공이라고 하면 ‘공순이’라고 해서 좋은 이미지는 솔직히 아니었지요. 그래서 가족이나 친구들에게 과거 얘기를 일절 안 한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민주화운동으로 인정받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알려졌고, 그걸 계기로 자녀들이 현대사를 공부하면서 엄마에 대해 긍지를 갖는 것을 보며 지난 삶에 대해 보람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생각해보면 원풍노조는 학교 같은 곳이었습니다. 사회를 바라보는 관점을 얻은 곳이 그곳이었고, 어떻게 사는 게 사람답게 사는 것인가를 배운 곳도 그곳이었습니다. 마음의 고향 같은 곳입니다. 내가 원풍에 들어가지 않았다면 나는 어떻게 살았을까? 생각해 보면, 내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나름대로 사회를 볼 줄 알고, 비록 높은 학식은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이 될 수 있었습니다.”

인터뷰/이인우 기획위원 iwlee21@hani.co.kr

■ 조합원들이 말하는 민주노조의 삶

같이 펴낸 ‘생애사’ <못다 이룬 꿈도 아름답다>는 7명의 원풍모방노조 조합원의 라이프스토리를 담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노동자가 되어, 어떻게 살았으며, 무슨 생각을 했는지를 담은 전형적인 사회사이며 인류학 보고서다.

-그럼 한분씩 자기 얘기를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것으로 이번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인터뷰 내용과 책 속의 이야기를 토대로 정리한 것임을 밝힌다.)

박순애(56) 저는 정읍이 고향이며, 1972년 중졸 학력자의 이름을 빌려 원풍(당시 한국모방)에 들어갔습니다. 노조사무실에서 ‘인간은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무엇인가 되어야 할 존재이며, 제 스스로 자신을 만들어 나가야 할 존재’라는 사르트르의 말을 노트에 옮겨 쓴 일을 기억합니다. 1982년 노조가 강제해산될 때 구속돼 옥살이도 겪어봤습니다. 블랙리스트에 올라 재취업이 안 돼 고생도 했구요. 공무원과 사귀다 원풍과 인연을 끊을 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헤어진 기억도 있습니다. 2008년 남편과 두 아들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고입과 대입 검정고시에 합격해 현재 방송통신대학 진학을 준비중입니다. 꿈으로라도 가능하다면 한번만이라도 다시 원풍 시절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하필 왜 그때냐구요? 그땐 뭐든 할 수 있다는 열정과 자신감으로 충만했거든요. 그걸 다시 느껴보고 싶습니다. -박순애(56)

황선금(56) 저는 고향이 철원 민통선 안입니다. 서울에 올라와 식모살이를 하다 기술을 배우겠다는 일념으로 대한모방을 거쳐 1975년 원풍에 들어갔습니다. 노조 교육 때 강사로 온 신인령(전 이화여대 총장) 선생님의 ‘나는 누구인가’라는 강의에 큰 감화를 받고 노조활동에 적극 참여했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난 뒤 소규모 가죽공장에 시다로 취업했는데, 거기서 어린 여공이 맞는 걸 보고 항의하다 전력이 드러나는 바람에 또 퇴사를 당했습니다. 이후 먹고살기 위해 여러 일을 하다가 암에 걸려 죽을 뻔하기도 했습니다. 2007년 검정고시를 거쳐 현재 성공회대 사회학부 3학년에 다니고 있습니다. 결혼 기회를 잡지 못해 아직 혼자입니다. 기억나는 말이요? 암투병할 때인데 어느날 방용석 지부장이 와서 그래요. “선금아, 힘내. 김근태, 이해찬이가 국회의원이 됐어.” 가을이 무르익는 10월에는 해마다 원풍의 벗들이 모입니다. 제주도의 명화, 강원도의 춘자, 전라도의 영희, 경상도의 정숙, 충청도 순댓국집 아줌마 선호, 순옥, 순자… 벌써 가슴이 뜁니다. -황선금(56)

양승화(54) 충북 제천이 고향이구요, 지금은 명리학을 배워 안양에서 철학원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1972년 중졸 학력의 오빠 이름으로 원풍에 들어갔습니다.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 1976년 삼성새마을청소년중고교(비인가)에서 고교과정을 마쳤습니다. 조합활동이 곧 가족이자 학교였을 정도로 열심해 해서 78년에는 대의원에도 뽑혔습니다. 조합이 강제해산될 때 구속까지 됐습니다. 공부를 못한 게 어린 맘에도 한이 맺혀서인지 어렸을 때 제 좌우명은 “빨리 돈 벌어 동생 공부 시키자”였습니다. 그런데 여상을 1등으로 졸업한 여동생이 일찍 세상을 뜬 게 한이 맺힙니다. 94년 결혼한 뒤 동생이 남긴 딸을 친딸처럼 키우고 있습니다. 그 아이가 원풍 자녀 좌담회에 나와 그러데요. “다른 사람들에게 현대사는 그저 역사이지만, 제게는 여전히 현실입니다.” -양승화(54)

김오순(50) 정읍의 한 소작농 집에서 6남매 중 넷째로 태어나 초등학교를 마치고 열여섯살 때 친구 소개로 원풍에 들어갔습니다. 조합활동에 큰 의미를 두지 않은 평범한 조합원이었습니다. 82년 노조가 강제해산의 위기에 있을 때도 예매한 추석귀성표가 아까워 환불을 받으러 갈 정도였으니까요. 그런 제가 해고를 당한 데 큰 충격을 받았고, 이후 시위에 적극 나서게 되었습니다. 스물네살 때 가구제조 기술자와 결혼했습니다. 외환위기 때 수입이 크게 줄어 식당에서 2년간 일하다 전북대 청소원으로 취업했습니다. 용원으로 일하면서 용역회사와 청소원 아줌마 간의 불평등 관계를 알게 되었지요. 그래서 민주노총 전북본부 일반노조가 만들어질 때 아줌마들을 모아 노조를 만들었습니다. 처음엔 학교나 용역회사나 다들 불편해했지만, 지금은 모두 당연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저희 전북대 용원조합은 60살 안팎의 여자 청소원이 85명인데, 조합장을 못 그만두게 해 8년째 조합 일을 봐주고 있습니다. 원풍노조 시절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런 나를 상상할 수 없겠지요?”-김오순(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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