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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영씨는 심리상담사다. 휴대전화 속 월간 일정표를 보면, 요일과 시간별로 부지런히 오가는 모습이 그려진다. 한주에 2~3일은 민간 심리상담실로 출근한다. 여기서 아동·청소년 심리지원서비스(정부 바우처로 월 4회씩 1년)를 전담한다. 아동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 토요일에도 나간다. 한달에 한번 인근 학교에서 위임받아 상담실에서 학생들을 특별교육하며 며칠 더 근무한다. 일대일로 1시간씩 놀이치료를 진행하더라도, 마무리하고 상담일지까지 쓰자면 시간은 늘 초과한다. 회당 서비스 가격 4만5천원(정부 지원+본인 부담) 중에 선영씨가 받는 임금은 2만5천원이다. 프리랜서 상담사가 어느 정도 자기 수입을 맞추려면 여기저기 여러 상담실을 다니며 일을 따내야 하는데, 그만큼 일을 찾기도 쉽지 않지만, 그렇게 하면 노동강도가 너무 세진다.
“민간 상담실은 매출 구조나 운영이 안정되지 않아서 상담사를 프리랜서로 써요. 딱 회당 보수만 지급하죠. 아무래도 상담사에게는 고용이 불안정한 게 제일 큰 어려움이겠죠? 4대보험도 안 되고요. 큰돈은 아니지만, 내가 애들하고 잘 맞으니까 그냥 그걸로 만족해요. 아직 초등학생들이라 되게 무궁무진한 아이들이어서 앞으로 어떻게 자랄지 모르잖아요.”
대신 선영씨는 올봄부터 월간 일정표에 새 일정을 추가했다. 초등학교 방과 후 학습 부진 전담 강사가 됐다.
“1년 계약직인데 일주일에 세번, 2시간씩 수업해요. 지원서에 상담 관련 이력은 굳이 쓰지 않았어요. 그런데 학습 부진 학생들의 욕구를 알아주고 다독여서 해야 할 때가 있더라고요. 자연스레 상담이 접목되죠.”
아침 7시40분에 집을 나서서 상담실에서 특별교육을 하고 다시 이동해 학교 방과 후 수업을 마치고 나온 게 오후 3시30분. 선영씨의 배낭에는 특별교육·상담 자료, 공책과 수첩, 방과 후 수업 어린이들에게 읽어준 그림책이 있었다. 선영씨네 고3 쌍둥이 남매가 어릴 적에 읽던 철학 시리즈 중 한권이라는데, 선영씨가 참 좋아한다고 했다. ‘여우와 두루미’ 이야기는 ‘배려’를 말했다.
선영씨는 배려를 실천하는 사람이다. 그이는 월간 일정표 곳곳을 자원봉사로 채웠다. 일주일에 한번 4시간씩 무료 전화상담 기관을 찾은 지 2년째다. 수화기를 들고 익명 내담자의 사연을 경청한다. 여러차례 전화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도, 통화가 1시간이 넘어가도 흘려듣지 않도록 노력한다. 내담자는 오늘의 어려움에 허덕이며 전화를 한다. 그럴 때면 내담자가 지난날 아무리 어려워도 견디고 살아낸 훌륭한 자신을 기억할 때까지, 귀 기울여 듣고, 기다리고, 겸손히 내담자의 마음을 북돋운다.
“전화하는 분들은 다들 약자세요. 얘기 들어주고, 조금 말벗해주고, 별거 아닌 거 몇개 가르쳐줬는데 되게 좋아하세요. 도움 됐다고. 그럴 때 받는 행복감은 어디서도 못 느끼는 거예요. 돈이랑은 달라요, 그 값어치가. 봉사는 정말 나중에 하늘나라 갈 때도 보람된 일로 기억할 것 같아요. 그래서 계속하나 봐요. 어쩌면 좋은 일자리가 안 나타나서 그럴 수도 있어요. 더 매력적인 일자리가 나타난다면 저울질할 수도 있겠죠. 아직은 안 해봐서요, 지금은 그래요.”
보호관찰 청소년 상담 봉사는 달마다 한번씩 만나는 거라는데, 올해는 3명과 인연이 됐다. 한주에 한명씩 만나면 3주가 지난다. 지난 10여년 동안 30명쯤 만났다는데 보통 1~2년 만남을 이어간다. 처음 계기는 이랬다.
“서른아홉에 방송통신대 청소년교육과에 편입했어요. 누군가 저와 동기들에게 이 봉사를 제안했는데 하겠다며 나서는 사람이 없었어요. 내가 거절을 못 해서 기본교육 3개월 받고 억지로 한 거죠. 시간이 갈수록 봉사자들이 계속 그만뒀어요. 애들이 약속도 안 지키고, 자괴감도 느끼게 하고, 애로사항이 있으니까요. 근데 내가 이 일을 계속하더라고요. 그때 느꼈어요. 상담이 나한테 맞는 것 같아서 ‘더 배워봐야겠다. 청소년들에게 이왕 해주는 말, 조금이라도 더 도움이 돼야 하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마흔 중반에 시작해 2년 반, 상담대학원 야간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 상담 인턴으로 일할 때 코로나19가 시작돼 모든 게 잠시 멈췄다. 그만큼 일자리가 없어 힘든 시간을 견디기도 했다. 선영씨가 공부와 자원봉사, 다 나열하지 못한 노동으로 세상을 부지런히 만나고 다닌 데는 사연이 있다. “활발하고 맹랑했던” 아이가 중학교에 가고부터 아팠다. 병명도 몰랐다. 독한 약을 오래 먹었다. 집에서는 아프니 공부도 하지 말라 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수학여행 가잖아요. 그 시골 마을에서 수학여행은 꼭 가야 하는 것이었어요. ‘이제 졸업인데’ 싶어 악을 쓰고 갔잖아요. 그런데 제대로 놀지도 못해 되게 속상했던 기억이 있어요.”
형제자매가 다 간 대학, 가족 몰래 전문대에 합격했다. 스물 중반에야 수술하는 방법을 알아 건강을 되찾았다. 먼발치에서 바라만 본 바깥세상에 드디어 나왔다 싶었는데 짧은 직장 생활을 뒤로하고 결혼하고부터 다시 집에 머문 시간이 길어졌다. 아이가 안 생겨서 임신하려고 노력한 6년, 그 뒤에 쌍둥이 남매가 생겨 무척 기뻤다.
하지만 아이들이 유치원에 가기까지 6년을 ‘갇혀 지냈다’. 세상과 소통하는 창문으로 바라본 뒷집엔
또래 아이엄마가 있었는데, 애 하나 달랑 등에 둘러업고 가볍게 외출하는 모습에 “외출을 왜 그렇게 잘하는지” 부러웠다.
“아이들이 유치원에 갈 나이가 되었을 때 무조건 밖으로 나왔어요. 그때가 서른여덟이에요. 아파서 10년, 임신과 육아로 12년을 내가 집에만 있었잖아요. 그래서 더 밖으로 기를 쓰고 나왔던 것 같아요. 부러웠거든요. 일을 무척 하고 싶었어요. 아는 언니 소개로 보험 일을 시작했어요. 2년을 했는데, 나한테 맞지도 않았고, 수완이 없어 수입도 좋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바로 그만두지는 않고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찾았는데, 마침 우연히 받은 전단을 보고 고용센터를 찾아가 직업상담을 받았어요. 두세달인가 매주 상담을 받으면서 내가 찾은 게 ‘공부’였어요.”
보호관찰 청소년들을 만나는 동안 상담 석사 과정을 마쳤는데 아이들을 바라보는 선영씨의 마음은 그대로다. 자기가 배운 것을 아이들을 대상으로 접목해보려 하지 않았다. “상담 스킬보다도 중요한 건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이고 우리에게 필요한 건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과 능력,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니까.
“공부가 재밌었다기보다는 집에서 나간다는 게 좋았어요. 집에서 나가서 나를 위해서 뭘 한다는 게 무척 좋았어요. 그동안은 가족을 위해서 노력했는데, 그 노력을 나를 위해서 한다는 게 정말 좋았어요. 보호관찰 청소년 상담을 만나면서 여러 봉사활동의 이미지가 좋아졌어요. 그러면서 내가 남을 조금이라도 돕고 사는 게 ‘의미 있는 삶’이고 지금 바쁘게 사는 이유라는 걸 알았어요.”
박수정 르포 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