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산재사망 노동자 추모의 날인 지난 4월28일 오후 서울 을지로 서울고용노동청 앞에서 민주노총 조합원들이 ‘죽지 않고 일할 권리 쟁취’ 민주노총 결의대회를 열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무력화를 규탄하는 구호를 외치고 있다. 윤운식 선임기자 yws@hani.co.kr
산업재해로 인한 심각성을 거대한 피라미드에 빗댄다면, 맨 꼭대기에는 사망자들이 있습니다. 그 꼭대기 아래로는 재해 정도에 따라 부상자들이 순서대로 위치해 있을 것입니다. 부상자들 중에서 어떤 이는 단순 타박상을 입어 간단한 치료 뒤 원래 직장으로 복귀할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들도 있습니다.
‘살아남은 김용균’들은 산재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 바로 아래에 놓인 사람들입니다. 산재로 영구적인 신체 장애를 입어 사회로 나갈 수 없지만, 가장 오랜 기간 살아남아야 하는 청년들입니다. 이들 187명 중 상당수는 하청업체·자회사 소속 직원이었고, 5인 미만 사업장에서 일했습니다. 취재를 진행하며 187명 중에는 동남아시아·중국 등에서 온 청년 이주노동자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습니다. 이역만리에서 일하다 신체를 절단당한 채 귀국해야만 했던 그들의 심정은 어땠을까 가늠하기도 어렵습니다.
대한민국을 충격에 몰아넣었던 ‘메탄올 중독 사건’ 당사자
6명의 재해 경위도 눈길을 붙잡았습니다.
이들은 20대 때 삼성과 엘지(LG) 하청업체에서 스마트폰 부품 공장 파견노동자로 일하다 메탄올에 중독돼 시력을 잃었습니다. 사건이 발생한 지 6∼7년이 지난 지금, 이들은 어떻게 살고 있을까요? 노동건강연대를 통해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잊혀진 채 살아가고 싶다”는 답변을 받았습니다.
누군가 죽어야만 관심을 갖는 사회는 노동자의 죽음과 결별하지 못합니다. 죽지 않았기에 일터의 열악함과 부조리함을 직접 말할 수 있는 노동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인다면 적어도 죽음만큼은 막을 수 있지 않을까요. <한겨레>가 죽다 살아난 노동자들, 그중에서도 고 김용균씨와 비슷한 처지에서 일했던 청년 노동자들의 숨은 목소리를 찾아 나섰던 이유입니다.
“다 끝난 일인데 왜 들추시고 그러죠?” “모릅니다. 끊습니다.” “그걸 저희가 대답해야 할 의무가 있나요?” 업종·규모를 가리지 않고 회사 쪽은 과거 산재를 물어보는 질문에 불쾌감을 감추지 않았습니다. 재해자의 안타까운 사고 경위에 대한 취재는 시작부터 거센 반발에 가로막혔습니다.
특히 몇년 전부터 산재 사망자에 대한 보도를 이어가고 있는 한 방송사 관계자의 말이 기억에 남습니다. 과로로 길랭-바레 증후군(말초신경, 척수, 뇌신경 등에 염증이 생겨 마비가 발생하는 질병) 진단을 받은 영상제작팀 소속 노동자의 재해 경위를 전하며 “파견업체 직원일 수 있으니 파견 계약을 맺은 업체 현황을 알려줄 수 있는지”를 문의했습니다. 그러자 해당 방송사 관계자는 “그 자료는 어디서 났나. 거기(재해자)에다 물어봐라”라고 말하고선 전화를 끊었습니다. 산재 방송 보도는 하지만 방송사 산재가 보도되는 건 원치 않았던 겁니다.
그럼에도 이런 현실을 뚫고 나오는 ‘송곳’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 사건을 기억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안타깝게 생각했다.” “자료가 있는지 최대한 찾아보겠다. 도움을 주고 싶다.” 노동 관련 시민단체와 익명 취재원들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이들은 같은 노동자로서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면 안 된다며 조심스레 취재에 협조해주었습니다. 살아남은 4명의 김용균들을 만날 수 있게 도와주셨던 고마운 분들입니다.
“사람들이 산재를 너무 모른다.” 한 노무사가 탄식하듯 내뱉은 말입니다. 살아남은 김용균들과 가족들도 산재를 몰랐습니다. 아들, 남편이 수술실에 들어가 사경을 헤매는 틈을 타 회사는 가족들에게 합의서를 내밀었습니다. 무리한 일정, 부실한 안전 조처 등 구조적인 문제점들이 한꺼번에 터져 재해로 귀결됐지만, 사업장을 상대로 법적 조처를 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습니다. “왜 신고 안 하셨나”라는 근로복지공단 직원, 노동조합의 조언이 없었다면 <한겨레>가 만난 2명의 살아남은 김용균들은 사업주의 책임을 묻지 못했을 것입니다.
“가족들은 100% 우울증”…곁을 지키는 사람들의 아픔
산재는 끝이 났지만, 소송은 계속되고 중증 재해인들의 삶도 멈추지 않습니다. 그러나 신체나 정신에 영구적인 손상을 입었기에 타인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자연스레 ‘산재 가족’은 재해자를 평생 책임져야 하는 상황에 놓입니다. 매년 2천여명이 일터에서 숨지는 나라에서 산재 가족들까지 챙길 여유가 없습니다. 모든 통계가 사망자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중증 장해인들은 물론, 이들을 지키는 가족들의 삶은 ‘사각지대’에 놓여 있습니다.
<한겨레>가 만난 ‘살아남은 김용균’들은 서류상 치료가 끝났지만 3명은 가족에게서, 1명은 간병인에게서 돌봄을 받고 있었습니다. “남동생이 하반신에 감각이 없으니 대변이나 그런 걸 침대에 다 쏟아내는 거예요. 간호사 여섯분이 다 붙어서 (처리하는데) 너무 충격이었어요. 이게 현실이구나.” 건설 현장에서 당한 사고로 하반신이 마비된 김준혁(가명·33)씨의 누나(35)는 간병인으로서의 운명을 직감한 순간을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그는 “동생이 지금은 나이도 어리고 체력도 있지만, 결국에는 옆에 배우자라든지 보살필 사람이 없으면 결국 제가 해야 된다. 그래서 (동생 간병에 남은 생을 쏟아야 하겠다고) 조금 빨리 마음을 먹었던 것 같다”고 말했습니다. 일산화탄소 중독으로 뇌손상을 입어 사회적 연령이 1.92살로 낮아진 이희성(가명·31)씨의 어머니 박인숙(가명·60)씨는 산재 뒤로 24시간 아들 곁에 붙어 있어야 합니다. 과거에는 간간이 사회생활도 했지만, 아들의 사고와 동시에 ‘박인숙’의 삶은 사라지고 ‘희성이 엄마’의 삶만 남았습니다. 박씨는 “새로 덧붙여진 기억들이 휘발성 있게 빨리 사라진다. 아들은 편의점 가서 빵 하나 사오라는 말도 잊어먹더라.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며 막막한 심정을 토로하기도 했습니다.
산재 가족들은 보호자 역할을 하다 마음의 병을 얻습니다. 산재로 인한 상처를 받아들이지 못한 당사자들의 분노와 스트레스가 가족에게까지 전이되기 때문입니다. 사단법인 ‘희망씨’가 지난해 11월 발간한 ‘산재 노동자 가족생활 실태 및 경험에 관한 연구’ 보고서를 보면, 중증 장해인들의 보호자들이 겪는 심리적 어려움이 나옵니다. “모든 산재환자 보호자들이 우울증은 100% 있어요. 저는 100% 있다고 장담해요. 개그프로그램을 보다가도 갑자기 눈물이 날 때가 있어요.”(ㄱ씨) “되게 유했던 사람인데, (산재 뒤) 정말 자기중심적이 돼요. (…) 잘 견디다 저도 한계치에 다다라서 어느 날 제가 애들이랑 다 사라지고 없을 수 있다고 했어요.”(ㄴ씨)
“남은 가족에게 재난인 산재… 제도적 지원 해야”
그래서 중증 장해인들의 ‘간병과 돌봄’을 떠맡은 가족들을 상대로 심리상담 등 체계적인 지원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백승호 가톨릭대 교수(사회복지학)는 “산재는 누구에게나 찾아올 수 있는 사회적 위험이고 가족에게는 갑작스러운 재난”이라며 ‘재난 및 안전관리 기본법’(재난안전법)에서 규정한 ‘재난’에 산재를 포함시키는 방안을 제안합니다. 자연재난(홍수 등)과 사회재난(화재·붕괴 등)으로 한정된 재난안전법상 재난 개념에 산재도 포함되면, ‘재난에 직면한 위기가족의 긴급지원’을 규정한 건강가정기본법이 산재 가족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게 백 교수의 설명입니다.
그는 “산재를 ‘재해’ 관점에서만 접근하면 법 적용 대상자가 당사자로 한정된다”며 “산재가 발생한 뒤 가족들이 경험하는 피해는 정말 심각하지만, 산재에 따른 지원은 당사자에 초점이 맞춰져 있어 가족의 아픔까지 고려하진 않고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노무법인 노동과인권 최진수 노무사 또한 “(재해자가) 노동조합과 연결된 경우에 한해 노동조합에서 자체적으로 십시일반 가족들을 지원하는 방식이 전부였다. (가족의 아픔은) 그야말로 민간의 영역에 맡겨져 있었다”며 “현행 산재법(산업재해보상보험법)만으로 산재 가족 지원을 감당하기란 쉽지 않기에 국가를 통한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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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필수 김가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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