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자 일하는 저녁, 카페에 주문이 몰린다. 손목이 아파 가끔 주사를 맞는다는데, 경원(가명)씨는 다부진 손길로 음료를 만들어 손님에게 내준다. 여행 안내사가 되려고 뒤늦게 전문대학에 갔건만, 졸업하고 얼마 뒤 세상은 코로나19와 맞닥뜨렸다. 학교에서 바리스타 과정을 이수하고 아르바이트 경험도 있어 카페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이전 이력이 눈길을 끈다. 일과 도전이랄까. 28살 경원씨는 여느 또래와 달리 혹은 여느 또래와 마찬가지로 일찍이 제 앞가림에 나서야 했다.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어요. 월급을 100만원 넘게 버는 어른? 아마 알바보다는 좀 더 돈을 벌고 싶었던 것 같아요.”
돈을 갈망했다던 중학생은 고등학생이 되자 제과점에서 주 5일 5시간씩 일해 40여만원을 벌었다. 형편이 어려운 집에 바라지 않고, 특성화고 수업 준비물을 비롯해 필요한 걸 스스로 해결했다.
“등교만 해서는 자고 밥 먹고 자고 일 갔죠. 학교는 공부할 때 자도 솔직히 누가 뭐라 않는데, 일에서 실수하면 뭐라고 하잖아요. 약간 주객전도가 되었달까?”
그러니까 경원씨는 17살부터 노동자였다. 4200원/4400원/4600원, 고1부터 고3까지 해마다 받은 시급을 또렷이 기억했다. 최저임금이 4580원이던 해에는 근무 햇수가 길다고 사장이 20원을 더 줬다는데, 주휴수당은 2년 반 동안 한번도 안 줬다.
따지면 정직원인 지금도 별다르지 않다. 5인 미만 사업장이라 연차휴가, 연장근로수당, 휴일근로수당은 해당하지 않는다. 불만족스럽지만 지금은 코로나 시대, 다른 카페와 견주면 자신이 못 받는 것도 아닐 거라는데, 월급을 하루 8~10시간 주 6일로 계산하면 주휴수당이 보일락 말락 한다. 당연히 밥값이나 밥 제공은 없고, 상자로 사다 놓은 컵라면이 유일한 “복지라면 복지”다.
경원씨는 19살 어느 날에 먹은 밥을 떠올렸다. 주말 호텔 서빙 일당이 세다는 말에 친구를 따라나섰다. 지침대로 구두에 정장을 차려입고 머리망도 했다. “5만원 준대서 갔는데 3만5천원을 줬어요. 어찌나 바쁜지 점심시간도 너무 짧아 밥을 물 먹듯이 먹었어요. 물 마시듯이요. 그때 내가 좀 서러웠나 봐요. 다른 사람들에게 이 얘기를 한참 했어요.”
일은 이야기를 낳고, 사람은 이야기를 나누고 기억한다. 예전에 만난 한 미용노동자도 밥을 훌훌 마시고 일했다는데, 오늘 세상 어디선가 뚝뚝 떨어지는 땀방울에 밥을 마시며 일하는 또 다른 여자가 있겠다. 자기 밥을 다 먹지 못하고 일하다 세상을 떠나는 여자도 있겠다. 학교를 청소하다, 배를 도장하다 목숨을 앗긴 여자들…. 이야기를 마음에 담으면 그네들 사라지지 않고 우리에게 떠오를까.
고3 여름방학 무렵 경원씨는 더는 알바생이 아닌, 중견기업 경리로 취업했다. 해마다 월급이 오르고 적금도 부었는데, 2년8개월 뒤에 스스로 그곳을 나왔다. 앉아만 있어도 월급이 나오는데, 왜 퇴사하냐고들 했다. 속말은 어린 여자애가 어디서 이만큼 받겠느냐다. 무슨 배짱으로 다른 세상을 찾느냐다. 인원이 많은 사무실에서 경원씨는 유일한 여성이었다.
“21살 시작에 딱 돌아봤는데, 돈만 벌었지 한 게 없었어요. 인생 목표도 없고, 일에 완전히 적응해서 실수도 없고, 발전할 게 없었어요. 내 장점 중 하나는 도전하는 데 두려움이 없는 거예요. 한번 해보자, 하는. 한편으론 사무실에서 성희롱하는 사람들도, 쟤는 저것만 빼면 괜찮다는 수식을 붙여 그걸 용인하는 사람들도 더는 꼴 보기 싫었고요.”
퇴직 반년 전 친구와 동유럽행 비행기표를 끊고, 영어학원도 등록했다. 정작 학생 때는 못 해본 공부다. “하고 싶어서 하니까 정말 열심히 다녔어요. 막 뛰어갔어요.” 얼마나 좋았을까. 공부는 여행 뒤 중국어로까지 이어갈 정도로 재미났는데, 처음 맞는 백수 생활이 영 지루했다. “이때 느낀 게 아, 난 일을 안 하면 심심하구나, 그래서 더 일했나 봐요.”
경원씨는 일과 도전을 동시에 했다. 퇴직하고 여행 다녀온 그해 수능에 도전했고, 입학해서는 일등과 졸업을 해냈다. 공부하면서도 자신을 먹여 살리기는 여전했다. 주말 아르바이트만으로 생활하기가 벅차면 휴학하고 출근했다. 이 무렵이 25살쯤, 세대를 분리해 집에서 나와 50여만원 월세와 관리비 지출이 새로 생겼다. 쉬면 돈이 없으니까 스크린골프장에서 청소와 안내를, 회사 두군데서 사무보조를, 카드단말기 콜센터에서 상담 일을 하면서, 퇴근 뒤나 주말에는 동전야구장과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골프장 사장은 시간대별로 카페·음식점·술집을 겸업하면서 각각에 맞춰 경원씨를 조각조각 잘라 썼다. 사무보조 사장은 값싼 정직원 자리를 제안했다. 중견기업에서 일만큼은 책잡히지 말자며 울면서 배운 터라, 경원씨는 제 몫 이상을 해내는 사람이었다. “그 연봉으론 생활하기 힘들겠다고 했더니 내가 다닌 학교와 전공을 비하하더라고요. 이 사장 밑에서는 일 못 하겠다, 생각했죠.” 콜센터는 업무 체계도 신입 교육도 없는 엉성한 회사였다. 친구가 도망치라고 했지만, 혼자 부딪치고 리스트업 하며 석달을 버텼다. 경원씨는 이런 시간과 경험들을 헛되이 여기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계속 성장하는 거예요. (일과 경험이라는) 데이터가 계속 쌓이니까.”
17살부터 28살까지 경원씨의 이력을 들었다. 예전 중견기업을 그만둔 걸 후회하지 않냐 물으니 가끔 한번씩 생각은 나지만, 결론은 아니란다. 여행도, 공부도, 그리고 지금 다시 탐색하고 준비하는 어떤 것도, 그때 그만두지 않았으면 오지 않을 기회였으니, 후회는 없다.
더구나 그동안 월세 지출이 워낙 커서 아무리 일해도 돈이 빠듯했는데, 지난해 전셋집으로 옮긴 뒤 숨통이 트이고 뭐든 해볼 여지가 생겼다. 집은, 인터넷 여성 커뮤니티에 한 여성이 올린 글을 우연히 보고 ‘서울시청년임차보증금대출’을 신청해 얻었다. 누군가의 경험이 다른 누군가에게 길을 열어주었다. 자기 생계를 책임진 경원씨의 12년 노동도 마찬가지로 누군가에게 길이 되어주지 않을까. 집과 관련해 요즘은 여성 1인가구에 안전한 집을 많이 생각한단다. 독립한 뒤로 여러차례 집을 옮겼는데, 급하게 얻었던 두번째 집이 내부 시설도 부실했지만, 주변 안전이 위험해 두달 만에 나왔다. 이런 고민만 봐도 경원씨는 지금도 계속 성장한다.
박수정 르포작가
<여자, 노동을 말하다>(2013) 저자. 여성노동자가 머물고 움직이는 장소, 일하는 시간에서 이야기를 찾아 들려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