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서울의 한 병원 독감 예방접종 창구 앞이 한산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연합뉴스.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접종 뒤 사망했다는 신고가 전국에서 속출하며, 백신 접종을 둘러싼 대혼선이 벌어지고 있다. 보건당국은 예방접종을 중단할 상황은 아니라고 거듭 밝히고 있지만, 야당과 의료계 일부 등에서 ‘일시 접종 중단’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이런 가운데 22일 오후 늦게 동일 제조번호(로트번호)로 생산된 백신을 맞고 사망한 사례가 처음으로 확인되면서, 향후 보건당국의 지침이 변경될지 추이가 주목된다.
질병관리청은 이날 오후 4시 기준으로 독감 백신 접종 뒤 사망신고 사례를 파악한 결과, 전국 12개 시·도에서 25명이 나왔다고 밝혔다. 이 가운데 22명이 60대 이상 고령층이다. 지역별로는 경북이 4명으로 가장 많고, 서울·전북·전남·경남 각 3명, 인천·대구 각 2명, 대전·경기·강원·충남·제주 각 1명씩으로 전국 각지에 걸쳐 있다. 지난 16일 1명을 시작으로 19일 1명, 20일 4명, 21일 10명, 22일 9명 등이다. 70대 이상 무료접종이 시작된 19일 이후 신고 건수가 급격히 늘었다.
질병청은 각 사망자의 사인을 부검 등을 통해 정확히 판단하는 데 2주가량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정은경 질병청장은 이날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에서 “현재까지는 12명의 사망자가 접종한 백신과 같은 제조사·제조번호·공정에서 만들어진 백신을 맞은 56만명 가운데, 중증 이상반응이 신고된 사례는 없다”며 “(사망 원인이) 제품 문제라면 바로 중단하는 게 맞다. 그러나 현재 상황에서는 중단할 만한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저희와 전문가의 판단”이라고 말했다. 주호영 국민의힘 원내대표 등 야당 의원들이 국감장에서 “사망 원인을 밝힐 때까지 잠정적으로 (예방접종을) 중단해야 한다”고 공세를 편 데 대한 답변이었다.
일선 병·의원을 회원사로 두고 있는 대한의사협회가 이날 독감 예방접종을 일주일간 잠정 유보할 것을 권고한다고 밝히면서, 상황은 좀더 복잡해졌다. 최대집 의협 회장은 이날 오후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사인 규명과 안전한 접종 환경을 만들기 위해 일주일간 접종 중단을 권고한다”며 “11월 중순부터 독감 환자가 발생하는 점을 고려해 일주일이 가장 적절한 기간”이라고 주장했다. 이어 그는 “질병청이 백신 자체에는 문제가 없다고 단정적 표현을 쓰고 있어, 유통 과정이나 주사를 놓는 과정이 문제가 있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어 의료기관에서 상당히 불안해하고 있다”며 “의협 소속 전체 의료기관에 공문을 발송하고 있고 전체 회원에게 문자 안내도 나갈 예정이어서 내일부터는 본인이 원하면 보건소나 국공립의료기관으로 전원할 수 있지만 실제 접종 케이스가 크게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이 22일 오전 국회에서 열린 보건복지위원회 종합감사에서 안경을 만지고 있다. 연합뉴스
하지만 의료계 내에서도 의견은 엇갈리고 있다. 한국백신학회는 입장문을 내어 독감 백신 접종 후 숨진 사례에 대해 “지역적으로 국한되지 않고 제조사와 생산고유번호가 다르며, 발현하는 증상이 일치되지 않은 산발적 양상을 보인다”며 “올해는 코로나19 바이러스와 함께 계절 독감의 유행이 우려되는 상황이라 소아청소년과 고령자, 만성질환을 가지고 있는 면역저하자의 독감 백신 접종은 지속해서 이뤄져야 한다”고 밝혔다. 한 의료계 관계자는 “의협의 일주일 보류 권고를 두고 일선 개원가에서는 섣불렀던 것 아니냐는 의견도 나오고 있다”며 “의사들이 나서 접종 중단을 주장하면 확실한 근거도 없이 백신에 대한 국민 불안만 커지게 할 수 있다. 게다가 주사 놔달라는 환자들에게 안 된다고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김연수 서울대병원장은 이날 국회 교육위원회 국정감사에서 “오늘 밤이라도 감염내과와 면역학 교수들과 긴급하게 의견을 나눈 뒤 공식입장을 말하겠다”고 밝혔다.
서울 영등포구보건소는 이날 관내 의료기관에 발송한 ‘인플루엔자 예방접종 주의 및 보류 권고사항 안내’를 통해 영등포 사망자 접종 상품명과 제조번호를 알리며 “모든 예방접종을 29일까지 일주일간 유보할 것을 권고한다”고 했다. 보건당국과 지방자치단체 간에도 단일한 지침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질병청은 이날 같은 제조번호로 생산된 백신을 맞고 사망한 사례가 확인됐다고 밝혔다. 25명의 사망자 가운데 각 2명씩 같은 제조번호인 백신을 접종받은 사실이 밝혀진 것이다. 앞서 질병청은 같은 제조번호 백신을 맞은 추가 사망자가 나오면 해당 제조번호를 봉인하고 접종을 중단하겠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질병청은 23일 예방접종 피해조사반 회의를 열어 전문가와 종합적 검토를 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일선 현장에선 독감 백신 접종과 사망 간 인과관계가 확인되지 않았는데도 백신을 둘러싼 불안감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 경기도의 한 60대는 “2주 뒤에 결과가 나오는 걸 먼저 보겠다. 원래 다음주 무료접종이었지만, 불안이 깔끔히 가시기 전에는 접종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서울 서대문구 한 가정의학과 의원 관계자도 “사흘 전인 19일에 견줘 어제오늘 접종을 받으러 오는 분이 6분의 1로 줄었다”고 말했다. 또 사망자의 접종 백신이 유료·무료를 가리지 않는데도, 유료 백신을 고집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분간 독감 백신 접종 중단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전문가들은 보건당국이 애초 불신을 자초했으며, 사태 수습 과정에서도 미숙함을 보이고 있다는 지적을 내놓고 있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교수(감염내과)는 “공포가 퍼지는 속도가 워낙 빨라, 질병청이 사인 규명에 2주나 쏟겠다고 해서는 안 된다”며 “앞서 상온유통 사건이나 백색입자 사건도 질병청의 조사 속도가 느려 혼란과 불신이 커진 면이 있었다. 고령층 사인 규명은 부검을 통해 빠르게 밝혀지는 경우가 많으니, 이번에는 가능한 대로 빠르고 투명하게 정보를 국민들에게 공개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최하얀 권지담 채윤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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