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오전 세종시에 있는 한 대형병원에서 인플루엔자(독감) 백신 무료접종 연기 안내문을 붙이고 있다. 연합뉴스
초유의 독감 백신 무료접종 중단 사태는, 국가 조달 백신을 의료기관으로 배송하던 민간 위탁업체가 백신을 차에서 차로 옮기던 중 일부를 상온에 노출시켰기 때문으로 파악됐다. 백신 조달·공급을 총괄한 업체는 올해 이 사업에 처음 뛰어든 의약품 도매 중소기업 신성약품이다. 신성약품의 미숙한 유통 관리와, 최종 공급까지 여러 단계·업체를 거치는 복잡한 유통 구조 등이 이번 사태의 한 원인으로 보인다.
22일 정은경 질병관리청장은 충북 오송 질병관리청에서 브리핑을 열어 “유통상 문제가 발견된 백신은 22일부터 국가 예방접종(무료접종)을 시작하려고 준비한 만 13~18살 아동 대상 정부조달 계약 물량 중 일부”라며 “(냉장)차량에서 차량으로 이동하는 과정에서 (상온에) 노출되었다고 판단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신은 2~8℃의 냉장유통이 기본인데, 이것이 지켜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질병청은 신성약품이 지역 의료기관에 공급할 백신을 운송 트럭으로 옮겨 싣는 도중에, 차 문을 열어놓는 등 적정 온도보다 높은 환경에서 작업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질병청은 전날 오후 이런 내용의 신고와, 신고 내용을 뒷받침하는 사진·영상을 제보받고 신성약품의 백신 공급을 즉각 중단하는 한편, 무료접종 전체 일정을 중지했다. 신성약품이 조달·공급하기로 한 물량은 1259만 도스(1회분)로, 이 가운데 만 13~18살 무료접종에 쓰일 예정인 약 500만 도스가 전날까지 배송됐다. 그런데도 무료접종 전체 일정을 중단한 것은 신성약품이 이미 공급한 약 500만 도스와 앞으로 공급할 약 700만 도스가 현장에서 혼용되는 것을 막으려는 조처다.
질병청과 식품의약품안전처(식약처)가 지난 7월 내놓은 ‘백신 보관 및 수송관리 가이드라인’은 “백신 콜드체인(냉장유통)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조·수입 업체에서 생산·수입된 백신을 유통업체를 거쳐 접종이 이뤄질 때까지 적정 온도를 유지하는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그런데도 이런 사고가 난 것은 신성약품의 미숙함 탓일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한 백신업계 관계자는 “매년 독감 백신 공급 과정을 봤지만, 이런 일은 없었다”며 “올해는 백신 조달 입찰이 정부와 제약사 간 단가 줄다리기로 네차례나 유찰됐고, 그 결과 대규모 물량 조달·공급을 처음 하는 업체가 일을 맡게 돼 사달이 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복잡한 백신 유통과 수송 과정도 문제로 지적된다. 백신 무료접종은 국가가 책임지는 사업인데도, 민간 조달업체가 대규모 물량을 조달하고, 조달업체는 여러 배송업체에 수송을 맡긴다. 김우주 고려대 구로병원 교수(감염내과)는 “중간 유통 과정에 뛰어드는 도매상들이 난립해 있고, 일부 도매업체는 콜드체인에 대한 투자나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유통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라고 말했다. 보건복지부와 식약처, 지방자치단체 등 관계부처는 백신 유통 과정의 문제를 조사할 예정이다.
독감 백신은 바이러스가 살아 있는 ‘생백신’이 아닌 ‘사백신’(바이러스를 죽여 불활성화한 백신)인 까닭에 짧은 시간만 상온에 노출됐다면 품질 이상으로 이어지진 않을 것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문제는 ‘얼마나 오래’ 노출됐느냐다. 최원석 고려대 안산병원 교수(감염내과)는 “상온 노출 시간이 길었다면 백신의 효과가 낮아지고, 심한 경우엔 접종 뒤 이상반응이 나타날 수 있다. 최악의 경우 폐기해야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정은경 청장은 “상온 노출 가능 기간 등은 조사해 확인할 예정”이라며 “유통 과정 조사와 품질시험을 먼저 해봐야 해서 (폐기를) 예단하기는 어렵다”고 말했다.
질병청과 식약처는 길게는 2주가량 500만 도스에 대한 품질검사를 한 뒤 순차적으로 접종을 재개할 예정이다. 정은경 청장은 “(국가조달이 아닌) 의료기관이 자체 확보한 물량은 먼저 접종을 재개하는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며 “어느 정도 검사가 진행되면 (2주) 전이라도 (접종 재개 여부를) 판단하겠다. 제조사가 아직 공급하지 않고 갖고 있는 물량도 있어, 그 물량을 먼저 공급하고 나머지는 유통 조사와 품질검사를 한 뒤 공급하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만약 품질검사 결과 ‘폐기’로 결론이 나면 올해 무료접종은 차질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방역당국은 백신을 새로 생산하는 데 5~6개월 걸린다며 야당의 ‘전국민 무료접종’ 요구를 수용하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고 거듭 설명한 바 있다. 현재 정부가 확보한 백신 여유 물량은 전체 무료접종 대상인 1900만명의 1.8%(34만2천여명분)에 그친다.
한편, 신성약품 관계자는 <한겨레>와 한 통화에서 “위탁 배송업체 직원들이 대형 냉동차에서 배달용 차량으로 백신을 옮기는 과정에 일부 배송 규정을 지키지 않은 것을 경쟁업체가 음해성 제보를 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며 “상온 노출 시간이나 분량이 많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으며, 23일까지 식약처에 개선방안을 보고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최하얀 권지담 홍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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