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2월 12일.
사람의 난자와 체세포로 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놀라운 연구 성과가 국내 언론과 외신을 타고 전세계에 공개됐다.
황우석 교수는 이튿날 일간지에 기고한 글에서 "우리가 기적을 일궜는지 천재인지 나는 모른다"며 "우리가 해놓은 이 조그만 토대 위에 단단한 성을 쌓아 노벨의학상을 수상하는 나의 자랑스러운 후배 과학자를 보고 싶다"고 썼다.
그로부터 1년 남짓한 2005년 5월 20일.
이번에는 환자 11명의 체세포를 이용해 `환자 맞춤형 체세포복제 배아줄기세포'를 만들었다는 연구 성과를 내놓았다.
황 교수는 질병의 고통에서 인간을 해방 시키는 `신(神)의 손'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다시 그로부터 1년에서 8일이 모자라는 날. 황 전 교수는 논문을 조작해 기업 등에서 20억원의 후원금을 타내고, 돈을 주고 난자를 산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장면1:픽션보다 더 픽션적인 2005년 논문 서울대 조사위 조사 결과 황 교수팀은 2005년 논문에 발표한 2번 줄기세포(NT-2)는 2004년 10월 6일 콜로니(세포덩어리)가 확인됐다고 연구노트에 기록한 것으로 돼 있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루 전날 아침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10월 5일 아침 서울대 실험실의 세포 관찰 시간. NT-2 배반포 내부 세포가 갑자기 영양세포에서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 황 교수는 실망감을 표시하며 실험이 잘될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세포 배양을 책임진 김선종 연구원은 황 교수가 걱정하자 미즈메디 병원에 가서 수정란 줄기세포를 가져와 NT-2가 있는 배지(배양용기)에 섞어 심었다. 생명력이 없는 서울대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는 콜로니까지 발달하지 못한 반면 왕성하게 자라던 미즈메디 수정란 줄기세포는 영양세포에 붙어 콜로니를 만들었다. NT-2의 배반포가 떨어져 나가 사실상 실험이 실패했는데도 황 교수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던 셈이다. 한번 섞어심기를 시작한 김 연구원은 더욱 과감해졌고 50여일만인 11월 25일 NT-3을 만들었다. 그 뒤 2주 남짓한 기간에 김 연구원은 NT-4,5,6,7을 잇따라 만들어내는 `신의 손'의 솜씨를 발휘했다. 서울대 연구팀의 큰 기대와 황 교수의 지속적인 독려, NT-1을 확립한 박종혁 연구원과 비교는 김 연구원을 `섞어심기'로 유혹했다. 2005년 1월 9일 실험실 오염 사고로 NT-4~7이 죽었지만 황 교수는 사이언스에 제출할 논문에 줄기세포 수를 11개로 기재하려 했고, 김 연구원은 한꺼번에 4개의 줄기세포를 만들려고 미즈메디 병원 연구원에게 비공개된 미즈메디 수정란 줄기세포 Miz-2,7,10을 가져오게 해 섞어 심었다. 논문 조작의 원 데이터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장면 2: "어차피 사진 찍으면 다 똑같은 건데" 2005년 3월 15일 논문 제출 때 존재한 것은 NT-2,3(실제 Miz-4,8)이었다. NT-2,3이 실제 확립됐다고 믿은 황 교수는 나중에 줄기세포를 더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나라보다 앞서 특허권을 확보하기 위해 논문 조작을 지시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황 교수의 지시를 받은 강성근 교수는 허위 데이터를 영어로 번역해 제럴드 섀튼 미국 피츠버그대 교수를 통해 사이언스에 최종 제출했다.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2005년 2월 중순 황 교수는 김 연구원에게 "어차피 사진 찍으면 다 똑같은 거니까 면역염색사진 8개를 더 만들어서 10개 세포주 라인으로 만들라"고 지시했고 강 교수에게는 "어때 괜찮겠지"라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테라토마(다양한 종류의 조직세포가 뒤섞인 기형 종양) 검사를 하면서 황 교수는 "2,3번 다 찔렀으니까(NT-3 테라토마 주입은 2005년 1월12일께 실시) 조직이 좋으면 2번으로 2,3,4번 사진을 다 만들죠,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뭐"라고 김 연구원에게 사진 조작을 지시했다. 황 교수는 또 2월22일 NT-2,3 배아체 형성검사를 할 때 3,4주가 필요하다는 김연구원의 말에 미즈메디 병원에 배아체 슬라이드가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한 뒤 Miz-1 사진 자료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걸로 NT-2번부터 11번까지 사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장면3:첫단추부터 잘못 채운 2004년 논문 2003년 2월 3일과 9일. 황 교수팀은 각각 A, B씨에게서 난자를 제공받았다. A씨 난자는 박종혁, 김선종 연구원이 가져와 박을순 연구원이 핵이식을 했고, B씨의 난자는 구자민 연구원이 가져와 역시 박 연구원이 핵이식을 했다. 전반적으로 실험을 관리하던 유영준 연구원은 A씨 인적사항만 전달받고 B씨의 인적사항은 전달받지 못해 2월9일 자신의 컴퓨터에 난자 제공자를 `이름모름'이라고 기재한다. 황 교수는 4월께 NT-1 DNA 지문분석용 체세포를 구하려고 공여자 인적사항을 유 연구원에게 물어봤다. 유 연구원은 설 이후 핵이식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NT-1이 B씨의 난자를 핵이식 한 것인데도 A씨의 난자를 제공받은 것이라고 보고했고 그 결과 논문에 체세포 공여자는 A씨가 됐다. 2003년 3월 NT-1 DNA 지문분석을 할 때 김 연구원의 실수로 DNA 추출에 실패하자 NT-1이 수립됐다고 믿은 황 교수는 "난자제공자 체세포 DNA 시료를 두개로 나눠 보내라"고 지시했다. 정상적으로 NT-1에서 추출한 DNA와 체세포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했다면 NT-1이 B씨의 체세포로 만든 것임을 확인했을 수도 있었지만 기회를 놓친 것이다. 같은해 5월 황 교수팀은 사이언스에 논문 초고를 투고했지만 사이언스는 NT-1이 처녀생식 가능성을 제기하며 체세포복제 배아줄기세포라는 입증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황 교수팀은 각인유전자 검사 방법을 이용했지만,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에서 나타나는 부계 및 모계유전자 동시 발현이라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고심하던 강성근 교수는 유 연구원에게 핵이식한 난자 중 배반포로 성장하지 못한 배아세포를 모으게 한 뒤 서울대 전모 연구원에게 각인유전자 검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검사 결과 `복제배반포(hNT-BL)'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강 교수는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로 검사한 것처럼 `hNT-BL'이라고 기재된 부분을 `체세포핵이식 인간배아줄기세포(SCNT hES-1)'로 고쳐 사이언스에 제출했다. 황 교수팀은 2004년 처음 사이언스에 논문을 제출해 `게재 불가' 결정을 받았을 때도 배아체 형성실험만 기재했고 테라토마 실험 결과 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싣지 않았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 (연합뉴스)
다시 그로부터 1년에서 8일이 모자라는 날. 황 전 교수는 논문을 조작해 기업 등에서 20억원의 후원금을 타내고, 돈을 주고 난자를 산 혐의로 법정에 서게 됐다. #장면1:픽션보다 더 픽션적인 2005년 논문 서울대 조사위 조사 결과 황 교수팀은 2005년 논문에 발표한 2번 줄기세포(NT-2)는 2004년 10월 6일 콜로니(세포덩어리)가 확인됐다고 연구노트에 기록한 것으로 돼 있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 있었을까. 하루 전날 아침으로 시계를 돌려보자. 10월 5일 아침 서울대 실험실의 세포 관찰 시간. NT-2 배반포 내부 세포가 갑자기 영양세포에서 떨어져 있는 걸 발견한 황 교수는 실망감을 표시하며 실험이 잘될지 걱정이 들기 시작했다. 세포 배양을 책임진 김선종 연구원은 황 교수가 걱정하자 미즈메디 병원에 가서 수정란 줄기세포를 가져와 NT-2가 있는 배지(배양용기)에 섞어 심었다. 생명력이 없는 서울대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는 콜로니까지 발달하지 못한 반면 왕성하게 자라던 미즈메디 수정란 줄기세포는 영양세포에 붙어 콜로니를 만들었다. NT-2의 배반포가 떨어져 나가 사실상 실험이 실패했는데도 황 교수는 그 의미를 잘 몰랐던 셈이다. 한번 섞어심기를 시작한 김 연구원은 더욱 과감해졌고 50여일만인 11월 25일 NT-3을 만들었다. 그 뒤 2주 남짓한 기간에 김 연구원은 NT-4,5,6,7을 잇따라 만들어내는 `신의 손'의 솜씨를 발휘했다. 서울대 연구팀의 큰 기대와 황 교수의 지속적인 독려, NT-1을 확립한 박종혁 연구원과 비교는 김 연구원을 `섞어심기'로 유혹했다. 2005년 1월 9일 실험실 오염 사고로 NT-4~7이 죽었지만 황 교수는 사이언스에 제출할 논문에 줄기세포 수를 11개로 기재하려 했고, 김 연구원은 한꺼번에 4개의 줄기세포를 만들려고 미즈메디 병원 연구원에게 비공개된 미즈메디 수정란 줄기세포 Miz-2,7,10을 가져오게 해 섞어 심었다. 논문 조작의 원 데이터가 만들어진 순간이었다. # 장면 2: "어차피 사진 찍으면 다 똑같은 건데" 2005년 3월 15일 논문 제출 때 존재한 것은 NT-2,3(실제 Miz-4,8)이었다. NT-2,3이 실제 확립됐다고 믿은 황 교수는 나중에 줄기세포를 더 만들면 된다는 생각에 다른 나라보다 앞서 특허권을 확보하기 위해 논문 조작을 지시했다고 검찰에서 진술했다. 황 교수의 지시를 받은 강성근 교수는 허위 데이터를 영어로 번역해 제럴드 섀튼 미국 피츠버그대 교수를 통해 사이언스에 최종 제출했다. 다시 시계를 거꾸로 돌려보자. 2005년 2월 중순 황 교수는 김 연구원에게 "어차피 사진 찍으면 다 똑같은 거니까 면역염색사진 8개를 더 만들어서 10개 세포주 라인으로 만들라"고 지시했고 강 교수에게는 "어때 괜찮겠지"라고 의견을 묻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에 테라토마(다양한 종류의 조직세포가 뒤섞인 기형 종양) 검사를 하면서 황 교수는 "2,3번 다 찔렀으니까(NT-3 테라토마 주입은 2005년 1월12일께 실시) 조직이 좋으면 2번으로 2,3,4번 사진을 다 만들죠, 다 똑같은 것 아닌가 뭐"라고 김 연구원에게 사진 조작을 지시했다. 황 교수는 또 2월22일 NT-2,3 배아체 형성검사를 할 때 3,4주가 필요하다는 김연구원의 말에 미즈메디 병원에 배아체 슬라이드가 있는지 확인해보라고 한 뒤 Miz-1 사진 자료가 있다는 보고를 받고 "그걸로 NT-2번부터 11번까지 사진을 만들라"고 지시했다. #장면3:첫단추부터 잘못 채운 2004년 논문 2003년 2월 3일과 9일. 황 교수팀은 각각 A, B씨에게서 난자를 제공받았다. A씨 난자는 박종혁, 김선종 연구원이 가져와 박을순 연구원이 핵이식을 했고, B씨의 난자는 구자민 연구원이 가져와 역시 박 연구원이 핵이식을 했다. 전반적으로 실험을 관리하던 유영준 연구원은 A씨 인적사항만 전달받고 B씨의 인적사항은 전달받지 못해 2월9일 자신의 컴퓨터에 난자 제공자를 `이름모름'이라고 기재한다. 황 교수는 4월께 NT-1 DNA 지문분석용 체세포를 구하려고 공여자 인적사항을 유 연구원에게 물어봤다. 유 연구원은 설 이후 핵이식을 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NT-1이 B씨의 난자를 핵이식 한 것인데도 A씨의 난자를 제공받은 것이라고 보고했고 그 결과 논문에 체세포 공여자는 A씨가 됐다. 2003년 3월 NT-1 DNA 지문분석을 할 때 김 연구원의 실수로 DNA 추출에 실패하자 NT-1이 수립됐다고 믿은 황 교수는 "난자제공자 체세포 DNA 시료를 두개로 나눠 보내라"고 지시했다. 정상적으로 NT-1에서 추출한 DNA와 체세포에서 추출한 DNA를 분석했다면 NT-1이 B씨의 체세포로 만든 것임을 확인했을 수도 있었지만 기회를 놓친 것이다. 같은해 5월 황 교수팀은 사이언스에 논문 초고를 투고했지만 사이언스는 NT-1이 처녀생식 가능성을 제기하며 체세포복제 배아줄기세포라는 입증 자료를 제출하도록 요구했다. 황 교수팀은 각인유전자 검사 방법을 이용했지만,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에서 나타나는 부계 및 모계유전자 동시 발현이라는 결과를 얻지 못했다. 고심하던 강성근 교수는 유 연구원에게 핵이식한 난자 중 배반포로 성장하지 못한 배아세포를 모으게 한 뒤 서울대 전모 연구원에게 각인유전자 검사를 하도록 지시했다. 검사 결과 `복제배반포(hNT-BL)'라는 결과가 나왔지만 강 교수는 체세포 복제 줄기세포로 검사한 것처럼 `hNT-BL'이라고 기재된 부분을 `체세포핵이식 인간배아줄기세포(SCNT hES-1)'로 고쳐 사이언스에 제출했다. 황 교수팀은 2004년 처음 사이언스에 논문을 제출해 `게재 불가' 결정을 받았을 때도 배아체 형성실험만 기재했고 테라토마 실험 결과 등 기본적인 내용조차 싣지 않았다. 이광철 기자 minor@yna.co.kr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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