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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이혼할까.”
남편과 식탁에 나란히 앉아 밥을 먹던 나는 기어이 속에만 담고 있던 말을 내뱉고 말았다. 눈물이 고인 채 입안에 밥을 욱여넣었다.
“뭔 개똥 같은 소리를 삐악삐악 하고 앉았노.”
내가 헛소리를 할 때면 늘 하던 우스개로 남편이 대꾸했다. 경상도 억양만 약간 남은 그가 거의 유일하게 하는 사투리였다. 그래, 여기서 이혼이 왜 나와. 역시 내가 또 개똥 같은 소리를 했구나. 남편의 말에 나는 왠지 모를 위안을 얻었다.
“그냥. 한명만 힘들면 되잖아.” 눈물을 들키지 않으려고 나는 급하게 의자에서 일어나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에서 뿜어져 나오는 찬 공기에 정신이 조금 맑아졌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은 지 한달 만에 우리 4남매는 ‘간병인생 최대 위기’를 마주했다. 그동안 겪었던 갑작스러운 응급실행이나 항암 부작용에 비할 바가 못 됐다. 어쨌든 그것은 우리가 간병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달랐다. 간병 자체가 아예 불가능할 수도 있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은 예고 없이, 도둑처럼 왔다. 나는 속절없이 무너졌다.
엄마가 여동생 집에 머무는 동안 사실 나는 말 못할 죄책감에 시달렸다. 4남매 중 맏이로, ‘엄마나 아빠가 없으면, 니가 엄마고 아빠’라는 케이(K)-장녀의 책임감을 느끼며 자라온 탓이었다. 주말엔 우리 집에서 엄마를 돌보며 ‘월화수목금금금의 시간’을 보냈지만, ‘금금금금금토일’을 겪는 여동생에겐 턱없이 부족한 휴식이었다. 아마도 여동생에겐 자신이 엄마를 돌본 5일과 내가 돌본 2일의 차이는 3일이 아닌 30일과 같았을 테다. 그 고됨을 애써 묵인하며 나는 엄마가 ‘안전한 돌봄’을 받고 있다는 데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엄마는 더이상 동생 집에 머물 수 없었다. 그 집에 환자가 더 늘었기 때문이다. 여동생의 남편, 제부가 일하던 중 오른쪽 발목을 다쳤다. 의사는 수술을 한 뒤 6개월 동안 오른쪽 다리 전체를 깁스하라고 했다. 갓 돌을 지난 영아를 포함해 4남매를 양육 중인 여동생이 환자 두명을 돌보는 건 애당초에 말이 되지 않았다. 이 얘기를 들었을 때 여동생에게 바로 건네려던 말은 ‘그럼 엄마는 어떻게 하지?’였다. 나는 “제부는 괜찮아?”라는 말을 먼저 한 내 순발력에 감탄했다.
간병할 사람을 구해야 하는 상황은 전원 하려고 병원에서 퇴원한 3주 전과 같았다. 엄마는 한달 만에 체중이 4㎏ 빠지고 부축 없인 휘청댔지만, 요양보호 등급을 받기엔 병세가 약했다. 그렇다고 요양등급을 받자고, 엄마의 병세가 나빠지길 바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침대에서 일어날 수 없는 것처럼 ‘연기’를 하면 등급 신청이 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엄마는 원치 않았다. 게다가 한달에 600만원가량 비용을 내야 하는 재가 간병인은 다행인지 불행인지 여전히 구해지지 않았다. 임시방편으로 ‘암 요양병원’에서 2~3주 정도 머물며 회복하는 것도 알아봤지만, 기저귀를 착용하고 거동이 불편한 엄마를 받는 곳은 없었다. 아픈 사람이 회복하는 곳이지, 아픈 사람을 치료하는 곳이 아니라는 게 이유였다. 주당 150만원을 낸다고 해도 환자를 받아주지 않는 희한한 ‘요양병원’들이었다.
이젠 별다른 선택지는 없어 보였다. 앞으로 엄마의 병세가 언제 어떻게 달라질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누군가 옆에 붙어서 엄마를 돌봐야 한다면, 또다시 자녀가 없는 나의 몫이었다. 엄마와 남편 중 하나에 집중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나는 엄마라고 생각했다. 물론 ‘개똥 같은 소리’라는 남편의 대꾸에 ‘이혼’이라는 단어는 금세 마음에서 지웠다. 다시 생각해도 이성적인 판단은 아니었다.
이혼 대신 나는 엄마를 설득했다.
“엄마, 지금 상황에서 ○○○(여동생) 집에 있는 건 무리야.”
“그렇지….” 엄마는 말끝을 흐렸다.
“우리가 돌아가면서 매일 엄마 집에 갈게. 주말엔 여기, 주중엔 저기로 엄마가 떠밀리듯이 옮겨다니는 게 나는 속상해.”
말은, 참 잘했다.
병원 전원을 마지못해 수용한 것처럼, 엄마는 강요에 가까운 내 설득에 또다시 마지못해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기로 했다. 그리고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뒤, 엄마 방과 거실엔 홈 폐회로텔레비전(CCTV)이 한대씩 설치됐다. 엄마에게 별일 없는지 휴대전화 앱을 통해 확인하는 용도였다.
영상 접근 권한을 나로 설정한 뒤, 나는 수시로 엄마의 생활을 들여다봤다. 화면 속 엄마는 침대에 누워 있거나 소파에 앉아 멍한 눈으로 티브이를 보고 있었다. 주로 ‘도시어부’나 ‘나 혼자 산다’ 같은 예능 프로그램이었다. 엄마가 보는 화면 속 희극인들은 박장대소했지만, 내가 보는 휴대전화 화면 속 엄마는 조금도 웃지 않았다. 가슴에 돌덩이가 얹힌 것처럼 무거웠지만, 나는 애써 밝은 척 시시티브이를 향해 말을 걸었다.
“엄마, 뭐 해?”, “엄마, 텔레비전 재미있어?”, “엄마, 밥은 먹었어?”
엄마가 집으로 돌아간 뒤, 일상에서 ‘나의 일상’은 더 사라졌다. 퇴근 뒤 동료들과 마시는 맥주 한잔, 남편과의 밤 산책, 주말 늦잠, 소파에 벌러덩 누워 티브이를 보면서 하는 게임 등 모두 없던 일이 됐다. 그 자리엔 엄마가 들어왔다. 엄마가 먹을 반찬을 만들고, 면역력이 떨어진 엄마를 위해 집을 청소하고, 엄마 집에 쌓인 쓰레기를 버렸다. 휴가도 편하게 쓸 수 없었다. 위급 상황에서 사용해야 할 연차는 ‘저축’할 필요가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엄마의 혈압이 74㎜Hg로 떨어졌다는 연락을 받았다. 제부가 병원에 입원한 동안 엄마와 함께 동네 병원에 들렀던 여동생의 전화였다. 혈압이 낮고 산소포화도가 정상범위 아래라 쇼크가 올 수도 있으니 빨리 응급실로 가라고 했다는 내용이었다. 급하게 대형병원 응급실을 찾았다. 응급실에선 또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했지만, 엄마는 더 다양한 검사를 받고 싶어했다.
응급실 한쪽 침대 의자 20여개엔 엄마 같은 환자들이 앉은 듯 누워 있었다. 보호자들은 등받이도 없는 의자에 앉아 새벽 시간을 지켰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다음날 오전 8시에 교수가 회진 돌 때까지 밤새 할 수 있는 건 응급실에서 자는 일 밖에 없었다.
“엄마, 응급실에 혼자 있는 게 어때? 아침에 데리러 올게. 아님 우리 집에 가서 잤다가 내일 병원에 다시 올래?”
이번엔 엄마가 설득되지 않았다. 다음날 오전에 있을 외부 인사와의 미팅이 신경 쓰였던 나는 응급실 의자에 앉아 노트북을 켰다. 불편한 의자만큼, 불편한 엄마 옆이었다. 그리고 혼자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으려는 엄마에게 처음으로 화가 났다. 엄마 때문에 부서까지 옮긴 지 일주일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소소
갑작스레 ‘엄마 돌봄’을 하게 된 케이(K)-장녀가 고령화사회에서 청년이 겪는 부모 돌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