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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씨는 28살로 대학을 졸업하고 집에서 백수로 지내고 있습니다. 회사에 입사한 적도 있었지만 상사가 자신을 불편하게 한다며 그만둔 것이 벌써 세번째입니다. 그는 회사에서 선임들과 같이 있으면 무척 불편해 그 자리를 빠져나가고 싶다고 합니다. 가족들이 보기에는 어릴 때 운동을 해서 몸도 건강한데 침대에만 누워 지내니 ‘한심한 놈’ 정도로 생각되었습니다.
동주씨는 초등학교 때 우연히 어머니에 손에 이끌려 구기 운동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보통 키에 체격이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운동부 코치는 동주씨가 운동에 특별한 재능이 있다고 치켜세웠습니다. 동주씨도 운동을 하는 것이 재미있었고, 대학도 운동 관련 과로 진학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동주씨의 부모님은 대회 때마다 따라다니면서 동주씨를 응원하고 뒷바라지를 했습니다.
그 뒤 동주씨는 중학교에 진학했고, 동주씨가 다니게 된 학교의 운동부는 전국체전과 주요 대회 입상을 통해 학교의 명예를 드높이는 데 목표가 있었습니다. 동주씨가 느끼기에 이전보다 운동의 강도가 매우 세졌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코치에게 욕을 먹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동주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키와 체격이 크게 성장하지 않았고, 체력 싸움에서부터 밀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한번은 동주씨의 학교가 중요한 전국체전에서 예선 탈락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때문에 팀 전원이 단체기합을 받게 되었습니다. 코치는 동주씨에게 “운동은 팀워크가 중요한데 동주 너 때문에 우리 팀이 엉망이 되었다. 너 이리 나와”라고 욕을 한 뒤, 모든 동료가 보는 앞에서 여러 차례 따귀를 때렸습니다. 너무 아팠지만 부끄러움이 더 컸고 팀이 탈락한 것이 자기 잘못으로 생각되어 그는 뺨보다 마음이 더 아팠습니다. 집에 가서 부모님께 더 이상 운동을 하지 못하겠다고 말씀드렸더니, 부모님은 불같이 화를 내며 “네가 할 수 있는 것이 다른 뭐가 있냐. 공부를 잘할 수 있니? 못난 놈”이라며 욕을 하고 주먹으로 동주씨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동주씨도 이 상황에 너무 화가 나 문을 박차고 가출을 했습니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동주씨가 있을 곳은 어디에도 없었고, 하루 만에 집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동주씨는 운동부에서 더 이상 주전으로 뛰지 못하게 되었고 허드렛일을 돕는 경우가 많아졌습니다. 자존심이 몹시 상했지만 운동부가 잘되면 대학에 가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해서 참고 견뎠습니다. 코치는 동주씨를 동료들이 있는 앞에서 무시하고 욕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었고, 동주씨는 그때마다 마음속에서 솟아나는 엄청난 분노를 느꼈지만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습니다. 그날 밤에는 모멸감으로 죽고 싶은 생각이 들어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마음속으로 자신을 욕한 사람들에게 더 심한 욕을 했습니다.
동주씨는 결국 대학에 들어갈 수 있었지만 친구들과 어울리기 힘들었고 혼자 지내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는 즐거운 일이 없었고 살아가는 것이 의무처럼 생각되었습니다. 가끔 자신도 모르게 이유 없는 분노가 솟구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는 체육관에 가서 샌드백을 두들겨 패곤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때처럼 자신을 괴롭히는 사람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한지 알 수 없었습니다. 강의도 듣기 싫고 혼자 지내는 것이 편했습니다. 유일한 취미는 게임을 하는 것이었는데 주로 전쟁에 참여해 상대 팀을 모두 죽이는 게임을 좋아했습니다.
동주씨는 이유 없는 무기력감, 우울감, 분노감이 지속되어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내원했습니다. 검사 결과 동주씨는 어린 시절 자신에게 모욕을 주고 폭행한 코치와 팀 동료에 대한 심한 분노감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어린 시절 경험은 동주씨에게 ‘트라우마’가 되고 있었습니다. 트라우마는 실제적이거나 위협적인 죽음, 심각한 질병 혹은 자신이나 타인의 신체적, 물리적 통합에 위협이 되는 사건을 경험하거나 목격한 뒤 겪는 심리적 외상을 말합니다. 동주씨가 학교나 직장에 가거나 게임을 하면서 어떤 팀에 소속이 되면 그 당시 윗사람이나 동료에 대한 경계심과 분노를 ‘재경험’하게 됩니다. 재경험이란 과거의 부정적 경험이나 정서 또는 갈등상태를 다시 떠올려 현재 경험하는 일을 의미합니다. 재경험이 되면 억압되어 무의식에 있던 분노가 수면 위로 올라오게 됩니다.
어린 시절의 동주씨가 고통을 받고 있을 때 도와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부모님도 오히려 가해자가 되었고, 학교와 사회는 목표를 달성하는 데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그 안에서 트라우마를 반복적으로 당하며 고통받는 동주씨의 어린 영혼에는 아무도 관심이 없었습니다.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와 상담하고 치료를 받으며 동주씨는 그의 생애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대상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동주씨는 상담하는 중에 자신이 ‘학습된 무력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학습된 무력감이란 피할 수 없는 힘든 상황을 반복적으로 겪게 되면 그 상황을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와도 극복하려는 시도조차 없이 자포자기하는 현상입니다. 가족 상담을 통해 동주씨의 부모님도 동주씨가 얼마나 큰 고통을 겪고 살아왔는지 처음 알고는 눈물을 흘렸습니다.
이제 동주씨는 자신의 어린 시절의 기억으로부터 점차 자유로워지려고 합니다. 동주씨는 담당 의사가 자신의 ‘안전기지’ 역할을 하게 된 것입니다. 안전기지는 애착 이론에서 만들어진 단어로서 우리가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대상을 의미합니다. 안전기지를 통해 얼굴에 쌓인 오래된 분노감이 줄어들고 편안한 미소로 바뀔 수 있는 날이 오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회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누구나 욕을 먹지 않을 권리가 있고 하나의 인격체로 존중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집단의 목표 달성을 위해 더 이상 개인의 마음을 희생하는 사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