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전홍진의 예민과 둔감
11월19일 세계 자살 유족의 날
평범한 40대 주부이던 영숙씨
사채 끌어 쓴 남편의 극단선택
자살 유족의 ‘자살률’ 극히 높아
유족 자조모임 등이 치유 도와
11월19일 세계 자살 유족의 날
평범한 40대 주부이던 영숙씨
사채 끌어 쓴 남편의 극단선택
자살 유족의 ‘자살률’ 극히 높아
유족 자조모임 등이 치유 도와
게티이미지뱅크
하늘 무너지는 남편의 사망 소식 며칠 뒤 영숙씨는 하늘이 무너질 것 같은 연락을 받게 되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한 채로 발견되었다는 것입니다. 경찰에서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영숙씨는 그날 이후로 며칠 동안 현실이 아니고 꿈을 꾸는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고 살아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습니다. 그 뒤 영숙씨는 남편이 온라인 불법 도박에 빠져 감당할 수 없는 큰 빚을 지게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영숙씨는 장례식이 끝나고 난 뒤 집 밖에 나가지 못했습니다. 밖에 나가면 사람들이 자신의 남편에 대해서 수군거리는 것 같았고 온 동네에 소문이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습니다. 세상에 혼자 남겨진 것 같은 외로움이 밀려왔습니다. 자녀들도 충격으로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하고 학교에 가서도 친구들과 눈을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영숙씨의 가정은 그날 이후 모든 것이 무너지면서 마치 무인도에 고립된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었습니다. 영숙씨가 집에서 혼자 울고 있는데 다시 초인종이 울렸습니다. 연체된 이자와 원금을 받으러 온 대부업자들이 집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 영숙씨에게 대신 돈을 갚으라고 독촉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영숙씨는 밤에 초인종이 울리는 환청을 듣게 되었습니다. 매일같이 대부업자들이 집으로 들어와 행패를 부리는 꿈을 꾸고 식은땀을 흘리며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숙씨는 인근 정신건강의학과 의원을 방문했습니다. 자신의 상태에 대한 검사를 통해, 남편의 극단적 선택으로 인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와 우울증으로 진단되었습니다.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는 심각한 트라우마를 경험한 뒤 그 사건에 공포감을 느끼고 사건 후에도 지속적인 재경험을 통해 고통을 느끼며 트라우마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에너지를 소진하게 되는 질환입니다. 흔히 우울, 불면, 깜짝 놀라는 반응, 멍한 느낌 등을 동반하게 됩니다. 이렇게 예측하지 못하게 갑자기 가족이 사망하는 경우 더욱 큰 트라우마를 경험하게 됩니다. 영숙씨는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통해 안정감을 느끼고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에서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남편이 만든 채무도 ‘상속 포기’를 통해 물려받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특히, 악몽이 줄어들고 잠을 충분히 이룰 수 있어서 기분이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집 밖에도 나가고 사람들과도 편안하게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두 아들도 함께 정신건강의학과 치료를 받았고 아버지의 사망으로 인한 트라우마에서 점차 일상 생활로 회복하게 되었습니다. 영숙씨는 한국생명존중희망재단을 통해 ‘유족 자조모임’에도 참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조모임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유족들이 모여 서로의 아픔을 공감하고 치유의 과정을 함께하는 모임입니다. 참여자와 함께 애도 과정을 공유하며 공감·이해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참여자 간의 지지와 격려를 통해 변화를 체험하고 자기표현의 기회를 통해 절망감을 완화하고, 나아가 스스로 상황을 통제하는 방법을 터득할 수 있습니다. 또한, 참여자 간 다양한 시각에서 조언을 받으며 자신의 상황, 감정 등에 대한 정보를 얻음으로써 자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다른 나라에 비해서 유족의 자조모임 참여율이 낮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고 같은 상황을 경험한 분들과 함께하는 것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와 우울증에서 회복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11월19일은 ‘세계 자살 유족의 날’입니다. 극단적 선택으로 상처받은 유족들이 치유와 위로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며, 건강한 애도를 하기 위한 날입니다. 이날은 부친을 자살로 잃은 미국의 해리 리드 전 상원의원이 발의한 결의안이 1999년 통과된 것을 시작으로, 전세계적으로 매년 추수감사절 전주 토요일로 지정하고 있습니다. _______
자살, 유족에게 또 다른 비극으로 자살 유족에게 설문조사를 진행한 결과 ‘위로가 되는 말’은 ‘네 잘못이 아니야’ ‘고인도 네가 잘 지내길 바랄 거야’ ‘많이 힘들었겠다’ ‘무슨 말을 한들 위로가 될 수 있을까?’ ‘힘들면 실컷 울어도 돼’로 나타났습니다. ‘상처가 되는 말’은 ‘이제 그만 잊어’ ‘너는 뭐 하고 있었어?’ ‘왜 그랬대?’ ‘이제 괜찮을 때도 됐잖아’ ‘고인에 대한 험담’ ‘다시는 이야기하지 말아라’ 등이었습니다. 필자가 책임자로 참여한 성균관의대 삼성서울병원 연구 결과에 의하면 2008년 1월부터 2017년 12월까지 국내 자살 유족의 자살률은 인구 10만명당 586명으로, 우리나라 일반 인구 자살률 26명에 비해서 22.5배 높았습니다. 특히, 남편을 극단적 선택으로 잃은 부인의 경우 인구 10만명당 2457명으로, 우리나라 일반 인구 자살률에 비해서 94.5배 높은 것으로 나타났습니다(<정신과학 프런티어스>, 2022년 10월호). 우리나라에서는 매년 5만명 이상의 유족이 발생하고 있습니다. 아픔을 그들만의 것으로 묻어두지 말고 이웃과 사회에서 도움을 주어야 할 때입니다. 유족에게 ‘위로가 되는 말’로 따뜻한 마음을 전달할 수 있습니다. 유족에 대한 작은 관심과 배려가 이차적인 극단적인 선택을 예방하는 데 큰 힘이 됩니다. 전홍진 삼성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매우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책>을 썼습니다. 자세한 것은 전문의와의 상담과 진료가 필요하며, 이 글로 쉽게 자가 진단을 하거나 의학적 판단을 하지 않도록 부탁드립니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