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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유산된 게 오히려 다행인 것 같아.”
누구에게도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었다. 다른 사람은 ‘미친 소리’라고 욕할지 몰라도, 25년 지기는 이해해주겠지 하는 마음이었다. 그러나 친구의 답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무슨 소리를 그렇게 하냐”며 타박이 돌아왔다. 하지만 그때 내 심정은 정말 그랬다.
엄마가 암 진단을 받기 1년 전, 나는 유산했다. 어느 날 갑자기 몸은 으슬으슬하고, 구토감이 밀려왔는데 알고 보니 ‘입덧’이었다. 계획에 없던 임신인 탓에 기쁨보다는 당황스러움이 57배쯤 더 컸지만, 유산기가 있다는 산부인과 의사의 말에 2주 동안 누워만 있었을 정도로 나는 내 몸의 변화를 받아들이기로 했었다. 8주 만에 유산되지 않았더라면, 아기는 엄마가 암 진단을 받기 5개월 전쯤 태어났을 것이다. 만약 그랬다면, 나는 아찔했다. 5개월밖에 안 된 아기를 데리고, 병든 엄마를 돌보는 것은 정말로 ‘미션 임파서블’이니까. 유산해서 엄마를 돌볼 수 있게 됐으니, 이런 걸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가 암에 걸린 게 복도 아니니, ‘새옹지마’라고 해야 하나. 전화위복이든 새옹지마든 육아에 지친 여동생들 대신 나라도 자식이 없는 건 참 다행이었다.
처음 엄마의 기저귀를 갈던 순간 느낀 생경함을 잊을 수 없다. 통원치료를 시작한 뒤 엄마는 밤엔 기저귀를 찼다. 잠이 덜 깬 채로 화장실에 가다 넘어지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긴 밤을 버틴 ‘속 기저귀’와 ‘겉 기저귀’를 엄마에게서 벗겨내면 묵직함이 따라왔다. 손에 든 젖은 기저귀의 무게는 앞으로 내가 겪어야 할 삶의 무게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나는 엄마의 상황을 피하고 싶은 건 아니었을까. 나는 기저귀를 적신 소변이 내 손에 묻지 않게 하려고 열 손가락을 활짝 폈다. 14개월짜리 조카의 기저귀와 68살 엄마의 기저귀는 여러모로 달랐다.
사실, 소변이 묻은 기저귀를 보는 것보다 더 당황스러운 건 엄마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일이었다. 다 큰 성인, 그것도 나를 업고, 먹이고, 기른 엄마에게 기저귀를 채우는 일은 뭐랄까, 그동안 내가 쌓아온 세계가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엄마는 자식 10명을 기를 수 있지만, 자식 10명은 아픈 엄마 한명을 돌보지 못한다’는 말의 뜻을 어렴풋이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퇴근 뒤 동생 집으로 가서 엄마를 씻기고, 엄마 밥을 차리고, 엄마의 체온과 혈압을 재고, 기저귀를 채우는 삶의 사이클이 2주도 채 되지 않았는데 조금씩 버거웠으니까. ‘긴병에 효자 없다지만 효자 한번 돼보겠다’고 자신하던 마음이 2주 만에 쪼그라드는 현실을 마주하며, 돌봄 앞에 의지라는 건 참 비루하다 싶었다. 초등학교 2학년쯤 아픈 나를 업고 병원까지 내달리던 엄마의 등이 자꾸 생각났다.
항암 치료를 시작한 지 며칠 되지 않아 엄마에겐 예고된 부작용이 나타났다. 손발 저림, 변비 등이다. 그중 엄마도, 지켜보는 이도 가장 괴로웠던 건 구토였다. 엄마는 먹기만 하면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기침과 구역질을 하고 이어 구토를 했다. 먹고 싶다고 해서 사다준 수박조차도 몇 입 먹지 못하고 다 게워낼 정도였다. 함께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면 엄마가 언제든 편하게 토할 수 있도록 비닐봉지와 휴지를 준비해 둬야 했을 정도다. 낯선 이 상황에 빨리 익숙해지길 나는 바라고 또 바랐다.
야속하게도 당황스러운 상황들은 수시로 찾아왔다. 항암 시작 4일 만에 첫 응급실행이 발생했다. 오후 5시쯤 회사에서 한창 일하던 중이었다. 여동생 에이치(H)한테서 전화가 왔다. “엄마가 어젯밤부터 뒷골이 찌릿찌릿하고, 목을 양옆으로 돌리기가 힘들대. 뼈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닐까? 아무래도 응급실에 가봐야겠어.” 2주 전부터 엄마를 자신의 집으로 모신 에이치가 걱정을 쏟아냈다. 다발골수종은 암세포가 뼈를 공격하기 때문에 골절 위험이 높았다. 골절이 심각하면 정형외과 치료를 받거나 수술을 해야 해 항암은 미뤄질 수밖에 없고, 항암이 연기되면 또 뼈가 약해지는 악순환이 발생한다. 그 때문에 의사는 골절을 조심하라고 몇차례나 당부했었다.
에이치와 통화를 마친 뒤 일을 멈추고 담당 간호사의 업무용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었다. 끊어지지 않고 반복되는 수화음에 초조해졌다. 벌써 퇴근한 걸까. 그냥 바로 응급실에 가야 하나. 아니면 엄마한테 내일까지 참으라고 해야 하나. 건조한 기계음을 들으며 마음이 달아올랐다. 그러다, ‘딱’ 하며 수화음이 끊어지고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던 순간, 빛이 보였다.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간호사의 목소리에 매달렸다. “엄마가 고개를 숙일 수가 없고, 목을 돌리기 힘들대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다급한 나와는 달리,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다. “코로나19 때문에 지금 응급병동이 폐쇄됐어요. 밖에서 몇시간을 기다려야 할 거고, 기다려도 진료를 못 볼 수도 있어요. 우선 응급실에 연락을 해놓을 건데 진료를 안 받아줄 수도 있어요.” 불분명한 의료진의 말, 선택은 환자와 보호자의 몫이었다. 좀처럼 자기주장을 하지 않는 엄마가 강한 의지를 보였기에, 에이치는 엄마와 함께 응급실로 향했다.
퇴근 뒤 달려간 병원의 응급병동은 역시나 폐쇄돼 출입이 제한됐다. 에이치와 휠체어에 앉은 엄마는 응급병동 밖에 있었다. 방호복을 입은 보안요원에게 환자 이름을 접수시키고, 호명되기를 기약 없이 기다렸다. 첫 응급실행에 놀란 여동생 제이도 남편에게 아이 둘을 맡겨놓고 퇴근 뒤 달려왔다. 응급병동 밖 노상에서 우리 넷은 김밥을 까먹었다. 길에 서서 먹는 김밥도 옆에 있어주는 누군가 있으니 먹을 만했다.
아이가 기다리는 제이와 에이치를 집으로 보내고, 엄마와 함께 남았다. 2시간을 기다리니 응급병동 내부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내부 스크린엔 앞으로 우리가 진료를 보기까지 남은 대기시간이 적혀 있었다. 76분. 금방 진료를 볼 수 있겠지 싶었는데, 시간이 지날수록 대기시간은 점점 늘어 114분이 됐다. “엄마, 기다리다가 컨디션 더 나빠질 것 같은데 괜찮겠어?”라고 묻자 엄마는 “이젠 아픈 거 안 참을 거야”라고 말했다. ‘이상한 데서 결연하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엄마의 불안함을 해소하는 게 우선이었다. 응급실에서 한 검사는 채혈과 엑스레이 촬영이 전부였다. 뼈엔 이상이 없으니 당장 할 수 있는 조처는 없다고 했다. 5시간이 걸려 엄마가 처방받은 건 진통제와 근이완제 5일치가 전부였지만 이상 없다는 말에 엄마도 나도 안도했다.
앞으로 엄마가 응급실을 찾는 건 몇번이나 될까. ‘보호자의 커뮤니티’엔 나와 같은 두려움을 느끼는 글이 여럿 있었다. 진료 외 시간에 발생하는 응급 상황에 환자가 기댈 수 있는 곳은 응급실뿐인데 의료인력은 인기 전공에만 쏠린다는 뉴스가 자주 보인다. 한 의료 전문지에 따르면 전국 수련병원 44곳의 2023년 응급의학과 전공의 지원율은 85.9%로, 2021년에 비해 14.7%포인트 줄었다고 한다. 빅5 중에서도 미달 난 곳이 있었다. 엄마의 기저귀가 익숙해질까 봐, 새벽녘 응급실을 찾아 떠도는 때가 올까 봐 조금씩 두려워졌다.
소소
갑작스레 ‘엄마 돌봄’을 하게 된 케이(K)-장녀가 고령화사회에서 청년이 겪는 부모 돌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