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를 나와 길에서 세상을 배운 ‘로드스쿨러’ 이길보라 감독이 지난 13일 인터뷰를 마친 뒤 서울 마포구 홍익대학교 앞 거리를 배경으로 서 있다. 이길보라의 ‘이길’은 부모의 성씨이자, 길을 통해 세상을 배운 스스로의 성장 과정을 모두 아우르는 말이다. 강재훈 선임기자 khan@hani.co.kr
[토요판] 이진순의 열림
1990년대 중반쯤, 이큐(EQ) 열풍이 있었다. 지능지수(IQ)가 다가 아니고 감성지수(EQ)가 높아야 원만하고 성공적인 인간관계를 맺을 수 있다고 소개되면서, 웬만한 아동도서나 장난감에 ‘이큐를 높인다’는 광고문구가 삽입됐다. 이큐를 키워준다는 학원에서 하는 수업을 어쩌다 구경한 적이 있는데, 강사가 모차르트 음악을 틀어놓곤 “이게 무슨 느낌이지? 따사롭고 유쾌한 느낌!” 하면서 구구단 가르치듯 느낌을 암기시키는 걸 보고는 식겁한 적이 있다.
감성 개발 열풍은 이내 수그러들었지만, 교육이 ‘낱개로 포장된 완제품’으로 가공되고 판매되는 양상은 더 심해졌다. ‘자기주도학습’이 효과적이라고 하니까 그걸 가르치는 학원이 생기고, ‘사고력’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사고력 수학’이라는 이름으로 고난도 문제집이 쏟아져 나온다. 감성도, 자기주체성도, 사고력도 이제는 학원과 참고서에서 배우는 세상이다. 토막 내서 가공한 고등어 통조림을 따 먹듯이, 아이들은 패스트푸드 같은 교육을 사 먹고 자란다. 이런 세상에서 깡통에 담긴 교육을 거부하고, 싱싱한 ‘날것’의 배움과 탐험을 즐기는 젊은이들이 있다는 건 참 고마운 일이다.
이길보라(25) 감독은 날것의 가르침이 어떻게 인간을 성장시키는지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그는 고1 때 학교를 그만두고 8개월간 인도와 네팔, 타이와 베트남 등 아시아 8개국을 혼자 여행했다. 돌아와서는 자신과 같은 탈학교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한 중편 다큐 <로드스쿨러>(2008)를 제작했고 자신의 여행기를 담은 <길은 학교다>(2009)를 출간했다. 이달에는 청각장애인인 부모님과 자신의 가족사를 소재로 한 장편 다큐멘터리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일반에 개봉한다. 책가방 대신 40리터짜리 배낭을 메고 말도 통하지 않는 오지의 빈촌을 찾아다니는 동안 그는 길에서 무엇을 만나고 배웠을까. 스스로를 “로드스쿨러’(road schooler)라고 칭하는 이길보라를 봄비 내리던 지난 13일 서울 홍대 앞 찻집에서 만났다.
고1때부터 학교 나와 길 위에서
세상을 배운 ‘로드스쿨러’ 개척자
첫 다큐와 여행기 이어 이번엔
청각장애 부모와 가족사 소재의
장편다큐 <반짝이는 박수소리> “요즘 아이들이 꿈을 모른다고?
경험하는 게 학교와 학원뿐인데
상상할 꿈 없는 게 당연하지
더 많은 애들이 학교 그만두고
더 다양한 배움 기회들 허용돼야” 청각장애인 부부의 딸 “이 길을 보라!” 흰색 면바지에 찰랑이는 커트머리, 오래된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녀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곧 개봉할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언론시사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 감독이라고 해야 하나? 이길 감독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감독이라고 불리는 건 좀 어색하고… 그냥 ‘보라’라고 불리는 게 편하다.(웃음)” -본명이 이보라인데, 어머니 길경희씨의 성을 넣어 이길보라가 되었다. 언제부터 양 성을 썼나? “2012년인가 2013년인가, 어머니 얘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사실 ‘이보라’는 너무 흔한 이름인데, ‘이길보라’라고 쓰니 ‘이 길을 보라’ 하는 것처럼 어감도 좋고.(웃음)”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이지만 일반 극장 개봉은 처음인데, 떨리지 않나? “사람들이 많이 보러 왔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되든 ‘그게 이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운명이겠지’ 생각한다. 실제로 영화가 완성된 건 작년 5월이라서 1년 정도가 지나다 보니까 지금 이미 다른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 약간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 작업이 시대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까 궁금해하는 중이다.” -지금 하고 있는 다른 작업이라면? “새 다큐를 준비중인데 우리 할머니가 기억하는 전쟁 얘기다. 할머니는 ‘전쟁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전쟁은 니 할아버지가 알지’ 하시지만 할아버지 역시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셨을 거다. 전쟁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공적 기록이 되지 못하고 공적 역사가 되지 못하는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 -할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군인이셨나? “할아버지는 이혼비를 벌러 베트남에 갔었는데….” -이혼비를 벌러? “(끄덕끄덕) 할머니랑 이혼하려고. 젊고 잘생긴 할아버지는 못생긴데다 장애아를 둘이나 낳은 할머니를 데리고 사는 게 너무 싫었던 거다. 막상 돌아와서는 이혼하지 않고 교련 교사가 돼서 사셨지만…. 할머니는 그래도 ‘니 할아버지 덕에 내가 폐지 줍지 않고 사니 고맙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나? “고엽제 때문에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저런… 전쟁에서 돌아온 뒤 할아버지는 장애를 가진 자식들과 관계를 회복하셨나? “할아버지의 2남2녀 가운데 아빠와 작은아빠, 두 아들이 청각장애인데, 막상 공통된 언어가 없어서 대화를 거의 못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수화를 못하셨나? “못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놀라서) 그럼 어떻게 애들을 키우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엔 그게 당연한 거였다. 엄마, 아빠 모두 언어를 학습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수화는 나중에 특수학교 들어가서 선배들한테 배우셨다. 특수학교 교사도 수화를 못하니까 선생님한텐 못 배우고.” -특수학교 교사도 수화를 못한다고? “지금 한국 교육에서는 통합교육이라고 해서 다양한 장애아들을 통합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특수교사가 점자도 배우고 수화도 배우고, 이렇게 다 할 수가 없는 거다. 선생님은 계속 입으로 가르치니까 (청각장애) 애들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고…. 가정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니까 글자를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른다.” -청각장애는 다른 장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불편할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단 보고 다니는 데 별문제 없고 외견상으로도 표가 안 나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장애인의 날 되면 장애 체험 같은 걸 하는데, 다른 장애와 달리 청각장애는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애가 아니다. (귀 막는 시늉)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리지 않나? 잠을 자면서도 우린 자명종 소리를 듣는데,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해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랑 농인(聾人·청각장애인)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다.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이 박사까지 받는 경우는 여럿 있었지만, 청각장애는 한 명 있던가? 사회적 불만이나 요구가 있어도 언어가 다르니까 사회에 노출이 안 된다. 기자나 이런 사람들이 (수화를) 못 알아들으니까.” 엄마 아빠가 당당했기에 밝게 자랐다 이길보라는 1990년 경기도 부천에서 청각장애인 이상국씨와 길경희씨의 첫아이로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엄마 아빠는 낮이나 밤이나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불침번을 서다시피 하며 그를 지켰다. 다른 아이들이 옹알이를 할 때 수화의 손동작을 먼저 배웠던 보라는, 유치원에 가서야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가 사는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소리의 세계’는 서로 겉돌고 때로는 충돌했다. 그 사이를 중재하고 통역하면서 보라는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수화를 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가 이번 추석에 뭐 가지고 오라셔” 하고 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고, 은행에 대출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새로 들어갈 집의 보증금이 얼마인지 전화로 알아보는 것도 아홉 살 난 그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손재주 많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목수일 나가던 곳이 아이엠에프(IMF)로 주저앉자 호떡 장사, 풀빵 장사, 장난감 노점상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얼마 전부터는 안성시 농아인협회 지부장으로 주중에 일하고 주말엔 오산 미군부대에서 나가 혁필(革筆) 그림을 그려 판다. 생계 때문에 이사를 수시로 다니는 곤궁한 살림이었지만, 보라는 공부 잘하고 친구 많은 밝은 아이로 커 나갔다. 안성 광덕초와 명륜여중에서 내리 전교 회장을 했고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안산의 명문, 동산고로 진학했다. -남들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별한 마음가짐이 있었나보다. “상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하는 칭찬은 그런 거였다. ‘엄마 아빠가 장애가 있는데도 네가 이 상을 받았구나!’ 반면에 내가 어떤 꾸중 들을 일을 하면, ‘너는 부모님이 장애인인데 이렇게 해서 되겠니?’ 하고….” -칭찬도, 꾸중도 가중치가 붙고. “(고개 끄덕이며) 그걸 어릴 때부터 깨친 거다.” -이번에 개봉하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재밌게 봤다(수화로 ‘박수’는 양손을 펴 머리 높이로 올린 뒤 손목을 흔드는 동작이다). 남동생 광희가 학교에서 부모님 장애 때문에 왕따를 당했을 때, 그것에 항의하는 어머니 모습이 굉장히 단호하고 당당한 게 인상적이었다. 그럴 때 부모가 ‘나 때문에 미안하다’ 어쩌고 하면서 울고불고하면 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게 진짜 중요한 것 같다. 나랑 동생이 밝게 자랄 수 있었던 건 엄마 아빠가 그렇게 당당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기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면 길거리에서 나한테 수화를 통역하라고 시키지 않았겠지. 엄마가 시키니까 마지못해 하긴 했는데, 엄마 태도가 워낙 당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걸 보고 배우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 우리 엄마 아빠, 장애 있는데 뭐가 어때서?’ 이런 식으로.” -그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모범생이 고1을 마친 뒤 학교를 그만뒀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때까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학교를 잠시 휴학한다’는 생각이었다. 1년 동안 어학연수로 미국에 가 있다가 1년 꿇고 돌아오는 언니들도 학교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잠시 다른 공부를 하러 떠나는 거라 여겼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엔지오(NGO) 활동가나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고 싶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아이들, 분쟁지역 여자들을 만나고 싶어서. 근데 피디가 되려면 그 전에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거다. 입시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방송사에 입사하고, 그러고도 조연출 시절 몇 년 끝내야 비로소 피디가 될 수 있으니까. 난 단순히 피디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었던 건데, 그걸 위해서 별 연관 없는 공부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엔지오 활동가나 다큐 감독이 되고 싶단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어떤 롤 모델이 있었나? “그때는 당연히 ‘한비야’였다.(웃음) 그때 모든 아이들이 읽는 책은 한비야였으니까.” -한비야씨가 아주 큰일을 하셨네.(웃음) 만류하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몇 달에 걸쳐 여행계획서를 꼼꼼히 작성하고 주변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여행비를 후원받았다. 막상 부딪혀 본 바깥세상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았다. 인도의 ‘마더 테레사 하우스’나 네팔의 티베트 난민촌에 자원봉사를 하며 머무를 때는, 같은 목적으로 그곳을 찾은 한국 젊은이들을 적잖이 만날 수 있었다. 배낭을 메고 길에 나서서 스스로 가난해진 모든 이들이 보라의 든든한 동반자였고 현지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보라의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8개월 동안 보라는 낯선 곳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가난한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현지어를 익히고 뛰어놀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생은 너무 짧은데 벌써 지치면 안 되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보라는 학교로 돌아가기를 단념했다. “한 움큼 외롭지만 한 움큼 자유로운 배움”의 기쁨을 알아버린 그에게, 하자센터의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글쓰기반 김현아 선생님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글을 쓰고 영상물을 만들면서 이길보라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행복하게 공부에 빠져들 수 있었다. 2009년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그의 배움은 길 위에서 계속된다. -사춘기 10대 아이를 둔 엄마 입장에서 물어보고 싶다. 내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졌어, 여행을 떠날 거야” 한다면 난 뭐라고 할까. 누구처럼 혼자 내버려둬도 공부 잘하고 학생회장도 하고, 어디 갖다놔도 쟤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믿음이 가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로써 흔쾌히 응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로드스쿨러 하면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다. 자기주장이나 신념이 확고한 애들도 있지만, 그냥 학교가 싫어서 그만둔 애들도 많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 3개월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실컷 한다. 3개월 동안 게임만 하기도 하고 잠만 내리 자기도 하고. 근데 하다 보면 그것도 지쳐버린다. 그러곤 스스로 자기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아, 이제 학교도 안 다니는데 앞으로 벌이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살지?’ 아무도 날 책임져 주지 않는구나 하는 불안함이 그 아이를 더 성숙하게 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새 길을 내게 만든다.” -자기주장이 강렬하거나 아예 엇나가는 경우라면 오히려 결심하기가 쉬운데, 문제는 어중간하게 이도 저도 아니고 자기 꿈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다. “근데 그거는 당연하다.” -당연하다고? “경험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경험하는 게 학교 학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꿈을 상상하고 경험하나? 난 더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교육이 변해야 하지만, 그 공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배움의 기회들이 허용되어야 한다. 다양한 대안학교도 많아져야 하고 학교를 안 다니는 애들도 많아지고 공교육을 선택하는 애들도 여기저기 색깔 있는 학교를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스스로 한 선택에 대해 회의가 들거나 후회한 적은 없나? “(단호하게) 없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내겐 선생이었다. 세상이 학교였다. 우리는 어려서 아이엠에프를 겪고 부모가 주저앉는 걸 보면서 자란 세대다. ‘저렇게 되면 우리가 밥을 굶는구나’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기성세대는 짱돌, 화염병이라도 던져본 연대의 경험이 있지만 우린 애당초 연대하는 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저 아이를 밟고 일어서야 내가 산다’고 배워왔다. 2008년 촛불집회에도 열심히 나갔는데 ‘세상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구나’ 절감했다. 내가 길에서 배운 건,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 우리의 생은 너무 짧은데 한 것도 없이 벌써 지치면 안 된다는 거, 친구들과 연대해서 우리가 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는 거다. 우리의 30대는 지금 세상과 달라야 한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그러나 차분하게 그가 말했다. 유리창에 빗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광화문광장에서 애태우는 누군가의 눈물처럼…. 배움을 포기한 건 학교를 그만둔 보라 같은 아이들이 아니고, 길에서 배우기를 멈췄던 우리들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생은 너무 짧은데 벌써 지치면 안 되는 걸.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 이진순 언론학 박사. 전직 교수. 살림하고 애 키우는 오십대 아줌마이자 공부하고 글 쓰는 열혈시민이다. 서울대 사회학과와 럿거스대 커뮤니케이션스쿨을 졸업했다. 미국 올드도미니언대학 조교수로 인터넷 기반의 시민운동을 강의했고 그 전에는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등 다큐멘터리 작가로 다양한 인물을 취재했다. 세상의 새 지평을 여는 ‘열린 사람들과의 어울림’(열림)을 격주로 전한다.
세상을 배운 ‘로드스쿨러’ 개척자
첫 다큐와 여행기 이어 이번엔
청각장애 부모와 가족사 소재의
장편다큐 <반짝이는 박수소리> “요즘 아이들이 꿈을 모른다고?
경험하는 게 학교와 학원뿐인데
상상할 꿈 없는 게 당연하지
더 많은 애들이 학교 그만두고
더 다양한 배움 기회들 허용돼야” 청각장애인 부부의 딸 “이 길을 보라!” 흰색 면바지에 찰랑이는 커트머리, 오래된 스포츠 가방을 어깨에 메고 그녀가 씩씩하게 걸어 들어왔다. 곧 개봉할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언론시사회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이 감독이라고 해야 하나? 이길 감독이라고 해야 하나?(웃음) “감독이라고 불리는 건 좀 어색하고… 그냥 ‘보라’라고 불리는 게 편하다.(웃음)” -본명이 이보라인데, 어머니 길경희씨의 성을 넣어 이길보라가 되었다. 언제부터 양 성을 썼나? “2012년인가 2013년인가, 어머니 얘기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을 때부터다. 사실 ‘이보라’는 너무 흔한 이름인데, ‘이길보라’라고 쓰니 ‘이 길을 보라’ 하는 것처럼 어감도 좋고.(웃음)” -이번이 두 번째 작품이지만 일반 극장 개봉은 처음인데, 떨리지 않나? “사람들이 많이 보러 왔으면 좋겠지만… 어떻게 되든 ‘그게 이 <반짝이는 박수 소리>의 운명이겠지’ 생각한다. 실제로 영화가 완성된 건 작년 5월이라서 1년 정도가 지나다 보니까 지금 이미 다른 작업을 하고 있기도 하고. 약간 거리두기를 하면서 이 작업이 시대와 사람들을 어떻게 만날까 궁금해하는 중이다.” -지금 하고 있는 다른 작업이라면? “새 다큐를 준비중인데 우리 할머니가 기억하는 전쟁 얘기다. 할머니는 ‘전쟁에 대해선 잘 모른다’고, ‘전쟁은 니 할아버지가 알지’ 하시지만 할아버지 역시 전쟁에 대해서 잘 모르셨을 거다. 전쟁 언저리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공적 기록이 되지 못하고 공적 역사가 되지 못하는 전쟁 이야기를 다루고 싶다.” -할아버지가 베트남 참전 군인이셨나? “할아버지는 이혼비를 벌러 베트남에 갔었는데….” -이혼비를 벌러? “(끄덕끄덕) 할머니랑 이혼하려고. 젊고 잘생긴 할아버지는 못생긴데다 장애아를 둘이나 낳은 할머니를 데리고 사는 게 너무 싫었던 거다. 막상 돌아와서는 이혼하지 않고 교련 교사가 돼서 사셨지만…. 할머니는 그래도 ‘니 할아버지 덕에 내가 폐지 줍지 않고 사니 고맙다’고 하신다.” -할아버지는 돌아가셨나? “고엽제 때문에 암에 걸려 돌아가셨다.” -저런… 전쟁에서 돌아온 뒤 할아버지는 장애를 가진 자식들과 관계를 회복하셨나? “할아버지의 2남2녀 가운데 아빠와 작은아빠, 두 아들이 청각장애인데, 막상 공통된 언어가 없어서 대화를 거의 못하셨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수화를 못하셨나? “못하셨다. 할아버지, 할머니 두 분 다.” -(놀라서) 그럼 어떻게 애들을 키우나? “이해가 안 되는 일이지만 그 당시엔 그게 당연한 거였다. 엄마, 아빠 모두 언어를 학습하지 못한 채 어린 시절을 보내셨고, 수화는 나중에 특수학교 들어가서 선배들한테 배우셨다. 특수학교 교사도 수화를 못하니까 선생님한텐 못 배우고.” -특수학교 교사도 수화를 못한다고? “지금 한국 교육에서는 통합교육이라고 해서 다양한 장애아들을 통합해서 가르치는 경우가 많은데, 특수교사가 점자도 배우고 수화도 배우고, 이렇게 다 할 수가 없는 거다. 선생님은 계속 입으로 가르치니까 (청각장애) 애들은 수업시간에 엎드려 자고…. 가정이나 학교에서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하니까 글자를 읽어도 이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모른다.” -청각장애는 다른 장애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불편할 것이란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일단 보고 다니는 데 별문제 없고 외견상으로도 표가 안 나니까. “절대 그렇지 않다. 장애인의 날 되면 장애 체험 같은 걸 하는데, 다른 장애와 달리 청각장애는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애가 아니다. (귀 막는 시늉) 아무리 귀를 막아도 들리지 않나? 잠을 자면서도 우린 자명종 소리를 듣는데, 완전히 들리지 않는 경험을 해본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우리랑 농인(聾人·청각장애인)들은 완전히 다른 세계에 있다. 우리나라에 시각장애인이 박사까지 받는 경우는 여럿 있었지만, 청각장애는 한 명 있던가? 사회적 불만이나 요구가 있어도 언어가 다르니까 사회에 노출이 안 된다. 기자나 이런 사람들이 (수화를) 못 알아들으니까.” 엄마 아빠가 당당했기에 밝게 자랐다 이길보라는 1990년 경기도 부천에서 청각장애인 이상국씨와 길경희씨의 첫아이로 태어났다. 아이의 울음소리를 들을 수 없었던 엄마 아빠는 낮이나 밤이나 아이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불침번을 서다시피 하며 그를 지켰다. 다른 아이들이 옹알이를 할 때 수화의 손동작을 먼저 배웠던 보라는, 유치원에 가서야 말을 배우기 시작했다. 부모가 사는 ‘침묵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소리의 세계’는 서로 겉돌고 때로는 충돌했다. 그 사이를 중재하고 통역하면서 보라는 남들보다 빨리 어른이 되어야 했다. 수화를 하지 못하는 할머니를 대신해서 “할머니가 이번 추석에 뭐 가지고 오라셔” 하고 전하는 것도 그의 몫이었고, 은행에 대출금이 얼마나 남았는지, 새로 들어갈 집의 보증금이 얼마인지 전화로 알아보는 것도 아홉 살 난 그의 몫이었다. 아버지는 손재주 많고 부지런한 사람이었지만, 목수일 나가던 곳이 아이엠에프(IMF)로 주저앉자 호떡 장사, 풀빵 장사, 장난감 노점상을 하면서 가족을 부양했다. 얼마 전부터는 안성시 농아인협회 지부장으로 주중에 일하고 주말엔 오산 미군부대에서 나가 혁필(革筆) 그림을 그려 판다. 생계 때문에 이사를 수시로 다니는 곤궁한 살림이었지만, 보라는 공부 잘하고 친구 많은 밝은 아이로 커 나갔다. 안성 광덕초와 명륜여중에서 내리 전교 회장을 했고 당시 비평준화 지역이었던 안산의 명문, 동산고로 진학했다. -남들보다 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는 각별한 마음가짐이 있었나보다. “상을 받으면 기분이 좋았다. 사람들이 하는 칭찬은 그런 거였다. ‘엄마 아빠가 장애가 있는데도 네가 이 상을 받았구나!’ 반면에 내가 어떤 꾸중 들을 일을 하면, ‘너는 부모님이 장애인인데 이렇게 해서 되겠니?’ 하고….” -칭찬도, 꾸중도 가중치가 붙고. “(고개 끄덕이며) 그걸 어릴 때부터 깨친 거다.” -이번에 개봉하는 <반짝이는 박수 소리>를 재밌게 봤다(수화로 ‘박수’는 양손을 펴 머리 높이로 올린 뒤 손목을 흔드는 동작이다). 남동생 광희가 학교에서 부모님 장애 때문에 왕따를 당했을 때, 그것에 항의하는 어머니 모습이 굉장히 단호하고 당당한 게 인상적이었다. 그럴 때 부모가 ‘나 때문에 미안하다’ 어쩌고 하면서 울고불고하면 더 상처가 되었을 수도 있는데. “그게 진짜 중요한 것 같다. 나랑 동생이 밝게 자랄 수 있었던 건 엄마 아빠가 그렇게 당당했기 때문이다. 엄마가 자기 스스로를 부끄러워했다면 길거리에서 나한테 수화를 통역하라고 시키지 않았겠지. 엄마가 시키니까 마지못해 하긴 했는데, 엄마 태도가 워낙 당당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그걸 보고 배우게 되었던 것 같다. ‘그래, 우리 엄마 아빠, 장애 있는데 뭐가 어때서?’ 이런 식으로.” -그렇게 공부 잘하고 똑똑했던 모범생이 고1을 마친 뒤 학교를 그만뒀다. 무슨 일이 있었나? “그때까진 학교를 그만두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고 ‘학교를 잠시 휴학한다’는 생각이었다. 1년 동안 어학연수로 미국에 가 있다가 1년 꿇고 돌아오는 언니들도 학교에서 본 적이 있어서. 그렇게 잠시 다른 공부를 하러 떠나는 거라 여겼다.” -무슨 공부를 하고 싶었는데? “엔지오(NGO) 활동가나 다큐멘터리 피디가 되고 싶었다.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아이들, 분쟁지역 여자들을 만나고 싶어서. 근데 피디가 되려면 그 전에 해야 하는 일이 너무 많은 거다. 입시공부 열심히 해서 대학 가고,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해서 방송사에 입사하고, 그러고도 조연출 시절 몇 년 끝내야 비로소 피디가 될 수 있으니까. 난 단순히 피디가 되고 싶은 게 아니라 ‘사람들을 위한 활동’을 하고 싶었던 건데, 그걸 위해서 별 연관 없는 공부로 시간을 보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엔지오 활동가나 다큐 감독이 되고 싶단 생각은 언제부터 했나? 어떤 롤 모델이 있었나? “그때는 당연히 ‘한비야’였다.(웃음) 그때 모든 아이들이 읽는 책은 한비야였으니까.” -한비야씨가 아주 큰일을 하셨네.(웃음) 만류하는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서 몇 달에 걸쳐 여행계획서를 꼼꼼히 작성하고 주변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여행비를 후원받았다. 막상 부딪혀 본 바깥세상은 어른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위험하진 않았다. 인도의 ‘마더 테레사 하우스’나 네팔의 티베트 난민촌에 자원봉사를 하며 머무를 때는, 같은 목적으로 그곳을 찾은 한국 젊은이들을 적잖이 만날 수 있었다. 배낭을 메고 길에 나서서 스스로 가난해진 모든 이들이 보라의 든든한 동반자였고 현지에서 마주치는 모든 것들이 보라의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다. 8개월 동안 보라는 낯선 곳의 역사와 문화를 배우고 가난한 아이들과 소통하기 위해 현지어를 익히고 뛰어놀며 글을 쓰고 사진을 찍었다. “생은 너무 짧은데 벌써 지치면 안 되지” 다시 한국에 돌아왔을 때, 보라는 학교로 돌아가기를 단념했다. “한 움큼 외롭지만 한 움큼 자유로운 배움”의 기쁨을 알아버린 그에게, 하자센터의 탈학교 청소년을 위한 글쓰기반 김현아 선생님을 만난 건 큰 행운이었다. 친구들과 여행을 하고 스스로 커리큘럼을 짜서 글을 쓰고 영상물을 만들면서 이길보라는 그 누구보다 치열하고 행복하게 공부에 빠져들 수 있었다. 2009년 그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입학했지만 여전히 그의 배움은 길 위에서 계속된다. -사춘기 10대 아이를 둔 엄마 입장에서 물어보고 싶다. 내 아이가 어느 날 갑자기 “엄마, 나 학교 가기 싫어졌어, 여행을 떠날 거야” 한다면 난 뭐라고 할까. 누구처럼 혼자 내버려둬도 공부 잘하고 학생회장도 하고, 어디 갖다놔도 쟤는 혼자서도 잘할 수 있다고 믿음이 가게 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부모로써 흔쾌히 응원하기 어려울 것 같다. “로드스쿨러 하면서 다양한 친구들을 만났다. 자기주장이나 신념이 확고한 애들도 있지만, 그냥 학교가 싫어서 그만둔 애들도 많다. 학교를 그만두고 한 3개월은 자기가 하고 싶은 걸 실컷 한다. 3개월 동안 게임만 하기도 하고 잠만 내리 자기도 하고. 근데 하다 보면 그것도 지쳐버린다. 그러곤 스스로 자기 걱정을 하기 시작한다. ‘아, 이제 학교도 안 다니는데 앞으로 벌이는 어떻게 하지, 어떻게 살지?’ 아무도 날 책임져 주지 않는구나 하는 불안함이 그 아이를 더 성숙하게 하고 자기 인생에 대해서 어떤 식으로든 새 길을 내게 만든다.” -자기주장이 강렬하거나 아예 엇나가는 경우라면 오히려 결심하기가 쉬운데, 문제는 어중간하게 이도 저도 아니고 자기 꿈이 뭔지도 모르겠다고 하는 경우다. “근데 그거는 당연하다.” -당연하다고? “경험하는 게 하나도 없으니까. 경험하는 게 학교 학원 말고는 아무것도 없는데 어떻게 꿈을 상상하고 경험하나? 난 더 많은 아이들이 학교를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공교육이 변해야 하지만, 그 공교육을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배움의 기회들이 허용되어야 한다. 다양한 대안학교도 많아져야 하고 학교를 안 다니는 애들도 많아지고 공교육을 선택하는 애들도 여기저기 색깔 있는 학교를 선택해서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 스스로 한 선택에 대해 회의가 들거나 후회한 적은 없나? “(단호하게) 없다. 길에서 만나는 모든 것들이 내겐 선생이었다. 세상이 학교였다. 우리는 어려서 아이엠에프를 겪고 부모가 주저앉는 걸 보면서 자란 세대다. ‘저렇게 되면 우리가 밥을 굶는구나’ 온몸으로 체험하면서…. 기성세대는 짱돌, 화염병이라도 던져본 연대의 경험이 있지만 우린 애당초 연대하는 법을 경험하지 못한 채 ‘저 아이를 밟고 일어서야 내가 산다’고 배워왔다. 2008년 촛불집회에도 열심히 나갔는데 ‘세상은 쉽게 바뀌는 게 아니구나’ 절감했다. 내가 길에서 배운 건, 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 한다는 거, 우리의 생은 너무 짧은데 한 것도 없이 벌써 지치면 안 된다는 거, 친구들과 연대해서 우리가 살, 더 나은 공동체를 만들어야겠다는 거다. 우리의 30대는 지금 세상과 달라야 한다.”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또박또박 그러나 차분하게 그가 말했다. 유리창에 빗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 광화문광장에서 애태우는 누군가의 눈물처럼…. 배움을 포기한 건 학교를 그만둔 보라 같은 아이들이 아니고, 길에서 배우기를 멈췄던 우리들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생은 너무 짧은데 벌써 지치면 안 되는 걸. 녹취 함규원(세명대 저널리즘스쿨대학원)
이진순 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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