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S] 커버스토리
'코로나 재유행' 중증장애인 24시
1차 대유행 당시 대구서 생존 위기 넘겼던 노금호·김시형씨
“‘중증장애인에 생쌀’ 엉터리 대책 버텼는데 6차 대유행엔 한계”
다시 시작된 비상상황 “2년 전엔 막막 이젠 절망…생존대책 마련돼야”
'코로나 재유행' 중증장애인 24시
1차 대유행 당시 대구서 생존 위기 넘겼던 노금호·김시형씨
“‘중증장애인에 생쌀’ 엉터리 대책 버텼는데 6차 대유행엔 한계”
다시 시작된 비상상황 “2년 전엔 막막 이젠 절망…생존대책 마련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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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에 걸려(도) 마음 놓고 아플 수 없다니까요. 무슨 말인지 아시겠어요?”
지난 18일 대구에서 김시형(39)씨를 만났다. 그는 선천적 뇌병변 장애를 갖고 있다. “마음 편히 아플 권리”를 말하며 “코로나19에 걸리는 것보다 걸린 다음이 더 무섭다”고 했다. 2020년 2월 대구 1차 대유행 속에서 자가격리를 경험한 뒤, 감염 걱정에 2년째 혼자 밥을 먹고 있다. 집에선 덮밥과 김밥 딱 두 가지 메뉴로만, 포장주문해서 먹는다. 지난봄 거리두기 완화 분위기로 단 한번 지인과 식사를 한 적이 있다. 그때 먹은 볶음밥과 탕수육을 다시 먹을 수 있을까. 그는 날이 바짝 서 있었다. “다시 대유행이 오면 침몰하는 배가 될 것”이라고 빗댔다. 이어 만난 노금호(40)씨는 “한계”, “자포자기 상태”라고 했다. 두 사람은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자립센터)에서 일한다. 김씨는 팀장, 노씨는 이사장이다. 이들이 관여하는 장애인만 90명을 넘어선다. 이 가운데 중증 장애인이 9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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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유행 진원지, 대구에서의 삶 중앙방역대책본부가 8월 중순 이후 6차 대유행을 예고했다. <한겨레>는 대구 신천지 교회발 코로나19 1차 대유행 들머리였던 2020년 2월, 당시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타전된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드리는 긴급구호 요청’부터 되짚어보기로 했다. “센터에서 마스크 300장 정도가 당장 필요했는데 구할 곳이 없었”던 노금호 이사장이 나선 일이었다. 정부가 사회복지시설에 마스크 우선 공급 원칙을 밝혔지만, 자립센터 등 몇몇 단체가 제외됐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지만 장애인복지법상 시설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연희 자립센터 사무국장이 “지도점검을 받을 때는 사회복지시설이고, 마스크 줄 때는 시설이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구호요청에는 “돈을 드려서 구입하고 싶어도 구입이 불가능하다”며 마스크, 손소독제 등 구호물품을 나누자는 호소가 담겼다. 구호요청 이틀 뒤인 2월23일 자립센터에도 양성판정 통보(활동지원사)가 날아들었다. 마스크 공급 때와 달리 보건당국은 통보 한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자립센터 2개 층을 폐쇄했다. 곧바로 자가격리 대상 29명을 담은 명단도 전달됐다. 자립센터에 비상이 걸렸다. 격리 대상 중 12명이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최중증 장애인이었다. 당시 병보다 빨리 퍼진 공포로 인해 돌봄인력 배치가 쉽지 않았다. 정확한 감염경로부터 치명률 등 확실한 정보가 축적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격리 대상인 상근 직원 중 일부가 장애인 활동지원사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마저도 인원이 모자랐다. 결국 지원 인력 등을 고려해 센터가 운영하는 자립주택 2곳으로 남녀를 구분해 옮겼다.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사람과 버티기도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해야 했”다.(노 이사장) 활동 보조 없이 사실상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이들을 가르는 과정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이때 김시형씨가 손을 들었다.
“죽지 않을 만큼만 생활하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복지부(질병관리본부)에서 자가격리를 하라고만 했지, 다른 대책을 말해주진 않았으니까. (생활 지원은) 누가 하고, 방호복은 누가 주며, 활동지원 시간은 어떻게 짜고, 수당은 어떻게 지급하는지 정부가 결정을 해야 하는 문제가 한두가지가 아닌데 답이 없으니, 스스로 살아남을 수밖에요.”(김시형)
하루 한 끼만 먹기로 한 것도 버티기 위한 방법 중 하나였다. 음식물 쓰레기를 처리할 수 있는 여건이 안 되니 배달 주문을 할 때 “반찬 없이 달라”고 매번 신신당부를 해야 했다. 초인종이 울리면 문 앞 음식을 들고 와 자리에 앉아 포장을 풀고 다시 내놓기까지 두시간이 걸렸다. 비장애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연결 동작이지만 그는 심혈을 기울여 한 단계씩 나아가야 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정이 알려지면서 언론 인터뷰가 쇄도했다. 섬처럼 고립된 일곱평 삶이 중계되기 시작했다. 거기까지였다. 언론 보도는 자신이 겪는 (겪어서는 안 될) 고통보다 늦게 끓고 빨리 식었다.
“뭐, 거창한 정책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는데, 장애인 자가격리를 이해하는 수준의 실질적인 대책이 나왔어야는데 ‘그 사람들 안됐네’ 식 보도만 쏟아졌죠. 그리고 끝이더라고요.”(노 이사장)
당국이 김씨에게 구호물품으로 생쌀과 배추를 건넨 사례가 대표적이다. 정작 김씨가 스스로 먹을 만한 간편식을 보내온 건 당국이 아닌 시민들이었다. 김씨의 고통은 또 있었다. 검사 없이 시간이 흘러갔다. 일주일이 지나니 불안과 공포가 더해졌다. 세상은 온통 신천지 교회에만 관심을 기울였다. 방문검사를 요구한 관할 보건소는 신천지 전수조사로 업무가 마비된 상태였다. 다른 인근 보건소는 확진자가 나와 폐쇄조처됐다. 결국 자립센터가 대구경북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에 도움을 요청하면서 실마리가 풀렸다. 인의협은 대구의료원 검사를 주선했다. 결국 이동수단을 해결하지 못해 자립센터 차량을 이용했다. 10명은 8일 만에 검사를 받았다.
“신천지 교인 몇천명을 찾아내 검사하느라 장애인 몇명 검사를 못 한다는 걸 어떻게 생각하나요? 재난이 왔다, 누구부터 구해야 하죠? 여성이나 노약자, 장애인…, 사회적 약자부터 아니에요?”(김시형)
그는 여전히 분이 풀리지 않는 듯했다. 당시 방문검사를 도운 김동은 인의협 기획국장(계명대 동산병원 이비인후과 교수)은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중증 장애인만 아니라 비장애인 확진자 및 자가격리자에 대한 정부나 시의 대응 매뉴얼 자체가 없었다. 코로나19 전담 병원이라고 다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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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뉴얼은 만들어졌지만… 매뉴얼이 만들어진 건 대구 대유행이 잦아들 무렵인 2020년 4월이었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장애인 대상 감염병 대응 매뉴얼―코로나19를 중심으로’를 보면 △의사소통 제약 △이동 제약 △감염 취약 △밀접돌봄 △집단활동 등 유형별로 구분했고, 대상별로 기존 지원 공백을 막기 위한 대책이 빼곡하다. 하지만 김시형씨는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때도 (장애인 단체에서) 소송까지 해가며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주장했다. 강제력이 없는 매뉴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동은 기획국장 또한 “현장이 (복지부) 매뉴얼대로 돌아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듬해 2~4차 대유행에서 대구는 ‘안전지대’로 여겨졌다. 자립센터 등 장애인 시설에 다시 비상이 걸린 건 지난 2월 대유행이 전국화되면서다. 2월에 들어서자 하루 확진자가 2천명을 넘어섰다. 이를 예견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활동지원사에게 긴급지원 의사를 미리 받아놨어요. 2년 전처럼 대규모 확진 상황이 오면 담당하는 장애인(이용자)과 함께 격리돼 생활을 보조할 수 있도록요.”(이연희 사무국장) 하지만 대유행이 본격화되면서 민간이 마련한 자구책만으로 돌봄 체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긴 버거웠다. ㄱ씨(50대 남성)가 확진된 것도 그즈음이다. ㄱ씨 활동지원사가 확진됐다는 통보가 센터에 전해진 지 하루 만에 ㄱ씨에게 의심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ㄱ씨는 중증 장애인으로 홀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기 어려웠고, 보건소 쪽에 방문검사를 요구하는 것 또한 사실상 불가능했다. ㄱ씨 감염 여부 확인과 돌봄 공백 해결은 자립센터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ㄱ씨에겐 센터에서 미리 지정한 긴급지원 인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돌봄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확진자’를 위한 구청 긴급돌봄 프로그램을 신청해야 했다. 전양숙 자립센터 활동지원사업 팀장이 직접 나섰다. 전 팀장은 관할 보건소를 시작으로 대구지역 모든 보건소 홈페이지를 열어, 모든 부서에 차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모두 먹통이었다. 20여분이 흘렀을까. 가까스로 연결된 관할 보건소에서 “자가검사키트 양성이 나와야 (방문검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담당 공무원은 원칙을 앞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실랑이를 할 여유가 없었다. 전 팀장은 센터 밖으로 달렸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가키트를 어떻게 구입하며, 손이 경직돼 식사도 못 하는 분이 어떻게 코에 검사키트를 집어넣느냐(고 따졌어요). 그래도 원칙, 저래도 원칙, 원칙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 안 되겠더라고요. 정말 키트 양성반응만 있으면 와주겠느냐고 몇차례 다짐을 받고 나섰죠.” 전 팀장이 직접 자가검사키트로 양성을 확인한 뒤 다시 보건소에 연락을 했다. 그나마 이튿날 오후 방문검사가 이뤄졌다. 그사이 돌봄 공백은 사흘이 됐다. 구청 긴급지원(프로그램)인 ‘사회서비스원’도 곧바로 가동되지 않았다. 다시 한나절을 기다려 인력을 배정받았다. 다만 자가격리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면 안 되고, 분리해 숙식할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는 등 조건이 붙었다. 전 팀장이 ㄱ씨 의사를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ㄱ씨는 “혼자 버텨보겠다”고 했다. 전 팀장은 “2년 전 준비가 없던 시절과 달라진 게 무엇이 있나 싶다”고 했다. 혼란 속 대유행의 기세는 맹렬했다. 센터에서 감염자가 속출했다. 이번에는 노금호 이사장도 감염을 피하지 못했다. 2월, 그의 척수성 근위축 질환 주사치료가 시작될 때쯤이다. “걸리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걸린 다음이에요.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 안심하고 아플 수도 없었어요.”(노 이사장) 자가격리 기간과 주사치료를 받아야 하는 기간이 겹쳤다. 하지만 치료를 받던 병원은 치료 연기 여부, 치료 시 음압병동 입원 여부 등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당장 코로나로 아픈 거는 생각지도 못 했죠. 주사를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를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요.” 확진받은 중증 장애인이 기저질환을 치료받기 위한 절차는 까다롭고 복잡했다. 입원이 결정된 뒤로도 장애인 리프트 등 개인 보조기구 반입, 지원인력 동반 입원 등 일일이 별도의 판단을 구해야 했다. 매뉴얼 자체의 공백과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권장(합의)사항이 주는 공백을 돌파해야 하는 건 개인의 몫이었다. 노 이사장이 확진 뒤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들어가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국립재활원이 2021년 6월 내놓은 ‘장애인의 코로나19 경험과 문제점―장애인과 비장애인 비교 및 장애유형별 조사 결과’를 보면 코로나19 발생 이후 건강 문제가 생기거나 건강이 악화된 비율은 장애인(14.7%)이 비장애인(9.9%)보다 높게 나타났다. 그럼에도 건강 문제로 진료를 받은 비율은 장애인(36.8%)이 비장애인(52.5%)보다 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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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에는 막막, 올핸 절망했다 18일 저녁 노 이사장 집을 찾았다. 그의 집에는 침대가 두개, 장애인 리프트도 하나 더 있다. “혹시 고장이 나면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다. “코로나19 전에는 괜찮았는데, 그나마 쓰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대유행이 오고 있습니다. 지난 2년 변화는 없었나요. “확산되면 또 똑같아질 거 같아요. 2년 동안 그렇게 (자가격리 등) 되고 저희 단체도 적극적으로 언론에 알리고 정부와 교섭도 하고 그랬는데, 2월 대유행 때 보니 매뉴얼대로 조처가 이뤄지는 지자체가 없더라고요. 저도 경험한 것이고요.” ―대유행의 양상은 다를 텐데요. “2020년에는 막막했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뭐든 해야 될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뭘 해야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국가가, 사회가 아무런 조처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거? 거기에서 오는 절망? 이렇게 가면 장애인은 생존할 수 없겠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걸 하나만 꼽는다면요. “질문 자체가 틀렸어요. 뭐 하나 바뀐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어요. 재난을 겪어보니 상황은 개별적이고,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런 주체가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죠. 줄기차게 컨트롤타워 좀 만들자고 한 게 벌써 2년이 흘렀는데, 대책 없이 또 대유행이 오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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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온 대유행, 일상은 지켜질까 19일 아침 7시, 이번에는 출근하는 활동지원사 조요한(28)씨를 따라 김시형씨 집에 들어섰다. 7평 남짓 평범한 원룸으로, 2년 전 홀로 자가격리를 했을 때도 이 집에 살았다. 요한씨와 함께 들어서자 시형씨가 힘겹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 침대에 앉은 뒤 요한씨를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하나둘셋, 끙.” 맞잡은 두 사람의 오른손이 세번의 리듬을 타고 힘을 주고받는다. 그사이 시형씨 공간이 침대에서 휠체어로 뒤바뀐다. 얼핏 이 과정이 단순해 보이지만 이 리듬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만도 한달이 넘게 걸렸다. 곧이어 요한씨는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 뒤 빨래를 갠다. 시형씨는 “보름 중 방호복을 입은 자립센터 동료 덕분에 그래도 쓰레기는 두번 치웠는데, 빨래는 어려웠다”고 했다. 시형씨가 먹을 아침(선식)과 약을 챙긴다. 순서가 정해져 있어 둘은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 다시 요한씨가 위장약, (목)디스크약, 영양제 등이 나란히 깔린 탁자 앞에 자리한다. 요한씨가 시형씨 양손에 약을 담으면 시형씨는 이를 힘겹게 삼킨다. 시형씨는 “자가격리 중에는 이 약을 전부 챙겨 먹기 어려워 디스크약만 겨우 먹었다”고 했다. 더 큰 일은 샤워다. 두 사람이 샤워실에 들어갔다 나와 옷을 입기까지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혼자 하면 한시간으로도 부족하다. 개인 간 방역을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은 요한씨 얼굴이 흠뻑 젖었다. 8시30분께, 시형씨의 출근길에 함께했다. 요한씨는 출근길에 시형씨 커피를 빠뜨리지 않는다. 시형씨가 2년 전 자가격리를 끝낸 날 활동지원사와 가장 먼저 한 건 집 앞 커피숍에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참으셨대?” 같이 걷던 요한씨가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지난 25일 대구시는 코로나19 여름 대유행 진입에 대비한 추가대책을 발표했다. 기존 예측보다 정점 도달 시기 단축 및 최대 확진자 수 증가 추세가 심상치 않다는 판단에서다. 일일 확진자 1만5천명(전국 30만명) 수준에 대응할 수 있도록 코로나19 환자가 치료받을 수 있는 병상을 추가 확보하고, 전담병상 운영 효율화를 위해 병상 배정 기준을 강화하고 재원 적정성 관리를 병행할 계획이다. 대구에서의 대유행이 현실화된 셈이다. 이보다 앞선 지난 5일 자립센터가 속한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는 정부세종청사 보건복지부를 찾아 코로나19 장애인 돌봄공백·의료공백 재발 방지 대책 마련을 위한 면담을 진행했다. 면담 뒤 전장연은 입장문을 내어 “(대유행에) 어떻게 대비할지에 대해 계획을 전혀 세우지 않았다. 접근성 부족으로 코로나 검사를 한번도 받지 못하고, 백신 접종도 받을 수 없는 장애인들이 많다”며 “호흡기 진료 지정 의료기관인 의원 중 9할이 편의시설 설치 의무 대상이 아니며 편의시설 정보조차 없다”고 했다. 자립센터에는 벌써 3명의 확진자(지난 19일 기준)가 나왔고, 이미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대구/하어영 기자 haha@hani.co.kr
지난 19일 오전 7시 출근한 활동지원사 조요한씨는 김시형씨의 기상을 돕는 것을 시작으로 청소, 빨래, 설거지 등 정해진 순서에 맞춰 일을 진행했다.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1차 대유행 진원지, 대구에서의 삶 중앙방역대책본부가 8월 중순 이후 6차 대유행을 예고했다. <한겨레>는 대구 신천지 교회발 코로나19 1차 대유행 들머리였던 2020년 2월, 당시 에스엔에스(SNS)를 통해 타전된 ‘대구장애인차별철폐연대에서 드리는 긴급구호 요청’부터 되짚어보기로 했다. “센터에서 마스크 300장 정도가 당장 필요했는데 구할 곳이 없었”던 노금호 이사장이 나선 일이었다. 정부가 사회복지시설에 마스크 우선 공급 원칙을 밝혔지만, 자립센터 등 몇몇 단체가 제외됐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업을 하고 있지만 장애인복지법상 시설에는 들어가 있지 않다는 게 이유였다. 이연희 자립센터 사무국장이 “지도점검을 받을 때는 사회복지시설이고, 마스크 줄 때는 시설이 아니냐”고 항변했지만 소용없었다. 구호요청에는 “돈을 드려서 구입하고 싶어도 구입이 불가능하다”며 마스크, 손소독제 등 구호물품을 나누자는 호소가 담겼다. 구호요청 이틀 뒤인 2월23일 자립센터에도 양성판정 통보(활동지원사)가 날아들었다. 마스크 공급 때와 달리 보건당국은 통보 한시간 만에 전격적으로 자립센터 2개 층을 폐쇄했다. 곧바로 자가격리 대상 29명을 담은 명단도 전달됐다. 자립센터에 비상이 걸렸다. 격리 대상 중 12명이 24시간 돌봄이 필요한 최중증 장애인이었다. 당시 병보다 빨리 퍼진 공포로 인해 돌봄인력 배치가 쉽지 않았다. 정확한 감염경로부터 치명률 등 확실한 정보가 축적되지 않은 시절이었다. 그렇다고 그들을 방치할 수는 없었다. 결국 격리 대상인 상근 직원 중 일부가 장애인 활동지원사 역할을 맡기로 했다. 그마저도 인원이 모자랐다. 결국 지원 인력 등을 고려해 센터가 운영하는 자립주택 2곳으로 남녀를 구분해 옮겼다. 그래도 자리가 모자라 “그나마 버틸 수 있는 사람과 버티기도 안 되는 사람을 구분해야 했”다.(노 이사장) 활동 보조 없이 사실상 일상생활이 불가능한 이들을 가르는 과정 자체가 괴로운 일이었다. 이때 김시형씨가 손을 들었다.
김시형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 권익옹호팀장.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매뉴얼은 만들어졌지만… 매뉴얼이 만들어진 건 대구 대유행이 잦아들 무렵인 2020년 4월이었다. 보건복지부가 발간한 ‘장애인 대상 감염병 대응 매뉴얼―코로나19를 중심으로’를 보면 △의사소통 제약 △이동 제약 △감염 취약 △밀접돌봄 △집단활동 등 유형별로 구분했고, 대상별로 기존 지원 공백을 막기 위한 대책이 빼곡하다. 하지만 김시형씨는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확산 때도 (장애인 단체에서) 소송까지 해가며 대책을 마련해달라고 주장했다. 강제력이 없는 매뉴얼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했다. 김동은 기획국장 또한 “현장이 (복지부) 매뉴얼대로 돌아가지는 못했던 것으로 안다”고 했다. 이듬해 2~4차 대유행에서 대구는 ‘안전지대’로 여겨졌다. 자립센터 등 장애인 시설에 다시 비상이 걸린 건 지난 2월 대유행이 전국화되면서다. 2월에 들어서자 하루 확진자가 2천명을 넘어섰다. 이를 예견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활동지원사에게 긴급지원 의사를 미리 받아놨어요. 2년 전처럼 대규모 확진 상황이 오면 담당하는 장애인(이용자)과 함께 격리돼 생활을 보조할 수 있도록요.”(이연희 사무국장) 하지만 대유행이 본격화되면서 민간이 마련한 자구책만으로 돌봄 체계를 정상적으로 유지하긴 버거웠다. ㄱ씨(50대 남성)가 확진된 것도 그즈음이다. ㄱ씨 활동지원사가 확진됐다는 통보가 센터에 전해진 지 하루 만에 ㄱ씨에게 의심 증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ㄱ씨는 중증 장애인으로 홀로 보건소에 가서 검사를 받기 어려웠고, 보건소 쪽에 방문검사를 요구하는 것 또한 사실상 불가능했다. ㄱ씨 감염 여부 확인과 돌봄 공백 해결은 자립센터가 맡을 수밖에 없었다. ㄱ씨에겐 센터에서 미리 지정한 긴급지원 인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돌봄 공백을 최소화하기 위해 ‘확진자’를 위한 구청 긴급돌봄 프로그램을 신청해야 했다. 전양숙 자립센터 활동지원사업 팀장이 직접 나섰다. 전 팀장은 관할 보건소를 시작으로 대구지역 모든 보건소 홈페이지를 열어, 모든 부서에 차례로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모두 먹통이었다. 20여분이 흘렀을까. 가까스로 연결된 관할 보건소에서 “자가검사키트 양성이 나와야 (방문검사가) 가능하다”고 했다. 담당 공무원은 원칙을 앞세우며 물러서지 않았다. 실랑이를 할 여유가 없었다. 전 팀장은 센터 밖으로 달렸다. “걷지도 못하는 사람이 자가키트를 어떻게 구입하며, 손이 경직돼 식사도 못 하는 분이 어떻게 코에 검사키트를 집어넣느냐(고 따졌어요). 그래도 원칙, 저래도 원칙, 원칙이라고 하는데, 더 이상 안 되겠더라고요. 정말 키트 양성반응만 있으면 와주겠느냐고 몇차례 다짐을 받고 나섰죠.” 전 팀장이 직접 자가검사키트로 양성을 확인한 뒤 다시 보건소에 연락을 했다. 그나마 이튿날 오후 방문검사가 이뤄졌다. 그사이 돌봄 공백은 사흘이 됐다. 구청 긴급지원(프로그램)인 ‘사회서비스원’도 곧바로 가동되지 않았다. 다시 한나절을 기다려 인력을 배정받았다. 다만 자가격리가 끝날 때까지 밖으로 나오면 안 되고, 분리해 숙식할 공간이 마련돼야 한다는 등 조건이 붙었다. 전 팀장이 ㄱ씨 의사를 묻기 위해 전화를 걸었다. ㄱ씨는 “혼자 버텨보겠다”고 했다. 전 팀장은 “2년 전 준비가 없던 시절과 달라진 게 무엇이 있나 싶다”고 했다. 혼란 속 대유행의 기세는 맹렬했다. 센터에서 감염자가 속출했다. 이번에는 노금호 이사장도 감염을 피하지 못했다. 2월, 그의 척수성 근위축 질환 주사치료가 시작될 때쯤이다. “걸리는 것보다 더 공포스러운 건 걸린 다음이에요. 인사불성이 될지도 모르는 나를 누가 어떻게 돌보느냐, 안심하고 아플 수도 없었어요.”(노 이사장) 자가격리 기간과 주사치료를 받아야 하는 기간이 겹쳤다. 하지만 치료를 받던 병원은 치료 연기 여부, 치료 시 음압병동 입원 여부 등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그는 “당장 코로나로 아픈 거는 생각지도 못 했죠. 주사를 어떻게 맞아야 하는가를 누구도 해결해주지 않았기 때문에요.” 확진받은 중증 장애인이 기저질환을 치료받기 위한 절차는 까다롭고 복잡했다. 입원이 결정된 뒤로도 장애인 리프트 등 개인 보조기구 반입, 지원인력 동반 입원 등 일일이 별도의 판단을 구해야 했다. 매뉴얼 자체의 공백과 (규정이 있다고 하더라도) 권장(합의)사항이 주는 공백을 돌파해야 하는 건 개인의 몫이었다. 노 이사장이 확진 뒤 치료를 받으러 병원에 들어가기까지 나흘이 걸렸다.
노금호 자립센터 이사장.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2020년에는 막막, 올핸 절망했다 18일 저녁 노 이사장 집을 찾았다. 그의 집에는 침대가 두개, 장애인 리프트도 하나 더 있다. “혹시 고장이 나면 도움을 요청하기 어려울 것 같아서”다. “코로나19 전에는 괜찮았는데, 그나마 쓰던 오른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했다. ―대유행이 오고 있습니다. 지난 2년 변화는 없었나요. “확산되면 또 똑같아질 거 같아요. 2년 동안 그렇게 (자가격리 등) 되고 저희 단체도 적극적으로 언론에 알리고 정부와 교섭도 하고 그랬는데, 2월 대유행 때 보니 매뉴얼대로 조처가 이뤄지는 지자체가 없더라고요. 저도 경험한 것이고요.” ―대유행의 양상은 다를 텐데요. “2020년에는 막막했고, 뭘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는데 뭐든 해야 될 상황이었다면 지금은 어떻게, 뭘 해야 살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국가가, 사회가 아무런 조처에 나서지 않고 있다는 거? 거기에서 오는 절망? 이렇게 가면 장애인은 생존할 수 없겠다?” ―지금 가장 시급한 걸 하나만 꼽는다면요. “질문 자체가 틀렸어요. 뭐 하나 바뀐다고 해결되는 것은 없어요. 재난을 겪어보니 상황은 개별적이고, 누군가가 나서서 책임지고 판단해야 하는데 그런 주체가 있느냐가 제일 중요하죠. 줄기차게 컨트롤타워 좀 만들자고 한 게 벌써 2년이 흘렀는데, 대책 없이 또 대유행이 오네요.”
노 이사장이 지난 18일 저녁 퇴근 뒤 침대로 이동하는 모습. 장애인리프트와 이를 다루는 활동지원사 도움이 반드시 필요하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돌아온 대유행, 일상은 지켜질까 19일 아침 7시, 이번에는 출근하는 활동지원사 조요한(28)씨를 따라 김시형씨 집에 들어섰다. 7평 남짓 평범한 원룸으로, 2년 전 홀로 자가격리를 했을 때도 이 집에 살았다. 요한씨와 함께 들어서자 시형씨가 힘겹게 몸을 반쯤 일으켰다. 침대에 앉은 뒤 요한씨를 기다려 손을 내밀었다. “하나둘셋, 끙.” 맞잡은 두 사람의 오른손이 세번의 리듬을 타고 힘을 주고받는다. 그사이 시형씨 공간이 침대에서 휠체어로 뒤바뀐다. 얼핏 이 과정이 단순해 보이지만 이 리듬이 서로에게 익숙해지는 것만도 한달이 넘게 걸렸다. 곧이어 요한씨는 청소기를 돌리고, 물걸레질 뒤 빨래를 갠다. 시형씨는 “보름 중 방호복을 입은 자립센터 동료 덕분에 그래도 쓰레기는 두번 치웠는데, 빨래는 어려웠다”고 했다. 시형씨가 먹을 아침(선식)과 약을 챙긴다. 순서가 정해져 있어 둘은 동선이 겹치지 않는다. 다시 요한씨가 위장약, (목)디스크약, 영양제 등이 나란히 깔린 탁자 앞에 자리한다. 요한씨가 시형씨 양손에 약을 담으면 시형씨는 이를 힘겹게 삼킨다. 시형씨는 “자가격리 중에는 이 약을 전부 챙겨 먹기 어려워 디스크약만 겨우 먹었다”고 했다. 더 큰 일은 샤워다. 두 사람이 샤워실에 들어갔다 나와 옷을 입기까지 20분이 조금 넘게 걸렸다. 혼자 하면 한시간으로도 부족하다. 개인 간 방역을 위해 마스크를 벗지 않은 요한씨 얼굴이 흠뻑 젖었다. 8시30분께, 시형씨의 출근길에 함께했다. 요한씨는 출근길에 시형씨 커피를 빠뜨리지 않는다. 시형씨가 2년 전 자가격리를 끝낸 날 활동지원사와 가장 먼저 한 건 집 앞 커피숍에 커피를 마시러 가는 것이었다. “어떻게 참으셨대?” 같이 걷던 요한씨가 웃으며 농담을 건넨다.
지난 18일 자립센터에서 열린 ‘2022년 장애인권교육강사 양성과정’ 중 한 모습.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중증장애인 김시형씨가 대구사람장애인자립생활센터(자립센터)에서 창 밖을 바라보고 있다. 이정용 선임기자 lee312@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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