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최악의 한파로 대규모 정전사태가 벌어진 미국 텍사스 휴스턴 주민들이 연료용 프로판 가스를 충전하기 위해 길게 줄지어 있다. 연합뉴스
지난달 미국 텍사스에서 발생한 정전 사태 뒤 현지와 국내의 여러 언론매체에 ‘전력시장 자유화’가 근본 원인으로 소환됐다.
치열한 경쟁에 내몰린 민간 전력회사들이 비용 절감을 위해 기후변화에 따른 극한기상에 대비하는 투자를 하지 않은 것이 발전기 집단 정지로 이어졌다는 분석이다.
하지만 8일 에너지전환포럼이 ‘텍사스 정전의 실체와 전기요금 폭등이라는 오해와 진실’을 주제로 연 토론회에서는 텍사스 정전 사태가 전력시장 자유화 자체보다는 규제 당국의 규제 실패에서 비롯됐다는 전문가 의견이 많았다.
발제를 한 석광훈 에너지전환포럼 전문위원은 “2011년 2월 텍사스에 한파로 순환단전이 발생한 뒤 미국 연방에너지규제위원회 등이 주정부에 한파에 대비한 발전시설 단열조치 등을 세세하게 권고했는데도 텍사스 규제당국이 이 권고를 따르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어 “전력시장이 자유화돼도 소비자 보호와 공정 경쟁을 보장하는 규제기관은 존재하는데, 이번 사태는 규제 당국이 규제에 실패한 문제로 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석 위원은 텍사스와 달리 경쟁시장이 아닌 한국에서도 이상고온에 의해 2011년 ‘9·15 순환정전 사태’가 촉발된 점을 예로 들며 “기후재난 앞에서는 경쟁체제든 공기업체제든 에너지 공급의 신뢰도 약화가 불가피한만큼, 독립적 규제기관을 통해 미리 점점하고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전력시장 및 전력계통 운영에 대한 감시와 규제 등을 담당하는 전기위원회는 독립적 기구가 아닌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기구로 설치돼 있다. 이에 따라 전기위원회 독립성을 강화하는 방안은 국제에너지기구(IEA) 주요 권고사항이기도 하다.
조홍종 단국대 경제학과 교수도 텍사스 전력산업 규제당국의 안이한 대응을 문제로 지적했다. 조 교수는 “전력업체들이 가격경쟁을 치열하게 벌이면서 100년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이상기후 이벤트를 위해 투자를 하기는 쉽지 않다. 업체들이 극심한 기후변화나 리스크를 관리하는 투자를 방기하는 것에 대해 규제기관이 발전시설의 안전성 유지 측면에서 규제를 하거나 투자를 유인하는 방법을 고안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이유수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도 “지난해 캘리포니아와 이번에 텍사스에서 발생한 순환정전, 2011년 국내에서 발생한 9·15 정전 등은 모두 전력 운영시스템 설계나 규제 정책의 문제와 직결돼 있다고 보인다”고 공감을 나타냈다.
토론회에 참석한 전문가 사이에는 순환정전 사태를 불러올 수 있는 에너지 수급 불균형 해소와 에너지 전환을 위해 전력시장 자유화를 오히려 확대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왔다.
노재형 건국대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판매가 독점된 상태에서는 사업자가 리스크 관리를 하지 않게 되고, 소비자들에게 가격 신호도 주지 못한다. 소비자 참여 없이는 에너지 전환도 어려운만큼 소비자들에게 가격신호를 줄 수 있도록 시장 자유화를 확대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노 교수는 이를 위해 우선 한국전력이 독점하고 있는 전기 소매시장부터 개방할 것을 제안했다.
김정수 선임기자
jsk21@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