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m 이상을 힘차게 달려가는 새끼 얼룩말.
[토요판] 생명
광활한 초원에서 망원경으로 아프리카 흰코뿔소를…
광활한 초원에서 망원경으로 아프리카 흰코뿔소를…
▶ 동물원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대부분 다음 이미지가 떠오르실 겁니다. 좁은 우리와 높은 철창, 그 속에서 움직이지 못하고 밥만 먹는 동물과 왠지 모를 죄책감을 느끼는 관객. 혹시 ‘망원경이 아니면 전시된 코뿔소를 볼 수 없는 동물원’이나 ‘저 멀리에서 얼룩말 망아지가 달리기를 하는 동물원’을 상상해보신 적이 있나요? 터무니없는 상상이라고 생각하는 독자들은 지금 당장 영국 휩스네이드 동물원에 가봐야 합니다. 여의도 면적의 땅에 동물을 자유롭게 풀어놓고 전시하는 동물원을 소개합니다.
내가 영국에 간다고 하자, 한 동물원 관계자는 “동물원에 가보시라, 런던 동물원 말고 휩스네이드(Whipsnade) 동물원에 가보시라”고 일러줬다. ‘동물원이 거기서 거기지’ 생각했지만, 자동차를 탄 나는 지난 7월 휩스네이드 동물원 정문 앞에 서 있었다. 동물원 직원은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가면 입장료 23.5파운드(약 3만9000원, 기부금 2.14파운드 포함)에 20파운드 더 내셔야 돼요”라고 말했다. 입장료에 손을 떨던 나는 굳이 자동차를 타고 동물원에 들어갈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동물원 밖 주차장에 차를 댄 뒤 지도를 받아 들고 휩스네이드 동물원에 들어갔다.
숲길을 따라 지도에 표시된 아프리카 구역을 향해 10분 남짓 걸었다. 숲에서 빠져나오자 광활한 초원이 펼쳐졌다. 정확히는 아프리카 ‘흰코뿔소사’였다. 흰코뿔소 여남은 마리는 어림잡아 200~300m 떨어진 곳에 점점이 서 있고, 내 앞에서는 난데없이 왈라비가 풀을 뜯고 있었다. (휩스네이드는 왈라비, 마라, 공작 등은 자유롭게 다니도록 풀어놓는다.) 확인하기 위해 망원경이 필요할 정도였다. 다른 아프리카의 다른 동물들은 코뿔소가 있는 초원 저 너머에 있었다. 내 뒤로 ‘쌩’ 하고 자동차가 지나갔다. 아뿔싸. 자동차를 가지고 들어올 걸.
좀더 적은 종을 좀더 큰 공간에
전시한다는 원칙 80년간 지켜온
큰 동물원의 대명사
‘본점’ 런던동물원의 16배 면적
여의도 한 바퀴 둘러보는 셈 기존 동물쇼와 다른 생태설명회
사육사가 그물 달린 링을 던지면
바다사자가 링을 찾아 목에 건다
사육사는 이런 모습을 통해
폐어구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식 관람객 죄책감 덜어주는 ‘유사야생 경험’ 휩스네이드 동물원은 런던 도심 런던 동물원의 ‘시골 분원’ 정도 되는 동물원이다. 런던 동물원의 운영자인 런던동물학협회(ZSL)가 1931년 런던에서 북쪽으로 48㎞ 떨어진 베드퍼드셔주 던스터블의 황무지에 제2의 동물원을 세웠다. 넓은 공간에서 동물들을 풀어놓으면 ‘높은 번식률’이 보장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휩스네이드가 사육하는 동물은 193종. ‘본점’ 런던 동물원 806종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휩스네이드의 면적은 2.4㎢로, 런던 동물원(0.15㎢)의 16배다. 한강시민공원을 제외한 제방 안쪽 여의도(2.9㎢)에 견줄 만한 넓이다. 휩스네이드는 중앙의 ‘베이스캠프’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 네 개 구역으로 나눠 초원과 숲, 우리를 조성하고 동물을 풀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니까 동물원 한 바퀴를 둘러보는 건 여의도 한 바퀴를 걸어다녀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유럽불곰의 사육사는 숲으로 우거져 있었다. 불곰이 잠시 수풀을 헤치고 얼굴을 삐죽 드러낼 때면, 마치 우랄산맥의 깊은 산중에서 곰을 마주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떤 동물은 관람객과 가까운 나무울타리 주변에서 낮잠을 잤고, 어떤 동물은 숲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와 늑대는 수풀에서 나오지 않아 어렴풋한 형체만 확인했을 뿐이다. 다행히 사자는 넓은 벌판을 놔두고 관람 데크 앞에 누워 낮잠을 자준 덕에 수염까지 세어볼 수 있었다.
지금까지 대부분의 동물원은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을 소장하려는 미술관처럼 판다 같은 희귀동물을 확보하는 데 열을 올렸다. 하지만 많은 종을 전시할수록 공간 문제가 뒤따른다. 그래서 동물복지를 중시하는 전문가들은 동물들에게 되도록 많은 생활공간을 주되, 동물원의 크기가 충분치 않으면 전시종을 줄이는 방식으로 공간을 확보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좀더 적은 종’을 ‘좀더 큰 공간’에 전시하자는 것이다. 지난 80년 동안 휩스네이드는 이런 원칙을 가져온 ‘큰 동물원’의 대명사였다. 방대한 면적에 많은 종을 채워놓기보다는 소수의 희귀종 번식에 힘을 쏟았다. 물론 휩스네이드의 모든 시설이 넓고 크진 않다. 해양동물관 등 일부 시설은 한국 기준에서 봐도 좁고 낡았다. 다만 휩스네이드는 동물원의 목적으로 ‘야생 보전’과 ‘멸종위기종 보호’를 줄기차게 강조했다. 각 동물사 앞에는 ‘우리 동물원은 이 종의 야생개체 보전을 위해 현지에서 어떤 사업을 벌이고 있다’는 식의 안내판이 붙어 있었다. ‘스플래시’라는 이름의 바다사자 생태설명회의 이야기도 ‘인간과 동물의 우정’을 비현실적으로 구현하는 동물쇼와 달랐다. 사육사가 그물이 달린 링을 풀장에 던지니, 바다사자가 링을 찾아 목에 걸고 돌아왔다. 사육사가 말했다. “바다사자가 인간이 버린 어구에 걸렸네요. 이런 폐어구들은 해양포유류에게 위협이 됩니다.”
그렇다고 ‘큰 동물원’이 전적으로 동물을 위해 탄생한 건 아니다. 미국의 생태사학자인 니겔 로스펠스는 <동물원의 역사>에서 20세기 초반 출현한 동물원의 생태적인 전시기법은 동물복지 그 자체의 목적보다는 열악한 동물들의 모습을 보기 불편해하는 사람들을 위해 고안됐다고 지적한다. ‘인위적으로 꾸며진 야생’에서 관람객은 ‘갇혀 있는 동물’이 아닌 ‘야생동물’을 만난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런 ‘유사야생’의 경험이 관람객의 윤리적인 죄책감을 덜어주는 것이다. 또한 이는 식민지시대의 ‘노스탤지어’를 불러일으키며 관람객을 끌어모으는 상업적 수단으로 이용된다. 사실 개장 초기 휩스네이드 동물원도 런던 시민들에게 대륙 너머 ‘아프리카 사파리’의 대리체험 공간으로 선전됐다. 이런 사파리 공원의 ‘잔재’는 지금도 자동차나 열차를 타고 동물원을 둘러보거나 동물원 언덕의 산장에서 숙박을 제공하는 프로그램 등에 남아 있다. (중국사슴인 사불상 등 아시아 초식동물을 보기 위해선 차량이 동물원이 제공하는 열차인 ‘점보 익스프레스’를 타야 한다.)
코끼리 새끼 사망 사건을 둘러싼 논란
야생보전과 동물복지의 선두에 선 동물원들은 휩스네이드처럼 ‘좀더 적은 종’을 ‘좀더 큰 공간’에 전시하는 전략을 선택하고 있다. 작은 동물원들도 이런 ‘선택과 집중’을 통해 사회적 압력에 대응한다. 미국 호눌루루 동물원은 1200만달러를 들여 코끼리사를 크게 개선했더니, 다섯달 만에 두 암컷 코끼리의 몸무게가 136㎏씩 줄어드는 효과를 봤다. 넓게 펼쳐진 사육공간 여기저기에 먹이를 흩뿌리는 방식으로 코끼리의 운동을 유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동물원은 아시아코끼리사에 물구덩이, 모래사장과 수풀 등으로 400m의 ‘코끼리 트레일’을 조성했다. 반면 미국 뉴욕 브롱크스 동물원, 디트로이트 동물원, 샌프란시스코 동물원, 캐나다 토론토 동물원 등은 코끼리 전시를 중단했다. 막대한 돈을 들여 시설 개선을 하느니 아예 전시를 안 하는 쪽으로 방향을 튼 것이다.
휩스네이드는 미래 동물원의 대안으로 꼽히지만, 이를 보는 시각은 미묘하게 엇갈린다. 2009년 코끼리 새끼 두 마리가 연이어 바이러스에 감염돼 숨진 적이 있다. 동물원 감시단체인 ‘본프리’는 휩스네이드에서조차 코끼리가 전시에 적합한 동물이 아니란 게 밝혀졌다며, 시설 개선에 막대한 돈을 쏟아붓느니 야생코끼리를 보전하는 게 낫다고 비판했다. 반면 영국의 동물철학자 스티븐 보스토크 같은 이들은 휩스네이드가 코끼리·사슴 등 유제류와 사자 등 육식동물도 동물원에서 잘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며, 야생보전과 교육을 위해선 동물원의 미래를 휩스네이드에서 찾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프리카 구역을 걷는데, 초원 한가운데서 갑자기 새끼 얼룩말이 뛰기 시작했다. 새끼는 100m 이상을 힘차게 달리다가 어미에게 돌아가곤 했다. 동물이 뛰어다니는 풍경은, 이상한 말이지만,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이곳은 어쨌든 동물을 ‘가둔’ 동물원이니까. 휩스네이드처럼 큰 동물원이 대세가 되면 ‘뛰어다니는 얼룩말’은 동물원의 일상적인 풍경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가 되어서야 우리는 동물원의 존재에 대해 진지하게 토론해볼 수 있을지 모른다.
베드퍼드셔(영국)/글·사진 남종영 기자 fandg@hani.co.kr
관람객과 동물들의 공간적 분리를 없앤 여우원숭이 서식 공간.
전시한다는 원칙 80년간 지켜온
큰 동물원의 대명사
‘본점’ 런던동물원의 16배 면적
여의도 한 바퀴 둘러보는 셈 기존 동물쇼와 다른 생태설명회
사육사가 그물 달린 링을 던지면
바다사자가 링을 찾아 목에 건다
사육사는 이런 모습을 통해
폐어구의 위험성을 설명하는 식 관람객 죄책감 덜어주는 ‘유사야생 경험’ 휩스네이드 동물원은 런던 도심 런던 동물원의 ‘시골 분원’ 정도 되는 동물원이다. 런던 동물원의 운영자인 런던동물학협회(ZSL)가 1931년 런던에서 북쪽으로 48㎞ 떨어진 베드퍼드셔주 던스터블의 황무지에 제2의 동물원을 세웠다. 넓은 공간에서 동물들을 풀어놓으면 ‘높은 번식률’이 보장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휩스네이드가 사육하는 동물은 193종. ‘본점’ 런던 동물원 806종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휩스네이드의 면적은 2.4㎢로, 런던 동물원(0.15㎢)의 16배다. 한강시민공원을 제외한 제방 안쪽 여의도(2.9㎢)에 견줄 만한 넓이다. 휩스네이드는 중앙의 ‘베이스캠프’를 중심으로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 등 네 개 구역으로 나눠 초원과 숲, 우리를 조성하고 동물을 풀어주는 방식을 택했다. 그러니까 동물원 한 바퀴를 둘러보는 건 여의도 한 바퀴를 걸어다녀야 하는 수고가 필요했다. 유럽불곰의 사육사는 숲으로 우거져 있었다. 불곰이 잠시 수풀을 헤치고 얼굴을 삐죽 드러낼 때면, 마치 우랄산맥의 깊은 산중에서 곰을 마주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어떤 동물은 관람객과 가까운 나무울타리 주변에서 낮잠을 잤고, 어떤 동물은 숲 속에 숨어 보이지 않았다. 호랑이와 늑대는 수풀에서 나오지 않아 어렴풋한 형체만 확인했을 뿐이다. 다행히 사자는 넓은 벌판을 놔두고 관람 데크 앞에 누워 낮잠을 자준 덕에 수염까지 세어볼 수 있었다.
수풀을 헤치고 얼굴을 삐죽 드러낸 불곰.
휩스네이드에서 가장 넓은 사육사인 아프리카 구역의 흰코뿔소사에서 뿔싸움을 하는 흰코뿔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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