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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호피는 조선시대의 로또였다

등록 2013-03-01 20:28수정 2017-08-11 11:40

[토요판] 생명/한반도 호랑이 수난사
▶2004년 지리산에 처음 방사된 반달가슴곰은 지금은 27마리가 야생 상태로 산다. 이처럼 호랑이도 야생 복원이 가능할까? 2014년 경북 봉화에 문을 여는 국립 백두대간수목원에는 호랑이가 전기철책에 둘러싸여 자연과 가까운 상태에서 살게 된다. 인간과 서식지를 공유하는 자연 복원은 먼 훗날의 이야기겠지만, 먼저 전설과 설화 속에 묻힌 호랑이의 생태적 역사부터 복원해야 한다.

인구가 급증한 조선시대
산과 물가가 농경지로 변하고
농민들은 무쇠를 가졌다
나라에서는 사냥을 장려해서
호랑이를 잡아다 바친 자는
벼슬을 얻고 벼락부자가 됐다

사람이 덜 사는 평안·함경도로
서식지를 옮긴 호랑이들은
해방 이후에도 남한에서 출몰
이후 서서히 자취를 감췄다
다시 복원하는 것은 불가능할까

한반도에는 호랑이가 얼마나 살았을까? 학자들 사이에서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그러나 몇몇 역사적 기록이 추론 근거를 제공한다. 1633년에 전라도 무안 현감 신집(1580~1640)이 국왕에게 올린 보고 등을 보면, 겨울 석달 동안 매달 호랑이 한마리씩을 잡아 병영에 가죽 세장을 바치라는 규정이 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전국 군현이 330개가 넘었기 때문에 이러한 규정이 마련될 때 적어도 매년 1000마리 이상의 호랑이와 표범이 있었다고 대략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많던 호랑이는 어쩌다 한반도에서 사라지게 되었을까? 조선시대에 이미 큰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나 농경지가 필요했고, 많은 숲이 논과 밭으로 개간됐다. 국가 정책으로 무쇠를 생산하면서 많은 농민은 예리한 농기구와 무기를 갖게 됐다. 상당수 농민들은 정기적으로 한양 인근이나 지방의 군사거점의 강무(무예 강습)에 참여해 몰이사냥 등을 하면서 호랑이 사냥기술을 익혔다. 중앙에는 착호갑사와 착호장이, 지방에는 착호인(군현에 설정된 호랑이 사냥전문가로 전국에 걸쳐 1만여명), 착호장(면 단위에서 호랑이 사냥을 주도하는 자), 심종장(리 단위에서 호랑이 발자국을 추적하는 자) 등 전문적인 호랑이 사냥꾼이 양성됐다. 농민들은 숲을 제거하고 호랑이를 몰아냈다.

나라에서는 사냥을 장려했다. 호랑이와 표범을 잡아온 군사와 백성들에게 상을 줬고 가죽은 임금에게 진상됐다. 호랑이를 잡은 공은 전쟁에서 적군을 죽인 것에 버금갈 정도였다. 한때 조정의 당상관(정삼품 이상의 벼슬) 중 절반은 호랑이를 잡아 당상관이 됐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어떤 때는 호랑이를 잡았지만 글자를 읽지 못하는 자들이 특정한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안을 마련해야 할 지경에 빠지기도 했다. 국왕에게 바친 호피와 표피의 값어치는 얼마였을까? 당시 가장 높은 대우를 받던 기술자가 받는 일당의 500일이나 750일치에 해당할 정도였으므로, 지금으로 치면 호피는 1억3500만원, 표피는 2억원에 이르렀다. 호랑이를 잡은 사람은 출세했고 부자가 됐다.

호랑이는 점점 삶터에서 내몰리기 시작했다. 고려시대까지만 해도 농사는 홍수를 우려해 강 습지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뤄졌다. 인구가 늘어난 조선시대에는 점점 강쪽으로 다가왔다. 15세기 소하천 주변에 보를 쌓아 논을 만드는 천방(川防)이 도입됐다. 물을 좋아하는 호랑이와 표범의 서식지는 산골짜기로 쫓겨났다. 17세기 중엽이 되면 냇가의 비옥한 땅은 가득 차고 만다. 이제 사람들은 더 깊은 산골로 들어가기 시작했고, 많은 산들이 화전으로 바뀌었다. 호랑이와 표범은 임전무퇴의 지경에 빠졌고, 먹잇감과 숨을 곳을 잃은 호랑이들은 호환을 일으켰다. 하지만 ‘가혹한 정치는 호랑이보다 사납다’는 말이 있듯, 백성에게 호환은 결코 가난보다 무섭지는 않았다. 지주와 관가의 수탈에서 살길을 찾으려는 백성들의 발길에 호랑이는 대부분의 산골짜기에서마저 쫓겨나게 됐다.

그 뒤 호랑이와 표범은 사람이 덜 사는 평안도, 함경도 이북을 주요 근거지로 하면서, 간간이 백두대간에 형성된 생태축을 따라 한반도 남부까지 내려갔던 것으로 보인다. 18~19세기에 이르면 왕실의 능침이 자리잡은 한양 주변, 큰 강과 바닷가 갯벌, 백두대간과 지리산 주변을 제외한 지역에서 호랑이와 표범의 안정적인 서식지는 대부분 사라진 것으로 추정된다. 호랑이가 사라진 자리에 왕 노릇을 한 건 늑대였다. 한반도의 많은 지역에서는 늑대 혹은 들개로 불리는 짐승들이 야생 생태계를 지배하게 됐고, 사람들은 이들로부터 더 많은 피해를 보게 됐다.

19세기 후반 샤를 달레 신부가 <한국천주교회사>에 썼듯, 한반도에서 “북쪽의 두 도를 빼놓곤 거의 어디나 산이 일구어져서 호랑이는 제 굴에서 쫓겨나 그 수가 훨씬 적어졌다.” 실제로 개항 이후 조선을 찾은 많은 외국인이 조선의 호랑이를 찾아 함경도, 평안도를 향했고, 일부는 지리산의 산록과 바닷가 대규모 목장이 운영됐던 전라도를 찾았다.(목장에는 호랑이가 좋아하는 노루 등 먹이가 많았다)

일제시대에는 호랑이 포수들이 의병이 되는 것을 두려워해 무기 소지가 불법화됐다. 다시 맹수 피해가 급증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온 게 해수구제 정책이다. 트로피(머리의 박제)를 수집하러 서구에서 온 실업가들도 호랑이를 마구 잡아댔다. 하지만 일선에서 호랑이를 잡은 이들은 조선 포수와 백성이었다. 1921년 경주 대덕산 호랑이가 대표적이다. 조선의 백성과 포수가 사냥한 것을 일본 헌병들이 가로채서 자신의 공으로 보고했다. 호랑이 가죽은 일본 왕가에 충성의 표시로 바쳐졌고, 아울러 이 이야기를 <보통학교 국어독본>에 실어 일제와 왕가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식이었다.

당시엔 대덕산 호랑이가 마지막 호랑이로 알려졌지만, 1930년대까지 호랑이를 포획했음을 보여주는 자료 또한 적지 않다. 해방 이후에도 남한에서 호랑이가 나타났다는 제보가 적지 않았고, 1960년 대 초반 경남 합천의 가야산에서는 표범이 잡혀 창경원으로 옮겨진 바 있다.

호랑이는 지금 우리 곁을 떠났지만, 백두대간을 따라 오가며 한반도를 포효하던 중심 무리는 아직도 연해주(우수리)와 만주에 살아 있다. 호랑이는 한반도 생태계의 건강성을 보여주는 바로미터라는 측면에서 매우 중요하다. 또한 한국인이 오랫동안 호랑이와 상호작용하며 살아왔다는 점을 생각하면, 호랑이를 중심으로 생태계의 건강성을 회복하는 것은 낭만주의의 소산만은 아니다. 한반도에서 호랑이를 복원하려 할 때 넘어야 할 난관이 있다. 남북 분단이 초래한 생태축의 단절, 호랑이를 복원했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호환, 호랑이에게 양보할 땅을 확보하는 일 등 매우 복잡하면서도 이해 당사자의 합의를 필요로 하는 사안들이다.

김동진/서울대 수의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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