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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환경

찡이 대신 한 표

등록 2012-12-21 20:32수정 2012-12-21 20:54

[토요판] 생명
김보경의 달콤한 통역 왈왈
지난 19년 동안 반려견 ‘찡이’와 선거 때마다 함께 투표장으로 갔다. 신원확인 후 찡이를 번쩍 안고 기표소로 들어갈 때면 매번 뒤통수에서 참관인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어, 어, 저기, 개는, 개는… 끄응.”

개와 함께 기표소에 들어가는 게 못마땅한데 그렇다고 딱히 막을 근거도 없으니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신음소리를 낼밖에. 그렇게 당당하게 기표소에 들어갔지만 정작 투표용지 앞에서 늘 망설였다. 지금까지 동물복지에 관한 공약을 낸 후보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 대선에 개와 고양이를 키우는 반려인으로 유기동물과 함께 청와대로 입성하겠다는 혁명적인 후보가 등장했다. 문재인 후보는 직접 인터넷으로 사료와 물품을 구입하는 반려인이었다. 유기묘 출신인 고양이 ‘찡찡이’가 쥐를 잡아온다는 얘기를 들려주는 대통령 후보에게 반려인들은 격하게 공감했다. “우리 집 고양이는 살아있는 쥐도 잡아와 집안을 초토화시켜요”라는 수다를 함께 떨 수 있는 대통령 후보를 만났으니 이거야말로 신천지다.

반려인들은 문 후보 반려동물(문 후보가 아니고!)의 신상을 털기 시작했다. 내 일에 관심을 보이는 사람에게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한 일이니까. 문 후보의 고양이 찡찡이는 최초로 신상 털린 고양이가 됐고, 상대적으로 덜 노출된 마루와 쯔쯔 등의 정보를 풀라는 요구가 빗발쳤다. 덕분에 찡찡이는 올해 반려인이 모이는 송년회에서 최고로 흥하는 소재였다.

내가 아는 많은 반려인은 동물보호법 강화를 공약한 문 후보를 지지했다. 선거 때의 공약이 공약(空約)이 될 수 있음을 알지만 최초로 동물복지 문제에 관심을 보인 것만도 고마웠다. 이런 흐름을 읽었을까. 선거 막바지에 반갑게도 박근혜 후보 캠프도 동물보호단체가 보낸 질의서에 답변을 냈다. 나는 회심의 미소를 띠었다.

‘드디어 우리가 무서운가봐. 만세!’

반려인과 동물보호단체가 정치인들에게 위협적인 유권자 집단으로 보이기 시작했다는 증거이다. 외국처럼 대통령의 반려동물인 퍼스트도그, 퍼스트캣의 일상이 미디어의 관심이 되는 것은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정치인들 눈에 투명인간으로 보였을 동물 문제에 관심 있는 사람들이 이번 선거를 통해 존재 증명이 된 것 같아 기뻤다. 대선이 겹친 송년회가 늘 그렇듯 ‘미리 투표’가 횡행했다. 반려인이 모인 자리는 문 후보 몰표라 재미없었다. 대전의 젊은 번역가들과의 자리도 전부 문 후보 지지자들이어서 이번 선거는 세대 간 투표 대결임을 실감했다. 외국에서 부재자투표를 마친 친구들은 독재자의 딸이 대통령인 나라는 창피하다고 했다.

그런데 가족모임에서 이 흐름이 깨졌다. 강남에 사는 언니와 형부는 부자 증세를 걱정해 박 후보에게 표를 던졌다. 내가 “찡이를 생각해서 언니가 그러면 안 되지”라며 설득하려는 찰나 술기운으로 순발력이 떨어진 나를 제치고 엄마가 나섰다. “평생 대우만 받고 살아온 사람이 서민을 어찌 알아.” 엄마의 일갈에 착한 언니는 문 후보에게 투표하겠다고 엄마와 약속했다.

누구나 자신의 이해관계와 맞는 후보에게 투표한다. 그런데 누구는 투표권 없는 동물의 이해관계를 대신해 투표한다. 안락사한 유기견을 대신해서 한 표, 길에서 죽어간 길고양이를 대신해서 한 표, 구제역 때 생매장된 가축을 대신해서 한 표! 처음으로 동물들을 대신해서 투표할 수 있었던 2012년의 대선이 오래 기억될 것 같다. 출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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