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

사과와 배, 복숭아 농사를 짓는 한 농부가 정부를 상대로 1000원의 손해배상금을 청구했다. 농부는 보통 때 같으면 사과, 배, 복숭아를 합쳐서 총 1000박스 정도 수확해야 하는데 올해는 몇 차례 이상저온 현상으로 인해 10분의 1인 100박스만 수확했다. 농부의 변호인은 기후변화에 대응할 책임이 있는 정부가 이로 인한 손해를 배상하라고 주장했다. 당신이 판사라면 어떤 판결문을 써내려가게 될까.

한국에서 실제로 벌어진 소송은 아니다.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가 23일 공개한 참여형 기후변화 인식개선 캠페인 ‘이상한 재판’ 프로그램의 한 장면이다.(가상 판사 되어보기 act.amnesty.or.kr/UnusualTrials/video/prologue.mp4#t=0.01)

‘이상한 재판’은 이용자가 기후변화 관련 가상 재판의 판사가 되어 재판 과정과 판결문 작성에 참여하도록 한 인터랙티브 프로그램이다. 관련 소송에서 직접 판단을 내림으로써 기후변화가 평범한 사람들의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실감하게 하자는 취지다. 이용자가 선택한 옵션에 따라 변론이 진행되고 기후변화가 인권에 미치는 영향을 알아볼 수 있도록 증거자료도 제시된다.

‘이상한 재판’에는 이상저온 현상으로 인해 사과 농사를 망친 농부 외에도 초등학생과 택배노동자 사례도 등장한다. 한 초등학생은 뜨겁고 건조해지는 날씨로 갈수록 산불이 잦아지는 모습을 보며 “뒷동산에 불이 나 우리 집까지 다 타버릴까봐 두렵다”고 말한다. 그의 변호인은 미래세대가 빈번한 산불로 인해 회복 불가능한 피해를 입는 것은 공평하지 않다며 정부에 이러한 두려움을 막아달라고 말한다. 또 택배노동자는 폭우나 폭염 때 노동자들이 근무를 중단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이러한 재난에 가까운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온실가스 배출을 최소화해달라고 정부에 요구한다.

이번 가상 재판은 해외 기후 관련 소송과 국내 사례 등을 모티브로 제작됐다. 국내외에선 정부나 기업의 미흡한 기후위기 대응으로 인해 일반 시민들의 기본권이 침해됐다며 책임을 묻는 각종 기후소송이 이뤄지고 있다. 국내에서는 지난해 3월 한국 청소년 기후운동단체 청소년기후행동이 정부와 국회가 온실가스 배출량 감축에 대한 책임을 다하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바 있다. 또 독일 연방헌법재판소는 지난 4월29일(현지시각) 독일 기후변화법에서 2030년 이후 온실가스 감축 관련 내용이 충분하지 않다며, 이를 ‘미래 세대의 기본권 침해’로 판단하고 일부 위헌 결정을 내리기도 했다.

윤지현 국제앰네스티 한국지부 사무처장은 “기후위기는 분명한 인권의 위기지만 현실에서는 여전히 자연재해로만 인식돼 우리의 권리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이상한 재판’을 통해 기후위기가 단순히 천재지변이 아닌, 한국을 포함한 전 세계 정부가 책임지고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문제임을 떠올릴 기회가 마련되길 바란다”고 덧붙였다.

김민제 기자 summer@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