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유럽연합 집행위원회가 ‘핏포55’ 관련 법안들을 발표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방송 갈무리
기후위기 대응을 선도하는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14일 중장기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12개 법안 입법 패키지인 ‘피트 포 55’(Fit for 55)를 발표했다. 앞서 유럽연합은 지난달 28일 2030년 온실가스 배출량을 1990년 대비 55%(기존 목표는 40%)로 높이고, 2050년 탄소중립을 법으로 명시한 기후기본법을 제정했다. ‘피트 포 55’는 기후기본법을 뒷받침하는 조처로, 유럽을 ‘탄소중립 대륙’으로 만들기 위한 지렛대인 셈이다.
이날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위원장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은 “화석연료 경제는 한계에 도달했다. 우리는 다음 세대에게 좋은 일자리와 성장뿐만 아니라 건강한 행성을 남겨주고 싶다. 유럽 그린딜은 탈탄소화한 경제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의 성장 전략”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발표된 12개 법안은 크게 제조업, 에너지, 운송 부문 등의 온실가스 감축을 다룬다. 이중에서 특히 한국 산업계와 연관 있는 부문은 배출권거래제(ETS), 탄소국경조정제도(CBAM)다.
배출권거래제는 온실가스를 많이 감축한 기업과 감축을 못한 기업 사이에 탄소배출권을 팔고 살 수 있도록 한 제도이다. 유럽연합뿐 아니라 한국을 포함 많은 국가들이 온실가스 감축 이행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온실가스 배출 규제가 강한 유럽에서 생산한 제품과 규제가 느슨한 국가에서 생산한 수입품의 탄소배출량 차이를 돈으로 보전하는 제도이다. 사실상 추가 관세 기능(탄소국경세)을 하기 때문에 전세계적 온실가스 감축 효과와 더불어 유럽 기업들의 가격 경쟁력 저하를 막는 구실도 하게 된다. 유럽연합은 일단 철강, 시멘트, 알루미늄, 비료, 전기를 탄소국경조정제도 1차 대상으로 정했다. 3년 간 전환기간을 둔 뒤 2026년부터 본격 시행한다.
관세청 자료를 보면, 지난해 기준 유럽연합 27개국과 한국의 교역량은 1116억3000만달러였다. 수출이 521억4400만달러, 수입은 594억8700만달러다. 수출액 규모로 보면 중국(1325억5500만달러), 미국(741억5900만달러)에 이어 한국 3대 수출지역이다. 유럽연합으로의 주요 수출 품목은 자동차, 자동차 부품, 의약품, 선박용 부품, 2차 전지 등이다. 한국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탄소국경조정제도 대상 품목인 철강 수출은 지난해 221만여톤(15억2300만달러), 알루미늄은 5만2000여톤(1억8600만달러)이다. 앞으로 대상 제품이 확대될 경우 주요 수출품인 자동차, 배터리, 석유화학 분야도 영향권에 들 수 있다.
14일 오후 2시(현지시각) 프란스 티메르만스 유럽연합 수석부집행위원장이 ‘핏포55’를 발표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방송 갈무리
철강·선박운송
한국 철강기업들이 수출 과정에서 추가로 지불해야 할 금액은 당장은 많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겨레> 취재 결과, 국내에서 철강 1톤을 생산할 때 직간접적으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는 2톤 정도다. 유럽(철강 1톤 당 1.7~1.8톤)보다는 많지만, 국내 생산과정에서 이미 온실가스 배출권 가격을 지불했다면 이에 대한 감면을 유럽연합 쪽에 요청할 수 있다. 이와 함께 포스코 등은 탄소배출을 줄일 수 있는 수소환원제철기술 이행계획을 갖고 있다.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유럽연합의 온실가스 배출 규제를 피해 러시아·터키 등으로 생산시설을 이전하는 것을 막기 위한 성격도 있다. 따라서 전문가들은 한국의 경우 유럽의 배출권거래제 대상 확대에 더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유럽과 한국 모두 배출권거래제를 시행하고 있지만 훨씬 강력한 탈탄소 원칙을 적용하는 유럽의 배출권 가격(14일 기준 톤당 약 52유로·7만219원)이 한국(톤당 2만1200원)보다 비싸게 거래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이번에 탄소배출이 많은 선박 운송을 유럽 배출권거래 시장에 포함시키기로 했다. 유럽과 한국을 잇는 화물선이 배출권 거래 비용을 치르게 되면 물동비가 올라가고 그만큼 수출품 가격 상승 요인이 된다.
여기에 더해 탄소국경조정제도 시행으로 발생하는 추가 비용 역시 유럽 탄소배출권 가격을 기준으로 정하게 된다. 앞서 유안타증권은 지난달 30일 유럽 기후기본법 관련 보고서에서 “탄소국경조정제도가 도입되는 과정에서 결과적으로 기타 지역 배출권 가격도 상승하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다. 이같은 유럽의 정책적 움직임은 교역 상대국 기업들의 환경 문제 대응에 대한 관심을 제고시키는 요인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수출 비용 부담을 줄이려는 정부와 기업의 탈탄소·에너지전환 움직임을 촉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자동차
유럽지역 한국 수출액 1위 품목은 자동차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는 단계적으로 내연기관 차량의 이산화탄소 배출 기준을 강화해, 2035년부터는 유럽 내 휘발유·경유 차량 판매를 사실상 금지하기로 했다. 한국무역협회 자료를 보면 유럽으로 수출되는 자동차는 2017년 이후 내연기관 차량이 감소하고 전기차가 증가하는 추세다. 그러나 여전히 내연기관 차량 수출액(45억9800만달러)이 전기차(26억1100만달러)를 앞선다. 현대차는 지난해 ‘2040년 이후 유럽연합에서 내연기관차를 판매하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이번 조처로 5년을 앞당겨야 한다. 탄소국경조정제도 품목에서 자동차는 제외됐지만 강화된 배출가스 기준을 충족해야 하는 것은 자동업계에 부담이다. 현대차 쪽은 “유럽의 탄소 규제를 자동차 쪽 사업 계획에 반영해 진행하고 있다.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했다.
지난달 30일 공개된 한국무역협회 통상리포트 14호 <한-EU FTA 10주년 성과와 시사점> 갈무리
13일 벨기에 브뤼셀의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건물이 녹색 조명을 이용해 밝히고 있다. 녹색 조명을 배경으로 ‘EUROPEAN GREEN DEAL(유럽 그린딜)’이라는 글씨를 적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 트위터 갈무리
정부·기업 대책 마련
한국 산업통상자원부는 ‘피트 포 55’ 발표가 나온 뒤 “가장 큰 영향이 예상되는 철강 분야에 대해 정책 연구 용역을 거쳐 상세한 영향분석과 대응방안을 수립하는 한편, 부정적 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그린철강위원회 등 산·관·학 협의 채널을 통해 긴밀히 소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앞서 지난 6일 프란스 티메르만스 유럽연합 수석부집행위원장이 방한했을 때 문승욱 산업부 장관은 “이번 발표가 무역장벽으로 작용하지 않도록 해달라”는 뜻을 전한 바 있다.
산업부는 15일 오후 3시 정부서울청사에서 비대면으로 기업들과 유럽연합의 이번 발표에 대한 간담회를 여는 등 긴급 점검에 나섰다. 간담회에는 한국철강협회, 포스코, 현대제철, 동국제강, KG동부제철, 알루미늄 기업인 노벨리스코리아가 참석했다. 기업들도 정부와 논의해 향후 대응 방향을 결정한다는 방침이다. 국내 1위 온실가스 배출기업인 포스코 쪽은 “철강뿐 아니라 온실가스 배출 전 산업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국가적 차원의 전략이 중요해보인다. 유럽연합이 구체적 시행안을 발표하면 영향도에 대해 분석하고 정부와 협업해 부담을 최소화하도록 노력하겠다”고 밝혔다. 현대제철도 “2023년 1월 시행이 예상돼 당장의 사안은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14일 오후 2시(현지시각)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핏포55’를 발표하고 있다. 유럽연합 집행위원회 방송 갈무리
‘피트 포 55’는 유럽연합 회원국과 유럽의회 승인이 필요하다. 최근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는 “미국의 보복 조치 가능성, 중국이나 호주 등의 무역장벽 우려, 유럽연합 인접 국가의 세계무역기구(WTO) 제소 가능성” 등을 들어 “유럽연합 규제 수준이 후퇴할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유럽연합 안에서도 북유럽에 견줘 탄소 감축 대비가 부족한 동유럽 회원국 반발도 예상된다.
이에 대해 2015년 파리기후변화협정 당시 외교부 기후변화대사였던 최재철 기후변화센터 공동대표는 “유럽연합이 이번 정책을 발표할 때 WTO 제소 가능성 등을 고려하지 않았을 리 없다”며 탄소배출 규제 완화 가능성을 낮게 전망했다. 최 공동대표는 “수년 동안 논의해서 만들어진 안이기 때문에 2023년 시행되는 순간부터 세계에 영향을 미칠 것이다. 유럽연합이 자국 내 에너지효율을 끌어올린다는 종합계획을 발표한 만큼 교역국들은 산업 각 분야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에너지전환을 요구받는 한국에는 ‘입에 쓴 보약’이 될 것”이라고 했다.
그린피스 “기후위기 대응에는 미흡하지만 환영”
이번에 나온 탄소국경조정제도는 제품 생산에 어떤 전력을 사용했는지를 따지는 ‘간접배출량’은 포함시키지 않았다. 석탄화력발전으로 만든 전기는 태양광·풍력으로 생산한 전기보다 온실가스 배출이 압도적으로 많다. 또 기업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온실가스 배출권을 무상으로 주는 비율을 단계적으로 낮추되 2035년까지 유지하기로 한 것도 기후단체 입장에서는 아쉬운 지점이다.
그린피스코리아는 “실질적 내용이 부족해 글로벌 기후위기에 제대로 대응하기에는 미흡한 수준”이라면서도 일단 환영의 뜻을 밝혔다. 이어 “국내 산업계는 물론 대선 주자들도 시대흐름을 제대로 읽고 2030년 온실가스 감축 목표 상향과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 확대를 위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했다.
최우리 박종오 기자
ecowoori@hani.co.kr
▶관련기사
[인터뷰] “유럽 탄소국경세 적용, 한국기업 감축 노력에 달렸다”